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팬서비스와 사회공헌활동을 자랑하는 박종훈은 2019년 KBO 사랑의 골든글러브 수상자로 선정됐다 ⓒSK와이번스
[스포티비뉴스=김태우 기자] 세 남자가 뭔가에 몰두 중이었다. 야구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공이 아닌 펜을 들고 있었다. 새하얀 종이는 알 수 없는 뭔가의 문자로 가득 찼다가 지워지기 일쑤였다. 그들은 자신의 상징을 만들고 있었다. ‘사인’이었다.

세 명의 선수 중에는 박종훈(28·SK)도 있었다. 박종훈은 ‘사인’을 만들 당시를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프로에 입단한 지 얼마 안 됐던, 1군 선수가 아니었던 시점이었다. 박종훈은 “프로 데뷔 전에는 사인이 없었다. 그냥 한글로 ‘박종훈’이라고 쓴 게 전부였다”면서 “필요성은 느낀 뒤에 (김)태훈이형, (임)정우와 앉아서 한참이나 사인을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사인이 SK 팬들, 이를 넘어 프로야구 팬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될 줄은 몰랐다고 털어놓는 박종훈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박종훈은 리그에서 가장 ‘사인’으로 유명한 선수이자 팬서비스의 선두주자로 뽑히는 모범적인 선수가 됐다. 단순히 야구만 잘해서는 안 되는 요즘 세상에서 더 환히 빛나는 가치다.

유니폼 벗으면…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

어려운 시기도 있었지만, 결국은 극복했다. 리그에서 가장 낮은 타점에서 공을 던지는 이 선수는, 이제 리그를 대표하는 선발투수 중 하나로 성장했다.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제구 이슈를 상당 부분 해결한 성과다. 2017년 12승, 2018년 14승을 기록한 박종훈은 최근 두 차례의 국제대회(2018 아시안게임·2019 프리미어12)에서도 태극마크를 달고 모두 선발로 뛰었다. 소속팀에서나 대표팀에서나 전략적 가치는 매우 높다.

그런 박종훈은 어릴 때까지만 해도 야구선수가 꿈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야구를 하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고 있을까?”라는 질문에 박종훈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직장인은 아니었을 것 같다. 누구 밑에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아무래도 자영업자 아니었을까요?”라고 되묻는다. 조금 더 생각한 박종훈은 “아니면 군인이었을 것 같다. 집안에 군인이 많다”고 했다.

박종훈은 “자영업자나 군인이나 보편적으로 사인을 하는 직군은 아니다”고 껄껄 웃었다. 야구선수가 아니었다면, 박종훈은 2군의 허름한 시설에서 사인을 만드느라 몇 시간을 싸우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야구선수, 그것도 프로야구선수인 이상 사인은 ‘의무’라는 것이 박종훈의 소신이자 지론이다. 박종훈은 그런 생각과 함께 매일 팬들과 마주한다. 허리를 굽히는 것도, 머리를 숙이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박종훈은 “프로 스포츠 선수는 사인을 할 수 있는 특수한 직업 중 하나다. 사람이 힘들 때 못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할 수 있는 선에서는 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기 위해 사인을 만든 게 아닐까”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난 유니폼을 벗으면 평범한 사람이다.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금은 팬들의 사랑을 받고, 또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직업이지만 막상 이 판을 떠나면 평범한 일반인일 뿐이다. 박종훈이 오늘도 펜을 드는 이유다.

▲ 2019년 희망더하기 행사에 참가한 박종훈. 박종훈은 희망더하기 행사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선수 중 하나다 ⓒSK와이번스
동료들은 “이제 박종훈은 사인을 안 하면 욕을 먹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한 번의 실수나 팬들의 비난이 지금까지 애써 쌓은 이미지를 무너뜨릴 수 있다. 분명히 부담이 되는 여건이다. 그러나 박종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팬들에게 고마워한다. 박종훈은 팬들이 맹목적으로 사인이나 팬서비스만 바라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오히려 선수들을 배려한다고 말한다. 팬서비스를 부담스러워하는 다른 선수들도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 있다.

