▲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들이 금메달을 따낸 뒤 김경문 감독을 헹가래치고 있다. 김경문 감독이 하늘 위로 날아가는 듯하다.
[스포티비뉴스=이재국 기자]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은 영원히 잊을 수 없죠."

"2009년 제2회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결승 진출도 감동적이었지만, 2006년 제1회 WBC 4강에 올랐을 때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은 야구사적으로 정말 중요한 터닝포인트였죠."

"2000년 시드니올림픽, 2015년 프리미어12 일본전 승리도 잊지 못할 추억입니다."

선배들의 눈물과 땀, 후배들의 불굴의 도전정신과 애국심으로 한국야구는 그동안 국제무대에서 눈부신 성과와 수많은 전설들을 만들어왔다. 역사가 쌓이면서 하나하나 손에 꼽기도 힘들 만큼 명승부들이 빚어졌다.

스포티비뉴스는 창간 5주년을 기념하고 2019 WBSC 프리미어12 대회 개막에 맞춰 야구인 50명을 상대로 특집 설문조사를 했다.

'역대 국제대회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과연 야구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설문조사 어떻게 했나?

설문은 지난달 포스트시즌 기간까지 진행된 가운데 모두 50명이 참여했다. 우선 10개 구단 단장, 감독(또는 코치), 선수 1명씩 총 30명이 나섰다. KIA 맷 윌리엄스 신임 감독은 KBO리그의 역사를 알 수 없어 서재응 코치가 대신 참여했고, 아직 새 감독을 선임하지 않았던 롯데는 임경완 코치가 설문에 응했다. 선수는 두산 유희관, SK 박정권(은퇴 발표 이전), 키움 박병호, LG 박용택, NC 양의지, kt 유한준, KIA 양현종, 삼성 우규민, 한화 김태균, 롯데 손아섭 등 KBO리그 역사를 잘 알고 있는 각 팀 베테랑급 간판스타가 포함됐다. 여기에 올 시즌 KBO리그 중계를 하고 있는 SPOTV를 비롯해 방송 4사의 해설위원 10명과 KBO리그 역사를 꿰뚫고 있는 전 감독 10명에게 설문 조사를 했다.

답변을 1개만 선택할 수 있다면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고, 변별력이 떨어질 수도 있어서 3개씩 선택하도록 했다. 50명이 3개씩 골랐기 때문에 총 150표가 나온 셈이다.

◆ 1위=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46표-30.7%)

야구인들은 가장 기억에 남는 국제대회로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을 꼽았다. 총 46표가 나왔다. 150표로 따지면 30.7%의 비율을 차지했다. 50명이 3표 모두 한 곳에 투표할 수는 없기 때문에, 사실상 50명 중 46표를 얻었다고 보면 92%가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을 선택한 셈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은 한국야구사에 영원히 기록되고, 팬들의 기억 속에서도 영원히 잊히질 않을 대회다. 김경문 감독이 이끈 한국 대표팀이 수확한 9전 전승 금메달 자체도 위대한 결과이지만, 거의 매 경기가 명승부로 펼쳐져 더욱 짜릿한 감동을 선사했다.

네덜란드전에서만 10-0으로 콜드게임승을 거뒀을 뿐, 나머지 8경기는 모두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는 승부 속에 승리를 따냈다. 최종 스코어가 1점차 승부로 결정된 것만 무려 5차례였다. 예선 미국전 8-7 승, 중국전 1-0승, 캐나다전 1-0 승, 대만전 9-8 승, 결승 쿠바전 3-2 승. 그 중 4경기에서 역전승을 거뒀다. 7회 이후 역전승만 3차례였다. 예선 일본전은 2-2 동점에서 9회초 3점을 뽑아내며 5-3 역전승을 거뒀고, 준결승 일본전에서도 2-2 동점이던 8회에 이승엽이 결승 2점홈런을 때려내면서 한꺼번에 4점을 뽑아 6-2 역전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 참가한 주인공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대표팀에 나가지 않은 야구인들 역시 이구동성으로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을 대부분 첫 손가락에 꼽았다. 현 대표팀 주전 포수인 양의지는 "국제대회에서 전승하기 힘든데 그런 기록을 세우고 우승했다는 점에서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9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따낸 한국 야구 대표팀 선수들이 태극기를 들고 우커송구장을 돌며 기뻐하고 있다.
◆ 2위=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우승=32표(21.3%)

야구인들에게 잊지 못할 국제대회 2위는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이었다. 최종 일본전에서 김재박의 개구리번트와 한대화의 결승 3점홈런, 선동열의 완투승 등으로 빚어낸 우승은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150표 중 32표(21.3%)를 얻었다. 50명 중에 32명이 꼽았으니 64%가 이를 선택한 셈이다.

