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박대현 기자 / 김효은 영상 기자] '블랙 맘바' 코비 브라이언트(41)가 떠났다. 불의의 헬기 추락사고로 41년 짧은 생을 마감했다.

전 세계 농구 팬들이 충격에 빠진 가운데 추모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과연 코비는 어떤 인물이고, 얼마나 큰 업적을 남긴 선수길래 이렇게 많은 이가 애도를 표하는 걸까.

코비를 떠나보내며, 그가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두 편으로 나눴다.

◆코비의 끝모를 진화…비결은 ‘小계획’

열망이 컸다. 코비에게 목표는 오직 하나.

'세계에서 가장 농구를 잘하고 싶다.'

바람이 구체적이었다. 방법도 그랬다. 땀이 스몄다. 코비에게 목표는 꿈이라기보다 과학으로 구축된 계획표에 가까웠다.

동료 인터뷰에서 드러난다. 코비는 상황을 잘게 쪼갰다. 그리고 연습했다.

“한 번은 경기가 끝난 뒤 코비가 어시스턴트 코치를 불렀다. 코치에게 자기 팔을 계속 치게 했다. 그런 상황에서 슛 연습을 이어 갔다. 파울을 당했을 때도 야투율을 높이기 위한 코비만의 훈련법이었다. 그는 숙제가 생기면 어떤 연습을 해야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늘 고민했다.” - 커트 램비스 전 LA 레이커스 감독

“코비가 왼손으로 점프슛을 던지는 걸 (자주) 봤다. 왼손 돌파가 아니라 '왼손으로' 슛을 시도한 거다. 정말 깜짝 놀랐다. 난관을 마주할 때마다 그는 창의적인 해법을 내놨다. 마치 아인슈타인처럼.” - 메타 월드피스

코비는 지독한 연습벌레로 유명하다. 날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1,500개 슛을 던졌다.

코트를 다섯 점(點)으로 나눠 200개씩. 성공한 개수만 카운트했다. 이 밖에도 다양한 상황 변수를 상정했다. 이 과정을 20년 넘게 반복했다.

득점왕에 오르고 정규 시즌 MVP에 선정된 뒤에도 그랬다.

양만 고려한 게 아니다. 엄청난 연습량 뒤에는 세밀한 과학 원리가 반영돼 있었다. 체육학과 의학, 심리학을 넘나들었다.

2014년 11월. 코비는 중국 유소년 선수를 대상으로 농구 캠프를 열었다. 이때 그가 강조한 부문이 있다. 단계별 목표였다.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그것도 단계별로 최대한 세분화해서. 이 작업이 중요하다. 목표를 잘게 나누면 성과를 얻기 수월해진다. 내가 프로 데뷔 뒤 처음 아킬레스건을 다쳤을 때, 일단 다시 걸어야겠다는 첫 번째 목표를 세웠다."

"혼자 걸을 수 있게 되면 그 다음엔 뭘까. 뛰는 거다. 러닝이 가능해지면 그때 재활 과정에 들어가야겠다고 맘먹었다. 사이드스텝을 밟을 수 있을 때 슛 연습을 시작하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모든 일은 단계별로 이뤄진다. 계단을 밟고 오르면서 문에 이르는 거다. 이러한 방식을 잘 유지했던 게 지금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라 믿는다."

바라지 않고 계획한다. 낙담할 시간에 작은 계획을 딱딱 세운다. 코비가 강조한 재기 비결이다.

모든 체육인이 그렇다.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린다. 코비도 그랬다. 그럴 때마다 그는 ‘농구의 신’을 탓하지 않았다. 상황을 면밀히 살피고 작은 계획을 세웠다. 나쁜 상황에서도 계획을 통해 배움을 얻었다.

그래서 코비는, 부상을 ‘환상적인 기회’라고 말했다.

경기 전이 더 바빴다. 코비는 누구보다 몸 풀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실제 그는, 리그에서 가장 세분화된 ‘루틴’을 지닌 선수였다.

보통 오후 1~3시에 낮잠을 잤다. 82경기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선 낮잠을 꼬박 챙기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쳤다. 경기 시작 4시간 전부턴 분 단위로 훈련 루틴을 짰다.

첫 단계는 하체 스트레칭. 근력 밴드로 발, 발가락, 아킬레스건, 무릎 등 부상 잦았던 부위를 충분히 풀었다.

경기장 도착해선 20년 동안 구단 물리치료를 맡은 베테랑 주디 세토에게 몸을 맡겼다. 세토 관리 아래 슛 훈련을 시작했다. 훈련 시간은 10~15분.

