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티비뉴스의 설문에 응한 50명의 리그 관계자들은 '사인 훔치기'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솔직하게 설명했다 ⓒ한희재 기자
[스포티비뉴스=김태우 기자] 메이저리그(MLB) 사무국의 판단은 단호했다. 전자기기를 활용해 조직적으로 사인을 훔친 휴스턴에 중징계를 내렸다. 그러나 현지에서는 “본질적인 문제를 지나쳤다”는 불만이 나온다. “휴스턴의 2017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휴스턴은 2017년 LA 다저스와 월드시리즈 당시 전자기기를 활용해 상대 배터리 사인을 훔쳤다. 이 사실을 알려지면서 당시 휴스턴의 우승 또한 빛이 바랜 것이 사실이다. 모든 이들이 순수성을 의심한다. 하지만 MLB 사무국은 여러 중징계를 내리면서도 휴스턴의 우승 기록과 선수들의 기록은 건드리지 않았다. 사인을 훔친 것이 전체적인 경기력에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정확히 판단하기 어려워서다.

그렇다면 KBO리그에서 유사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어떨까. 한국시리즈 우승 자격을 박탈해야 할까, 혹은 MLB 사무국과 같은 판단을 내릴까. 그리고 사인 훔치기가 경기력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또 전자기기가 아닌, ‘눈’으로 사인을 훔치는 것에 대한 관계자들의 생각은 어떨까. 

[SPO 기획-사인 스캔들] ③편에서는 사인 훔치기에 대한 리그 관계자 50명의 설문조사 내용을 공개한다. 이번 설문에는 현역 감독·단장·코치·선수들은 물론 전직 감독과 KBO리그 사무국 관계자 50명이 참가했다. 리그의 오피니언 리더들이라는 점에서 리그 전반의 인식을 대변하기에 충분할 것이라 믿는다. 

<설문 참가자 50명>

◆구단 30명=김태룡 단장, 김태형 감독, 유희관(이상 두산), 손차훈 단장, 염경엽 감독, 김강민(이상 SK), 김치현 단장, 손혁 감독, 이지영(이상 키움), 차명석 단장, 류중일 감독, 유지현 코치(이상 LG), 김종문 단장, 이동욱 감독, 노진혁(이상 NC), 이숭용 단장, 이강철 감독, 전유수(이상 kt), 조계현 단장, 김종국 코치, 진갑용 코치(이상 KIA), 허삼영 감독, 최태원 코치, 임현준(이상 삼성), 정민철 단장, 한용덕 감독, 이성열(이상 한화), 성민규 단장, 허문회 감독, 김동한(이상 롯데)

◆전 감독 4명=김시진 김용희 김재박 조범현

◆해설위원 10명=김경기 김재현 민훈기 박재홍 서용빈 안치용 양준혁 이종열 장성호 허구연

◆KBO 6명=류대환 사무총장, 정금조 운영본부장, 박근찬 운영팀장, 김풍기 심판위원장, 김제원 기록위원장, 이종훈 기록팀장


◆ 전자기기 활용은 명백한 규약 위반… “KS 우승 박탈해야” 58%

휴스턴의 사인 훔치기가 문제가 됐던 것은 리그에서 금지하는 ‘전자기기’가 동원됐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방법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팀의 타이틀을 박탈해야 할까. 여론을 보면 “그렇다”가 압도적일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박탈해야 한다”가 58%로 더 높은 비중을 차지하기는 했으나 “박탈까지는 아니다”는 의견도 42%에 이르렀다.

“박탈해야 한다”는 의견의 논리는 간단하다. 규약 위반이라는 것이다. 현행 KBO규약에 이런 행위는 명백하게 불법으로 명시되어 있다. KBO 관계자 A는 “KBO리그는 더그아웃 내 전자기기 허용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이를 이용한 사인 훔치기가 적발된다면 곧바로 우승이 박탈되지 않을까 한다”고 밝혔다. 

복수 관계자들도 “기본적으로 스포츠 정신을 위배하는 행위”라고 입을 모았다. 현역 감독들도 상당수가 ‘박탈’에 힘을 줬다. 현역 감독 B는 “정정당당하지 못한 승리다. 누구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할 우승”이라고 했다. 현역 감독 C 또한 “불법은 제재가 필요하다. 엄연히 KBO 규약을 어긴 것이다. 박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박탈까지는 아니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물론 분명한 잘못이기는 하지만, 영향력을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단장과 감독에 자격정지를 내린 MLB 사무국의 중징계는 당연히 인정할 수 있어도 우승 박탈까지는 아니라고 의견을 냈다. 해설위원 D는 “행위는 잘못이지만 경기력에 얼마나 영향을 줬을지 알 수 없다. 실제로 도움이 됐는지, 손실을 입증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했다. 

해설위원 E 또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우승을 박탈하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면서도 “벌금, 사장, 단장 징계, 드래프트픽 징계 등 더 강한 징계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절충안을 냈다. 직접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들도 찬반이 비교적 명확하게 엇갈린 편이었다. 현역 선수 F는 "투수들은 사인 훔치기에서는 자유로웠다. 타자들만의 활약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고 했다.