1982년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들에겐 다소 의외의 결과로 비쳐질 수 있으나 야구인들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감동과 역사적 의미를 잊지 못하고 있다.

1960~70년대 실업야구 선수로 활약한 국가대표 3루수 출신 원로 야구인 강병철 전 롯데 감독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는 엄밀히 말하면 아마추어 선수들이 출전한 대회다. 일본 선수들도 그렇고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국야구사적으로만 놓고 보면 이 대회는 한국야구에 매우 중요한 터닝포인트였다고 본다"고 평가하면서 "나도 당시 동아대 감독이었지만 이 경기를 보기 위해 부산에서 지인들과 함께 상경해 경기를 보고 밤기차를 타고 부산에 다시 내려갔던 기억이 난다. 그 정도로 온 국민이 이 경기를 지켜봤고, 모두들 감격해했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당시 경제적으로도 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넘어간 과도기였고, 야구도 국제무대에서 견줄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특히 일본에 비해 몇 수 아래로 평가받고 있었다.

한국은 1975년 처음 세계 대회에 나가기 시작해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슈퍼월드컵에서 사상 최초로 세계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외신을 타고 들어온 소식만 전해 들었을 뿐 직접 경기를 보면서 우승의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1982년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는 한국에서 개최된 최초의 세계 대회였다. 그해 프로야구가 출범했지만 이 대회를 위해 국가대표 선수들의 프로 진출을 유보했을 정도로 국가적으로 공을 들인 대회였다.

▲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결승 3점홈런을 친 한대화(동국대 4)와 완투승을 올린 선동열(고려대 2). ⓒ한국야구사
풀리그로 치러진 이 대회에서 한국은 일본과 7승1패씩을 기록한 뒤 최종전에서 격돌했다. 이 경기에서 우승팀이 가려진 것이었다.

고려대 2학년생으로 대표팀 막내였던 선동열은 미국과 자유중국(대만)전에 출전해 가장 믿을 만한 에이스로 도약했고, 일본과 최종전에 선발등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2회 2점을 먼저 내주고 말았다. 이후 역투를 펼치며 일본 타선을 막아냈지만 한국은 7회까지 일본 선발투수 스즈키에게 1안타로 끌려갔다.

그러다 8회에 대거 5득점하며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한국야구를 관통하는 '약속의 8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 대회가 사실상 원류라고 할 수 있다.

선두타자인 8번 심재원이 중전안타를 치고 나간 뒤 대타 김정수가 1타점 2루타를 치면서 1-2로 따라붙었다. 이어 1번타자 조성옥의 희생번트로 1사 2루. 여기서 그 유명한 김재박의 개구리번트가 나온다. 상대 배터리가 스퀴즈번트에 대비해 피치아웃을 해 하마터면 3루주자가 객사할 뻔했지만, 김재박은 타석에서 개구리가 점프를 하듯 공중으로 솟구치며 가까스로 번트를 대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 타구는 3루 파울라인 안쪽을 타고 흐르며 기막힌 내야안타가 됐다. 2-2 동점.

계속된 2사 1·2루에서 타석에 들어선 한대화가 바뀐 투수 세키네를 상대로 왼쪽 폴을 때리는 3점 홈런을 날리면서 5-2로 전세를 뒤집었다. 이어 9회초 선동열이 일본 타선을 막아내면서 완투승으로 한국의 우승을 완성했다.

김재박 전 LG 감독은 "당시 잠실구장 관중석이 3만 명 규모였는데 무려 5만 명이 입장했다고 했다. 입석표까지 다 팔아 팬들이 의자가 아니라 계단 통로까지 빼곡하게 들어차 함께 열광했던 기억이 난다"고 기억을 돌이켰다.