슈팅 드릴이 끝난 뒤엔 어깨, 등, 하체 컨디션과 관련해 얘길 나눴다. 90분 전에는 약 20분간 하체 마사지를 받았다.

이후에도 엉덩이 스트레칭, 무릎 아이싱, 사이드스텝 드릴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동원되는 레이커스 소속 직원만 6~8명에 달했다.

분야마다 전문가를 대동했다. 꼼꼼하게 자기 관리에 임했다. 코비에게 훈련은 양을 채우는 시간이 아니었다. 과학을 빌린 수련이었다. 향상심을 현실로 구현해낸 작업이었다.

◆쏟아지는 비난들…"그저 묵묵히"

어느 분야든 ‘오리지널’은 외롭다. 또 괴롭다. 당대 격렬한 비판에 시달린다. 농구도 예외는 아니다.

그럼에도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은 꺾이지 않는다. 신념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만 묵묵히 걷는다.

크기와 방향을 모두 지닌 벡터처럼 스스로 목표한 존재가 되기 위해 뚜벅뚜벅 걷는 데에만 집중한다.

코비 역시 마찬가지. 그는 누구보다 비판 힐난에 익숙했다. 199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3순위로 샬럿 호네츠에 지명됐을 때부터 그랬다.

당시 전체 17순위로 저메인 오닐이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 부름을 받았다. 대학을 거치지 않은 고졸 선수가 1라운드에 두 명이나 지명되긴 처음이었다. 많은 전문가가 우려했다.

대학에서 기본기를 충분히 닦지 않고 NBA 코트에 적응할 수 있겠냐는 시선이었다.

특히 코비는 6년간 레이커스 주전 센터로 활약했던 블라디 디박과 맞트레이드돼 입단한 상황. 검증되지 않은 고졸 가드가 베테랑 빅맨을 매물로 골드 앤드 퍼플 유니폼을 입어 걱정, 반감을 갖는 팬이 적잖았다.

데뷔 첫해 코비는 71경기에 나서 평균 7.6득점 1.9리바운드 1.3어시스트 0.7가로채기 3점슛 성공률 37.5%를 기록했다. 평균 출전 시간이 15분 30초인 점을 고려하면 나쁘지 않은 생산성.

시즌 종료 뒤 올-루키 세컨드 팀에도 이름을 올렸다. 델 해리스 감독의 철저한 관리 아래 성공적인 연착륙을 이뤘다.

하나 플레이오프(PO)에서 암초를 만났다. 1997년 5월 12일 유타 재즈와 PO 2라운드 5차전.

코비는 에디 존스 백업 슈팅가드로 코트를 밟아 11점을 올렸다. 그러나 이 경기서 역사적인 ‘에어볼 4개’를 쏘아 올렸다.

시리즈 스코어 1승 3패로 벼랑 끝에 몰렸던 레이커스는 결국 이날 93-98로 무릎을 꿇었다. 4쿼터 종료 11초 전부터 연장까지 이어진 코비 에어쇼는 팬들 거센 비판을 불렀다.

예나 지금이나 언론은 매서웠다. 18살 가드에게 아량을 베풀지 않았다.

모제스 말론, 숀 켐프, 케빈 가넷 등 그간 고졸 스타로 불렸던 선수들이 모두 빅맨 포지션임을 들먹였다. 하드웨어가 빼어난 고졸 빅맨 유망주라면 모를까. 고졸 가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며 비판 날을 세웠다.

닉 밴 엑셀, 존스, 데릭 피셔, 로버트 오리가 머뭇거리는 사이 과감하게 위닝샷을 노렸던 18살 신인은 그렇게 혹독한 첫 봄나들이를 했다.

코비 농구인생은 '영욕의 20년사(史)'로 정리할 수 있다. 마냥 영예만 누리지 않았다. 그 못지않게 고통스러운 기억이 많았다.

에어볼 4개가 고난 시작을 알렸다면 두 번째는 샤킬 오닐과 주도권 다툼이었다. 코비는 당돌했다. 당대 최고 센터로 각광받던 오닐보다 더 많은 공격 기회와 볼 소유를 원했다.

자신을 중심으로 팀 공격이 이뤄지길 바랐다. 대중은 냉철했다. 칼날이 대부분 오닐이 아닌 코비에게 향했다.

코비는 1996년 11월 3일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전성기는 2000년대로 볼 수 있다. 현대에 뿌리내린 스몰볼, 모리볼 개념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시기였다.

