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만의 주요 일간지인 중국시보, 자유시보, 연합보 13일자 1면. 대만 언론들은 일제히 전날 일본 지바 조조마린스타디움에서 열린 프리미어12 한국전 7-0 승리를 대서특필하면서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타이베이(대만), 김윤석 통신원
▲ 대만 선수들이 12일 일본 지바 조조마린스타디움에서 열린 한국전에서 7-0으로 완승을 거둔 뒤 손을 높게 치켜들고 환호하고 있다. ⓒ지바(일본), 곽혜미 기자
[스포티비뉴스=타이베이(대만), 김윤석 통신원] "하오샹잉한궈(好想贏韓國)." 지난 2013년 대만 타이중에서 열린 제3회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1라운드 3차전에서 대만이 한국을 2-1로 이기고 있다가 8회에 강정호에게 투런 홈런을 맞고 2-3으로 역전당한 후 대만의 유명 캐스터가 방송에서 펑펑 울면서 외친 말이다.

"하오샹잉한궈"는 "정말 한국을 이기고 싶다"는 뜻의 중국어다. 이 말은 이제 대만에서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굳어져 어떤 분야에서든지 한국을 만나면 사용하는 문장이 됐다.

이번 2019년 제2회 WBSC(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 프리미어12 대회를 자국으로 유치하기 위해 큰 투자를 했던 대만은 다행히 예선라운드에서 2승1패로 B조 2위(1위 일본)의 성적을 안고 일본에서 열리는 슈퍼라운드에 합류했다. 예선라운드 초반 두 경기 푸에르토리코와 베네수엘라를 이기며 기세를 올렸던 대만은 일본에 패한 뒤 슈퍼라운드 첫 경기 멕시코전에서도 3안타의 빈타에 그치며 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야구종주국 미국이 슈퍼라운드에서 한국에 1-5로 완패하자 대만 네티즌들은 "이제 희망이 사라졌다"며 체념했다. "한국을 이기기는 쉽지 않다"는 어둡고 무거운 공기가 팽배했다. 적어도 12일 슈퍼라운드 2번째 경기인 한국전을 시작하기 전까지 그랬다. 대만의 가장 큰 야구 커뮤니티에서는 "과연 한국에 얼마나 크게 질까"가 관심사였을 뿐, "한국에 지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미리 체념하는 글들이 넘쳤다.

이번 프리미어12에서 2020년 도쿄올림픽 출전권을 따내지 못하더라도 내년 3월에 대만에서 열리는 패자부활전 성격의 6강전(세계예선)에서 1위를 하면 다시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대만야구협회가 미리 프리미어12에서 탈락할 것을 예상하고 세계예선 주최권을 따온 것 아니냐"는 얘기부터, "오히려 야구협회는 큰돈을 벌어서 더 좋아할 듯하다"는 뼈아픈 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

대만은 결국 프리미어12가 열리기 직전 타이중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현역 메이저리거 1명과 다수의 마이너리거를 포함한 최강 전력을 꾸려 2위를 차지하면서 내년에 열리는 6강전 티켓을 미리 확보해 놓았다.

대만은 자국에서 열린 대회라서 표면적으로는 자국 팬을 위해 최강의 팀을 꾸렸다고는 했지만, 프리미어12에서 한국을 제치고 아시아·오세아니아 국가 중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해 도쿄올림픽 출전권을 따는 게 쉬운 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다음 방법으로 내년 3월에 열리는 최종 6강전 진출권 확보와 대회 주최권 획득으로 대비한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 대만 천쥔시우(오른쪽)가 12일 프리미어12 한국전에서 7회 승부에 쐐기를 박는 3점홈런을 날린 뒤 동료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지바(일본), 곽혜미 기자
기존의 스타 출신들이 컨디션 난조 등을 이유로 대거 탈락한 이번 대표팀은 '신구의 세대교체'라는 목표와 함께 홍이중 감독을 필두로 "메이짜이파('두려움 없이'라는 뜻으로, 영어의 'No Fear'에 해당)"라는 구호 아래 뭉쳤다.