나이가 있는 야구인은 물론 그 시절을 기억하기 어려운 나이였을 롯데 임경완(1975년생), KIA 서재응(1977년생) 코치, LG 박용택(1979년생), SK 박정권(1981년생), 삼성 우규민(1985년) 등도 1982년의 신화를 선택했다. 한국야구 최초이자 기적 같은 역전 드라마의 원류에 한 표를 던졌다.

▲ 2006년 제1회 WBC 2라운드에서 미국을 이긴 한국 선수들이 기쁨을 나누고 있다.
◆ 3위=2006년 WBC 4강=26표(17.3%)

2006년 WBC는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한국야구가 르네상스를 맞기 시작한 기틀을 마련해준 대회다. 제1회 WBC는 현역 메이저리그 최고 스타들까지 참가한 대회로, 세계야구사의 획기적 전환점이 됐다. 현역 메이저리거들이 즐비한 중남미 국가들의 전력도 압도적 느낌이었지만, 일본 역시 최정예 멤버로 대표팀을 구성해 한국이 4강 신화를 만들어낼 것으로 예상한 이는 거의 없었다.

한국도 사상 최강의 전력을 구성했다. 현역 메이저리거인 박찬호(샌디에이고)와 서재응(LA 다저스), 김선우, 김병현(이상 콜로라도), 봉중근(신시내티)이 마운드에 포함됐고, 뉴욕 메츠에서 한화로 돌아온 구대성을 비롯해 손민한 배영수 박명환 오승환 정대현 등 KBO리그 최고 투수들이 가세했다.

타선에서도 현역 메이저리거였던 최희섭(LA 다저스),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이승엽 등 해외파가 중심을 이뤘다. 주장 이종범 등 KBO리그 최정예 멤버들이 태극마크를 달았다.

한국은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일본전에서 8회 이승엽의 역전 2점홈런으로 3-2 역전승을 거두고 아시아라운드 1위로 미국으로 날아갔다.

한국은 2라운드 첫 상대 멕시코를 2-1로 꺾은 뒤 미국마저 격파하는 거짓말 같은 일을 저질렀다. 당시 미국 선발투수는 2005년 22승을 거둔 돈트렐 윌리스였다. 한국전에 나선 미국의 라인업을 보면 입이 벌어질 만했다. 1번 버논 웰스, 2번 데릭 지터, 3번 켄 그리피 주니어, 4번 알렉스 로드리게스, 5번 치퍼 존스, 6번 제이슨 배리텍, 7번 마크 테셰라, 8번 맷 할러데이, 9번 체이스 어틀리가 포진했다.

이 팀을 상대로 한국이 7-3으로 승리하자 미국 언론들도 "도대체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로 놀라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 2006년 WBC 2라운드에서 만난 미국 대표팀은 메이저리그 올스타가 총망라된 팀이었다. 알렉스 로드리게스(오른쪽)과 데릭 지터(왼쪽에서 2번째) 등이 한국전에서 패배가 다가오자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한국은 2라운드에서 다시 만난 일본마저 2-1로 물리치고 6전 전승으로 준결승전에 올랐지만, 3번째 만난 일본에 0-6으로 패해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일본은 한국에 두 번이나 지는 등 5승3패로 우승했고, 한국은 6연승 후 단 1패만으로 4강 진출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은 야구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부흥의 날개를 폈다.

한국은 2009년에 열린 제2회 WBC에서 결승에 진출해 준우승을 차지하는 신화를 썼지만, 오히려 이번 야구인 설문조사에서는 제1회 WBC에 표가 더 많이 나왔다. 총 26표로 17.3%였다.

제1회 WBC와 2회 WBC 사령탑이었던 김인식 전 국가대표 감독은 "결과만 놓고 보면 준우승을 한 2009년 대회가 더 높이 평가될 수도 있겠지만, 나 역시 첫 대회였던 2006년 4강이 더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일본하고는 그 대회에서도 가장 많이 만났고, 또 당시 미국 라인업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솔직히 '망신만 당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붙었는데 우리가 미국을 이길 줄 누가 알았겠냐"며 웃었다.