데니스 스캇, 델 커리, 팀 레글러, 데일 엘리스 등 당시 리그를 주름잡던 최고 3점슈터들은 팀 중심이 아니었다. 소속 팀에서 3~4옵션을 맡으면서 팀 승리에 묵묵히 이바지하는 배역이었다. 지금과는 달랐다. 기본적으로 빅맨 포지션이 강한 팀'만이' 대권에 도전할 수 있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레지 밀러와 하킴 올라주원 중 누가 우승 반지를 끼었는가. 새크라멘토 킹스가 만년 약체에서 강호로 올라선 시기는 슈팅가드 미치 리치먼드를 보내고 파워포워드 크리스 웨버를 받아들였을 때부터였다. 인기와 성적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했던 ‘Run TMC' 사례도 떠올려보라. 결국 농구는 높이 싸움이다."

센터 중심 로스터, 빅맨 선호는 당시 NBA 헤게모니였다.

2010년대 들어 스테픈 커리, 모리볼 등이 출현해 리그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특히 3점슛 위상이 몰라보게 높아졌다.

하나 2000년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4, 5번을 중심으로 한 게임 플랜이 지배적이었다.

실제 1977년부터 2007년까지 30년 동안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뽑힌 선수를 보면 빅맨이 26명에 달한다. 가드는 단 2명이었다(1979년 매직 존슨, 1996년 알렌 아이버슨).

지배 이데올로기. 빅맨 선호는 세계 농구계를 오래도록 장악한 흐름이었다. 코비 데뷔 초기엔 더했다. 지금이야 센터까지 외곽 라인 바깥으로 나와 3점을 던지는 시대지만 당시엔 그렇지 않았다.

"농구는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하는 것"이란 말 이면에는 그만큼 키 큰 선수를 선호하는 리그 역사가 녹아 있다.

물론 성적도 좋았다. 1946년 첫발을 뗀 NBA 역사를 살피면 쉬이 알 수 있다. 왕조로 군림한 구단에는 늘 명센터가 함께했다.

코비 데뷔 전후도 비슷했다. 코비가 10대, 20대를 보낼 때 리그를 호령한 팀만 봐도 알 수 있다.

2연속 우승으로 조던 공백기를 가장 성공적으로 보낸 휴스턴 로키츠엔 하킴 올라주원이 있었다. ‘쇼타임 레이커스’에는 카림 압둘-자바가 자리했다.

보스턴 셀틱스에도 로버트 패리시와 케빈 맥해일이 꾸준히 올스타급 생산성을 보였다. 샌안토니오 스퍼스 역시 데이비드 로빈슨과 함께한 14년 동안 미드웨스트 디비전 1위를 8번이나 차지했다.

1995년 팻 라일리가 마이애미 히트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가장 먼저 시도한 일이 스몰포워드 글렌 라이스를 샬럿 센터 알론조 모닝과 맞바꾼 일이었다. 팀 무게중심을 센터로 옮겨놓는 일부터 서둘렀다.

라일리 감독은 “단단한 센터 없이 강호로 올라서는 건 어불성설이다. 백코트 중심을 잡는 일은 팀 하더웨이만으로 충분하다”며 모닝 영입 배경을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닐을 향해 반기를 든 코비 행동은 시대 조류를 거스르는 철부지 행동으로 읽혔다. 아직 뭘 모르는 젊은 선수 치기로 여겨졌다.

당대 최고 센터 오닐보다 더 큰 입지와 스포트라이트, 승부처 볼 소유를 원했던 코비는 그저 자기밖에 모르는, 팀워크를 저해하는 가드로 해석됐다.

코비가 데뷔 첫 평균 20점대 공격수로 올라선 1999-2000시즌. 이때부터 둘 대립 구도가 본격화됐다.

갈등은 이듬해 정점을 찍었다. 2000-2001시즌. 오닐 코비는 1년 내내 으르렁거렸다.

희망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2001년 PO에선 '전략적 휴전'을 맺었다. 파죽의 11연승을 챙겼다. 공존 실마리를 찾는 듯했다. 

레이커스는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와 파이널 1차전에서 일격을 당했지만, 이후 4연승을 거두며 2연패에 성공했다. 역대 가장 압도적인 PO 시즌을 보내며 우승했다.

그러나 이는 미봉책이었다. 시카고 감독 시절 악동 데니스 로드맨을 콘트롤하고, 토니 쿠코치-스코티 피펜 기 싸움도 진정시켰던 ‘젠(禪) 마스터' 필 잭슨 감독도 두 손 들었다.

2004년 파이널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 완패한 레이커스는 결국 오닐을 마이애미로 보내며 둘 사이 불화를 일단락 지었다.

코비는 오닐이 떠난 뒤 부동의 1옵션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팀은 대권과 멀어졌다. 개인 기록은 리그 최정상급으로 올라갔으나 팀은 PO 진출도 버거울 만큼 전력이 떨어졌다.