대만은 최근 수년간 대만야구협회(CTBA)와 대만프로야구연맹(CPBL) 간의 갈등으로 제대로 된 대표팀을 꾸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만은 다름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대회마다 급수를 나눠 출전하기로 한 후 프로연맹에서 담당한 첫 대회가 바로 프리미어12다. 대만 ‘교육부체육서(한국의 문화체육관광부 개념)와 CPBL, CTBA가 모처럼 큰 잡음 없이 대표팀을 구성한 대회기도 하다.

사실 아마추어야구를 관장하는 CTBA는 CPBL과 거의 앙숙일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현재 프로팀 중신슝디 구단주 출신인 대만 중신 금융지주사 부회장인 재벌 2세 구중량 씨가 CPBA 이사장 선거에 당선되면서부터 양 단체의 사이가 점점 가까워졌다.

처음엔 대만 대표팀 감독을 선발할 때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현재 대표팀을 이끄는 라미고 팀의 홍이중 감독이 대표팀 감독 자리를 여러 번 고사하면서 난항에 빠졌다가 8월에서야 겨우 설득해 감독 자리에 앉혔다.

그래서 선수 선발에 감독의 의중이 많이 반영될 수 있었고, 오랫동안 라미고 팀을 맡아오면서 깊이 이해하는 부분을 선수 선발에 반영했다. '감독의 색깔이 보이는 인선'이라고 미디어는 평가했다. 이번 대표팀은 대부분 라미고 출신의 코치진에 전체 선수 중 30% 가까이 라미고 현역 선수나 라미고 출신 선수로 선발해 익숙하게 팀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거기에 슈퍼스타 출신의 왕지엔민 투수코치와 여러모로 귀감이 되는 펑정민이 은퇴 후 바로 대표팀 타격코치로 합류하면서 팀에 구심점이 생겼다.

이 것이 중요한 포인트다. 그동안 대표팀은 항상 내부적인 문제로 충돌하거나 자멸하거나 분란이 생기면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적이 많았다. 그러나 시대를 대표하는 스타 출신 두 명이 코치로 있기에 편가르기를 하던 선수들도 감히 어찌할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었다.

게다가 전 선수협회장 후진롱과 아메이족 원주민 출신인 노장 왕셩웨이가 대표팀에 합류하면서 적절하고 노련하게 대표팀을 완성하는 역할을 했다. 이번 대표팀에 모두 15명의 원주민 출신 선수가 있기에 팀 내 화합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들이 대만 대표팀에 합류하면서 솔선수범하고 노련하게 팀을 이끌고 있다.

전력 구성 면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투수진에서는 좌완이 천관위 한 명밖에 없었는데, 다행히도 대회 얼마 전에 끝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왕종하오라는 좌완 스페셜리스트를 대체 선수로 선발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야수 중에서 안정적인 자원도 있고 네임밸류가 높은 선수도 있지만, 감독의 의중 대로 전체적으로 스피드도 있고, 콘택트도 좋고, 수비도 나쁘지 않은, 평균 이상의 젊은 선수들을 선발해 과감히 기용했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골칫거리였던 내야 문제도 세대교체를 단행할 수 있었다.

메이저리그가 멀지 않아 보이는 대표팀 에이스 장샤오칭, 다시 메이저리그에 도전하는 후즈웨이 등 확실한 선발감을 주축으로 놓고,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 중인 장이까지 세 명의 선발진을 꾸렸다. 여기에 한국전에 여러 차례 강한 면모를 보인 좌완 천관위와 함께 대부분의 투수를 시속 150㎞ 이상 빠른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로 뽑았다. 프로에서 많은 경험을 한 마무리 투수들과 마이너리그에서 마무리와 선발을 골고루 경험한 신예 유망주로 꾸려진 마운드는 현재 대만 팀의 최대 강점이다. 여기에 왕지엔민이 그 투수진을 이끌면서 팀이 절대적으로 그를 신뢰하고 따르고 있다는 점도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대만은 이렇게 여러 가지 시도를 통해 예년과는 다르게 단점보다 장점이 많은 팀이 됐다. 예선 B조 3차전에서 일본을 상대로 11안타(산발에 그쳐 1-8로 패했지만)를 기록하는 등 가능성을 보였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분위기다. 한국이 국제대회에 나가면 '다른 팀에는 다 져도 일본만은 이겨야 한다'는 심정으로 경기에 임한다. 또 일본을 이기면 모든 게 다 용서가 되는 분위기처럼, 대만 역시 한국을 상대로 배수진을 치고 일전을 기다려왔다.