당시 코칭스태프로 참가한 조범현 전 국가대표 감독은 "한국야구를 세계 무대에 알린 결정적인 대회가 바로 2006년 WBC였다"고 설명했다. 원로야구인 박영길 전 감독은 "한국야구 역사를 보더라도 제1회 WBC 대표팀 멤버가 가장 화려하고 강하지 않았나. 앞으로 이런 팀을 구성하기도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 2015년 WBSC 프리미어12에서 초대 챔피언에 오른 한국 선수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4위=2015년 프리미어12 우승=17표(11.3%)

4위는 2015년 WBSC 프리미어12 초대 우승이 차지했다. 총 17표(11.3%)를 획득했다. 아무래도 최근에 펼쳐진 국제대회여서 기억에 잘 남아 있기도 하지만, 준결승에서 일본을 상대로 기적 같은 역전 드라마로 '도쿄대첩'을 만들어낸 장면을 잊지 못하고 있다.

당시 일본 대표팀에는 현재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투타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오타니 쇼헤이(LA 에인절스)가 전력의 핵이었다. 한국은 삿포로돔에서 열린 개막전에서 일본에 0-5로 완패했다. 선발투수 오타니 쇼헤이를 상대로 6이닝 동안 10개의 삼진을 당하면서 단 2개의 안타만 기록할 정도로 압도당했다.

8강전에서 쿠바를 7-2로 대파하며 준결승전에 진출한 한국은 도쿄돔에서 다시 일본을 만났다. 한국전 선발투수로 나선 오타니는 시속 160㎞를 넘나드는 강속구 등 더 무시무시한 구위를 뽐냈다. 한국은 4회에 3점을 내준 가운데 오타니에게 6회까지 노히트노런으로 끌려가 1점을 뽑기도 어려워 보였다. 7회초 선두타자 정근우가 첫 안타를 때려냈지만 오타니에게 7회까지 11개의 삼진을 당하며 무득점에 그쳤다.

일본은 승리를 확신한 듯 오타니를 내리고 8회초부터 노리모토 다카히로를 투입했다. 8회에도 삼자범퇴로 물러나며 움츠렸던 한국은 9회초 한꺼번에 4점을 뽑아내며 기적의 대역전 드라마를 만들었다.

김인식 감독의 연이은 대타 카드가 성공했다. 대타 오재원, 대타 손아섭이 연속 안타로 무사 1·2루의 기회를 잡았다. 이어 정근우가 1타점짜리 좌익선상 2루타로 첫 득점을 생산했다. 무사 2·3루에서 이용규의 몸에 맞는 공으로 무사 만루의 황금 기회가 찾아왔다.

여기서 일본은 투수를 마쓰이 유키로 바꿨지만 김현수의 밀어내기 볼넷으로 2-3 턱밑까지 추격했다. 일본이 다시 투수를 마스이 히로토시로 교체하자 이대호가 3루수 키를 넘겨 좌익선으로 날아가는 2타점 적시타를 때리면서 거짓말 같은 4-3 역전극을 완성했다.

당시 대표팀 전력분석팀장이었던 KBO 김시진 경기운영위원은 "오타니에게 완전히 압도를 당하면서 8회까지도 점수를 뽑지 못해 이기기 쉽지 않다고 봤다. 그런데 9회에 그런 대역전승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국가대표 사령탑에서 물러난 김인식 감독 역시 "국가대표 감독으로 나만큼 일본전을 치러본 사람 있겠느냐"면서 "그 중에서도 프리미어12 준결승에서 거둔 극적인 역전승은 잊지 못할 것 같다. 8회까지 꼼짝 못하다 9회에 뒤집어엎었다"며 웃었다.