언론은 오닐과 공존에 실패한 코비를 향해 "명가 몰락 원흉"이라며 쏘아붙였다. 이때부터 코비를 향한 호불호가 극적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미국 지역 방송 '컴캐스트스포츠넷'은 "코비는 리더가 될 수 없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팬들은 오닐이 남아 있었다면 더 많은 우승 반지를 획득했을 거라며 수군댔다.

코비 이적설이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한 때도 바로 이즈음. 

2007년 10월 ESPN과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는 "시카고 불스, 휴스턴, 댈러스 매버릭스, 뉴욕 닉스 등이 코비에 큰 관심을 보였다. 실제 몇몇 팀은 구체적인 트레이드 카드까지 거론했다. 한창 전성기 기량을 갖춘 아이버슨, 케빈 가넷도 프랜차이즈를 떠났다. 코비도 (프랜차이즈 스타가 점점 사라지는) 트렌드에 동참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데뷔 초 조던 따라잡기에 급급한 애송이 2번이라는 여론, 오닐과 영역 다툼, 2003년 성 스캔들, 2012년 드와이트 하워드와 2차 주도권 전쟁, 타이밍을 놓친 레이커스 세대교체 등 코비는 커리어 내내 비판 중심에 섰다. 안티 팬이 가장 많은 스포츠 스타를 꼽을 때도 늘 상위권을 다퉜다.

2016년 4월 코비는 '농구에게(Dear Basketball)'라는 은퇴 편지를 남겼다. 이때 ESPN은 “이기적인 성향, 성추문 논란 등으로 이미지가 추락했던 코비가 진정성 있는 편지 한 장으로 안티 팬들 마음을 훔쳤다”고 표현했다. 그만큼 코비는 인기와 질타를 동시에 받는 대표적인 선수였다.

앞서 월드피스가 말했다. "코비는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창의적인 해법을 내놓는 아인슈타인"이라고.

코비는 도망가지 않았다. 돌파구를 '또' 마련했다. 내적 성숙과 연습으로 대중 시선과 맞섰다.

다음은 6년 전 가을 중국에서 유소년 캠프를 열었을 때 인터뷰. 

"많은 이가 물어본다. 어떡해야 우승을 그렇게 많이 할 수 있냐고. 간단하다. (어느 순간부터) 팬과 언론이 정한 성공 기준에 얽매이지 않았다. 성공은 남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마음을 잘 유지했기 때문에 우승 반지 5개를 손에 낄 수 있었다."

다음은 2015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이뤄진 공식 은퇴 기자회견. 

"언제부턴가 유니폼을 벗은 뒤 내가 (NBA) 역사에서 어떤 위치에 서게 될지 깊게 고려하지 않게 됐다. 논쟁할 가치가 적다고 생각한다. 내가 믿는 가장 중요한 지점은 20년간 보여 준 '코비 브라이언트 플레이'가 현 세대 또는 다음 세대, 혹은 농구인을 꿈꾸는 이들에게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여부다."

"내 다음 세대가 그 다음 세대로, 그 다음 세대가 또 자신의 뒷세대로 좋은 영향을 이어 가는 게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연감 속 어느 랭킹에 속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바뀌었다."

1옵션을 향한 집착. 아니면 난사.

선수생활 말기 불편한 이미지가 코비에게 잔상처럼 붙었다. 이 이미지 또한 코비의 일부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분명하다. 농구를 향한 진정성. 끊임없는 성장에의 욕망. 불혹을 앞둔 나이에도 여전히 청년처럼 채찍질하는 선수.

난사와 성장욕은 다르지 않다. 결이 같다. 동전 양면이다. 적어도 대중은, 코비가 은퇴 직전까지 스코어러·디펜더로서 온힘을 쏟아부었다는 걸 안다. 영원한 농구 청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코비는 NBA 통산 6,306어시스트를 쌓았다. 역대 NBA 선수 가운데 32,000점과 6,000어시스트를 동시에 넘긴 선수는 코비와 르브론 제임스밖에 없다.

숫자가 모든 걸 말하진 않는다. 하지만 나름의 방향은 가리키고 있다. 코비는 세상 질타에 굴하지 않았다. 되레 더 농구에 정진함으로써 업을 이뤄냈다.

현재 위치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소목표’를 창조하며 거인 발자국을 찍었다. 이제 코비는 조던과 함께 역대 가장 위대한 스코어링 가드로 꼽힌다. 이견이 적다.

이미 선수 시절부터, 유니폼을 벗은 뒤에도. 비교 목록에 ‘농구 역사상 가장 완벽한 선수’가 기입돼 있는 선수. 그가 바로 코비다.

스포티비뉴스=박대현 기자 / 김효은 영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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