대만은 12일 일본 지바 조조마린스타디움에서 열린 슈퍼라운드 한국전에서 7-0 대승을 거뒀다. 국제대회에서 종종 한국의 발목을 잡은 적은 있지만 이렇게 큰 점수 차이로 완승을 거둔 것은 처음이다.

한국 선발투수 김광현은 평소와 다르게 속구 구속이 떨어졌고, 대만 타자들은 경기 초반부터 그런 김광현의 속구를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쳤다. 1회말에 대만 선발투수 장이는 컨디션 난조로 1사 2·3루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한국은 여기서 점수를 뽑지 못하면서 장이를 살아나게 만들었다. 이후에도 한국으로선 경기가 말렸다. 대만에게 행운이 깃드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만 타선이 한국 마운드를 난타하고, 대만 투수진이 한국 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는 것은 그만큼 대만 대표팀이 준비를 철저히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지난 2017년 제4회 WBC 서울라운드에서 대만은 야구협회가 구성한 대표팀이 이스라엘, 네덜란드, 한국에 모두 지면서 참패를 당한 바 있다. 그 와중에 전력분석팀이 사용한 금액 중 사용처가 불분명한 500만 대만 달러(현재 환율로 약 1억9000만 원) 때문에 한바탕 큰 소동이 벌어졌다. 대만의 한 입법위원(한국의 국회의원) 보좌관이 폭로한 후 큰 문제가 돼 떠들썩했다.

대만은 당시의 실패를 교훈 삼아 이번에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나왔다. 모두 16명이나 되는 전력분석팀을 꾸렸다. CPBL 내 전문 분석팀과 각 프로팀 스카우트들이 참가했고, 대만 메이허 과학대학 야구부원 13명이 수집된 자료 기록을 도와줬다. 상대할 팀의 자료와 영상을 수집,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 경기 전 선수들과 함께 연구하고 토론을 했다.

"상대의 타구 방향이나 버릇, 투수의 구종과 장단점 등 해당 팀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아 실전에서 큰 효과를 봤다"고 대만 대표팀의 코치와 선수들 모두 입을 모아 칭찬했다. 전력분석이 발전했다는 사실이 예년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전에 대비해 7월부터 전력분석팀을 한국에 파견하고 KBO리그 자료를 모으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물론 한 경기 승리로 모든 것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이번 대만의 한국전 승리는 이처럼 행운이나 우연이라기보다는 철저한 준비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이 항상 일본을 이기려고 준비하는 것처럼, 대만도 한국만 만나면 나라 전체가 똘똘 뭉쳐 이겨보려고 기를 쓴다. 한국이 일본을 상대하듯, 이제 한국은 대만도 철저하게 분석하고 준비를 해야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한국 대표팀이나 야구팬들은 대만은 한 수 아래로 여기고 대만에 대해서는 일본을 상대할 때만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중요한 국제대회에서 종종 대만에 덜미를 잡히는 모습을 보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 한국 선수들이 12일 일본 지바 조조마린스타디움에서 열린 대만전에서 0-7로 패한 뒤 고개를 숙여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지바(일본), 곽혜미 기자
한국은 지난해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도 대만에 패한 바 있다. 실업팀 선수 위주로 선발해 나온 대만 대표팀에 한국 프로야구 선발팀은 1-2로 패했다. 그러나 이후 다른 나라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일본을 이기면서 결국 금메달이라는 목표를 달성했기에 대만전 패배가 크게 다가오지 않은 듯하다.

6년 전 대만 캐스터의 "하오샹잉한궈"라는 절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만은 늘 한국을 이기기 위해 연구하고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만은 12일 한국전에서 7-0 대승을 거뒀다. 다음날인 13일 대만의 언론들은 일제히 이 사실을 1면에 대서특필했다. 대만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물들었다. 늘 앞서 가는 일본만 바라보고 달려온 한국야구는 이제 대만도 돌아봐야할 시점이다.

스포티비뉴스=타이베이(대만), 김윤석 통신원(대만야구 전문가·전 국가대표 대만 전력분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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