“정말 힘들 때는 양해를 구한다. 선발로 던지고 너무 힘들거나, 혹은 아이싱 때문에 팔이 부어서 떨릴 때가 있다. 그럴 때 ‘사진만 찍을 수 있을까요?’라고 하면, 팬들은 무리하게 사인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사진만 찍는다. 그리고 요즘에는 팬분들이 자체적으로 정리를 한다. 팬들이 먼저 ‘선수가 오늘 힘드니 사진만 찍자, 혹은 오늘 결과가 좋지 않으니 오늘 같은 날은 사인을 받지 않는 게 좋겠다’라고 하면 옆에 팬들도 ‘그럽시다’고 호응을 해주신다. 팬들이 다 알아서 해주신다. 줄도 알아서 서 주신다.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일찍 느낀 소중한 가치, 세상을 따뜻하게 보다

사인만 잘하는 선수였다면, 2019년 KBO 사랑의 골든글러브 수상자는 박종훈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오히려 박종훈의 진짜 가치는 야구를 통한 사회 환원과 봉사에 있다. 박종훈의 기부와 선행은 알려진 것만 해도 팬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한다. 연봉이 적어 살림이 빠듯할 때도 매달 50만 원 이상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당시 구단 관계자들은 "대단한 일이다. 야구를 더 잘하면 빛이 날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현실이 됐다.

연봉이 오르자 기부액도 늘었다. 2018년부터는 순차적으로 1승당 100만 원, 1이닝당 10만 원, 탈삼진 하나당 5만 원 등을 적립해 다양한 분야에 기부하고 있다. 인하대 병원과 공동으로 소아암 환아 후원 행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최근 2년간 기부 금액이 이것저것 합쳐 4000만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26일에는 인하대 병원을 직접 찾아 팬사인회를 하면서 뜻 깊은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단순히 돈이 아닌, 진심을 느낄 수 있는 행보다.

이처럼 일찌감치 기부 문화에 눈을 뜬 이유로 박종훈은 ‘가족’을 말한다. 박종훈은 다른 선수들에 비해 일찍 결혼을 한 편이다. 아이도 일찍 얻었다. 또래들이 이제 막 가정을 꾸리기 시작할 때, 박종훈은 세상을 더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다. 아이들을 위한 기부가 많은 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 구단 밖에서 진행하는 행사는 물론, 구단에서 진행하는 ‘희망더하기’ 프로그램에도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선수다.

▲ 팬들과 접점이 늘어날수록 프로 스포츠는 질적인 성장을 할 수 있다. KBO리그에 박종훈과 같은 선수들이 더 많아져야 하는 이유다 ⓒSK와이번스
희망더하기 행사 때마다 전광판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응시하는 박종훈은 프로야구 선수 이전에 아버지다. “어렸을 때 꿈이 유치원 선생님이었다. 동생들이 좋았고, 아기들이 좋았다”고 웃는 박종훈은 “아이를 낳으니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농담을 조금 섞어 신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결국은 산 사람들이 도와야 하더라. 부모의 심정을 많이 느꼈다”고 말했다. 아내도 그런 남편을 전폭적으로 밀어줬다. 박종훈은 “난 결혼을 빨리 해서 성공한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평소 장난기가 넘치는 박종훈은 최근 구단 인턴 대상자 앞에 진지한 모습으로 섰다. 팬서비스에 담긴 구단 가치와 관련된 강연을, 선수가 프런트 앞에서 했다. 평소에는 그 반대가 되어야 정상인데 박종훈은 달랐다. 관계자들은 박종훈의 이야기를 들으며 평소 놓쳤던 것들을 다시 복기할 수 있었다. 전문적으로 말주변은 없었지만, 그의 이야기에는 경험과 진정성이 있었다. 구단 관계자는 "인턴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고 귀띔했다.

같은 행동이라고 해도,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진정성은 달라진다. 추운 겨울과 싸늘해진 ‘팬심’ 속에 ‘온기’를 고민하는 프로야구는 박종훈같은 선수들이 더 필요할지 모른다. “사랑의 골든글러브 시상식이 TV 중계 탓에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것이 아쉽지 않느냐”는 질문에 “한 번씩 잘리더라. 계속 잘해서 다음에 또 받으면 되지 않을까”라고 웃어 넘기는 박종훈이다. 이런 박종훈의 2연패를 저지할 선수들이 많아질수록 프로야구도 팬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SK 담당기자

스포티비뉴스=김태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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