◆ 변화구인지만 알아도 OK… “타자에 도움된다” 96%

다만 사인 훔치기 행위가 타자에게 유리하다는 것에는 큰 이견이 없었다. “매우 도움이 된다”는 답변이 64%, “약간 도움이 된다”는 답변이 32%였다. “도움이 된다”는 의견이 96%에 이른 셈이다.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타격에 방해가 된다”는 의견은 각각 2%에 머물렀다. 휴스턴은 상대 포수의 사인을 미리 잡아내 들어올 공이 패스트볼인지, 변화구인지를 가르쳐준 게 사실로 드러났다.

전직 감독 G는 “현대야구는 갈수록 구종이 늘어나고 있다. 타자가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사인을 미리 안다면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현역 코치 H는 “알고 치고, 모르고 치고의 차이다. 패스트볼-변화구 대처가 가능하다. 매우 도움이 된다”고 동조했다. 단장 I는 “변화구가 온다고 하면, 일단 낮은 공은 치지 않고 높은 쪽이 타깃을 맞출 수 있다. 카운트가 유리한 상황에서는 큰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현역 감독 J는 “물론 패스트볼이 들어온다고 할 때, 선수들이 패스트볼에 무조건 방망이를 휘둘러 스스로 꼬이는 경우도 있다”면서도 “하지만 교육이 된 팀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휴스턴 타자들의 능력, 그리고 매우 조직적으로 이뤄졌음을 생각하면 이미 대응법을 다 숙지하고 들어갔을 것이다. 훨씬 더 이득이 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현역 코치 K는 “변화구인줄 알면 1루 주자는 스타트를 끊기 쉽다. 주루에서도 엄청나게 큰 이득”이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다만 절대적인 맹신은 금물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조금 도움이 된다”는 문항을 선택한 이들의 논리가 그랬다. 현역 감독 L는 “선수 성향에 따라 다르다. 방해가 된다는 선수들도 있다”고 했다. “매우 도움이 된다”고 답한 전직 감독 M도 “실제로 사인을 알려줘도 방해가 된다고 쳐다보지 않는 타자들이 있었다. 괜히 힘만 들어간다는 이유”라고 했다. 

현역 선수 N은 “슬라이더가 들어온다고 알아도, 슬라이더가 이상한 코스에 들어가거나 생각만큼 예리하게 들어오지 않을 경우 오히려 손해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현역 감독 O는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타이밍이나 코스 등 변수가 워낙 많다. 현실에서도 구종을 알고도 못 치는 경우가 상당히 많지 않은가"고 소수 의견을 냈다.


◆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뺏긴 쪽도 잘못”

사인 훔치기에 전자기기를 이용한 것은 엄연한 불법이다. 그런 사인 훔치기는 “훔친 쪽의 잘못”이라는 데는 이견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만약 전자기기가 아닌, 일반적인 경기 범주의 사인 훔치기라면 어떨까. 이를 테면 1·3루 베이스코치가 포수 사인을 훔친다든지, 혹은 2루 주자가 사인을 훔쳐 알려주는 행위 등이다. 이런 행위는 찬반이 비교적 팽팽하게 갈렸다. 

여전히 “훔친 쪽이 잘못”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정정당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역 선수 P은 “3년 전인가, 선수협 이사회에서도 ‘사인을 훔치지 말자’는 결의안이 통과됐었다. 그런 마당에 사인을 훔친다는 자체가 동업자 정신을 망각한 것”이라고 했다. 현역 선수 Q는 “도둑질을 했으면 한 사람의 잘못 아닌가. 90%는 훔친 쪽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사인 훔치기를 들킨 쪽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정의가 흔들리는 것”(전직 감독 R)이라는 강경한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상황’이라는 가정이 붙으면 응답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졌다. ‘전자기기 이용’에는 강력히 반발하는 이들도,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뺏긴 쪽도 잘못이 있다”는 의견을 낸 관계자들이 적지 않았다.

포수 출신 S를 비롯한 코치들은 “상대에게 우리의 전략을 들키지 않기 위해 사인을 만드는 것이다. 팀마다 이용할 수 있는 전체 사인이 몇 개 있고, 투수마다 사인이 다른 경우도 있다”면서 “기본적으로 이것이 들켜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물증을 잡기 어렵기 때문에 일단 뺏기지 않는 것이 최선”, “서로 오픈된 상황에서 사인을 잘 숨기는 것도 능력”, “일반적 주자의 사인 훔치기는 선수 능력”, “야구는 사인을 훔치는 스포츠다. 당하는 팀에 문제가 있다”, “플레이 과정에서 사인을 훔쳤다면 어느 쪽에도 잘못은 없다. 서로가 노력한 것”, “코치가 눈으로 훔치는 것은 야구라는 경기의 플레이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이처럼 지금껏 있었던 ‘그라운드 내 의혹’ 정도의 수준이라면 그것도 팀과 팀의 대결이라는 의견이 상당수였다. 현역 감독 U는 “당장 작년만 해도 상대가 사인을 훔쳤다는 의심이 들 때가 몇 차례 있었다. 몇몇 팀들은 소문이 쫙 나기도 했다”면서 “거기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당하는 것이다. 팀마다 모두 그런 대비는 하고 있다”면서 여전히 지금도 사인을 둘러싼 신경전이 계속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스포티비뉴스=김태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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