▲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들이 3~4위전에서 일본을 꺾고 올림픽 사상 야구 종목 최초 동메달을 확정하자 일제히 그라운드로 달려가며 기뻐하고 있다. 가운데 앞장서서 달리고 있는 김기태 전 KIA 감독의 현역 선수 시절 모습이 눈길을 끈다.
◆5위=2000년 시드니올림픽 동메달=15표(10%)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이 나오면서 다소 뒤로 물러나긴 했지만 2000년 시드니올림픽 동메달 역시 많은 이들이 여전히 잊지 못하는 명장면으로 떠올렸다. 15표를 얻어 10%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시드니올림픽은 한국야구가 최초로 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한 대회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남다르다. 특히 한국은 물론 일본도 프로 최정예 멤버로 국제대회에 나선 첫 대회였다는 점에서 일본을 이기고 동메달을 딴 의미는 절대 과소평가할 수 없다.

동메달이 결정되는 3~4위전에서 한국은 당시 일본 '괴물투수'로 꼽히던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상대했다. 한국의 구대성과 팽팽한 투수전이 이어졌고, 0-0의 균형이 좀처럼 깨지지 않았다. 한국은 8회말 2사 2·3루의 찬스를 잡았고, '국민타자' 이승엽이 여기서 마쓰자카를 상대로 좌중간을 가르는 2타점 2루타를 날렸다. 이어 김동주의 우전적시타로 3-1 승리하면서 사상 첫 올림픽 동메달을 획득했다.

대표팀을 지휘한 김응용 감독은 당시 "동메달을 딴 것보다 일본을 이긴 것이 더 기쁘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 2009년 WBC에서 한국이 2라운드에서 일본을 꺾고 4강 진출을 확정하자 봉중근(왼쪽)과 이진영이 샌디에이고 펫코파크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고 있다.
◆ 6위=2009년 WBC 준우승=14표(9.3%)

2009년 WBC 준우승 역시 한국야구사와 팬들의 기억에서 잊을 수 없는 대회다. 총 14표(9.3%)를 얻었다. 시드니올림픽 동메달에 비해 1표가 뒤져 6위를 차지했다.

2009년 WBC에서 한국은 결승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결승전에서 연장 10회 접전 끝에 스즈키 이치로에게 통한의 결승타를 맞아 3-5로 패한 점이 아쉬웠다. 그러나 어쩌면 앞으로 WBC 대회에서 한국이 준우승을 차지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당시 김인식 감독이 말한 '위대한 도전'이었고, '위대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설문조사에서 6위가 된 것은 아무래도 설문 참가자들이 2006년 WBC와 2009년 WBC를 함께 포함하기보다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대회를 넣는 편이 낫다고 판단해 표가 분산된 결과로 분석된다.

실제로 2006년 WBC 4강과 2009년 WBC 준우승을 동시에 선택한 이는 드물었다. 설문에 참여한 50명 중 KIA 조계현 단장과 양현종, 박영길 조범현 전 감독 등 4명만 2개 대회를 답변에 포함시켰다.

당시 결승까지의 과정 자체도 드라마 같았다. 도쿄돔에서 열린 아시아라운드 1~2위 결정전에서 1-0 승리를 거둔 것도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었다. 선발투수 봉중근은 일본의 간판스타인 스즈키 이치로와 신경전을 벌이는 등 투쟁심을 발휘하며 5.1이닝 무실점 역투를 펼치면서 일약 '봉의사'로 국민적 영웅이 됐다. 뒤를 이어 등판한 마당쇠 정현욱도 별명이 '국민노예'로 승격하며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다.

2라운드에서 멕시코와 일본을 격파하면서 준결승전에 진출한 한국은 메이저리거가 즐비한 베네수엘라를 10-2로 꺾고 결승 진출 티켓을 따냈다. 선발투수 윤석민이 6.1이닝 2실점 역투로 메이저리그 관계자들까지 깜짝 놀라게 했고, 동갑내기 김태균 추신수는 홈런을 치면서 타선을 이끌었다. 김태균은 이 대회에서 홈런 3방과 11타점을 올리면서 홈런왕과 타점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결승전에서 연장 10회초 이치로에게 2타점 중전 적시타를 맞고 3-5로 패해 준우승에 그쳤지만, 명승부로 평가받을 만했다. 0-1로 뒤진 5회말 추신수의 동점 홈런이 터졌고, 2-3으로 뒤진 9회말 2사 1·2루에서 이범호가 다르빗슈 유를 상대로 극적인 동점 적시타를 때려 국민들을 열광케 했다.

스포티비뉴스=이재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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