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2020 시즌 ISU 피겨스케이팅 4대륙선수권대회 여자 싱글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유영 ⓒ 연합뉴스 제공

[스포티비뉴스=목동, 조영준 기자] 재능이 넘치고 장래가 찬란하게 보이는 유망주에게는 '제2의 누구’라 불리게 됩니다. 체육계의 경우 해당 종목의 전설적인 선수가 '누구'가 되곤 합니다.

한국 피겨스케이팅 유망주는 오랫동안 '제2의 김연아' 혹은 '포스트 김연아'라고 불려졌습니다. 피겨스케이팅의 불모지에서 김연아(30) 같은 선수가 나온 점은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죠. 김연아의 선수 생활은 드라마틱했습니다. 한국 스포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그의 업적과 위상은 후배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가 한국 피겨스케이팅 역사에 남긴 발자취가 매우 컸기에 '포스트 김연아'라는 명칭은 오랫동안 쓰였습니다. 한국 여자 피겨스케이팅의 간판 유영(16, 수리고 입학 예정)도 김연아의 영향으로 피겨스케이팅의 길을 선택했죠.

2016년 1월 열린 전국 남녀피겨스케이팅 종합선수권대회에서 유영은 만 11살의 나이에 우승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임은수(17, 신현고)는 3위, 김예림(17, 수리고)은 4위에 오르며 본격적인 '포스트 김연아 경쟁'이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현재 엎치락뒤치락했던 이들의 경쟁은 '유영의 압도적 우위'로 이어졌습니다.

주니어 시절 유영의 성장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는 2017년부터 지난해 초까지 주니어 무대에서 2년간 활동했습니다.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주니어 그랑프리 대회에 4번 출전했지만 시상대에 오른 것은 한 번(2018년 주니어 그랑프리 슬로바키아 대회)뿐이었죠. 주니어 세계선수권대회도 두 번(2018, 2019) 도전했지만 9위와 6위에 머물렀습니다.

▲ 2017년 1월 강릉 아이스아레나에서 열린 전국남녀피겨스케이팅 종합선수권대회에서 경기를 펼치고 있는 유영 ⓒ 곽혜미 기자

유영은 2016년부터 트리플 악셀과 쿼드러플 살코를 연습했습니다. 그러나 부상과 눈앞에 닥친 대회 준비로 고난도 점프를 제대로 연습할 시간이 부족했죠. 지난해 새로운 지도자인 하마다 미에(60, 일본)를 만나면서 유영 안에 잠재된 재능은 눈뜨기 시작했습니다. 하마다 코치의 격려로 유영은 트리플 악셀 연습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유영은 "지난해 훈련 시간 중 절반은 트리플 악셀을 연습했다"고 밝혔습니다.

올 시즌 유영은 쇼트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에 트리플 악셀을 모두 넣었습니다. 유영은 국제 대회에서 러시아 선수들을 보고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제는 여자 싱글에서도 쿼드러플(4회전) 점프나 트리플 악셀 같은 고난도 점프가 없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라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과감한 도전 정신은 결국 유영의 양쪽 어깨에 날개를 달았습니다. 트리플 악셀 연습은 매우 힘듭니다. 유영은 만만치 않은 과정을 이겨내며 마침내 이 기술을 정복했죠.

유영은 8일 서울 목동 아이스링크에서 열린 2019~2020 시즌 ISU 4대륙피겨스케이팅선수권대회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트리플 악셀을 깨끗하게 뛰었습니다. 이번 대회 쇼트프로그램에서도 유영은 트리플 악셀을 시도했지만 두 발 착지하면서 아쉽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유영은 발목 부상을 안고 이번 대회에 출전했습니다. 연습하던 도중 오른 발목에 무리가 왔고 이런 부담 때문에 트리플 악셀을 힘들어했습니다. 이번 대회에서 유영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들 가운데 한 명은 이수경 대한빙상경기연맹 피겨스케이팅 이사입니다. 이번 대회 한국 팀의 팀 리더로 선수들을 이끈 이 이사는 쇼트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에서 한국 선수들과 함께 자리해 점수를 지켜봤습니다.

▲ 2019~2020 시즌 ISU 피겨스케이팅 4대륙선수권대회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 경기를 마친 뒤 점수를 보고 환호하는 유영(가운데)과 이수경 대한빙상경기연맹 피겨스케이팅 이사(왼쪽) ⓒ 연합뉴스 제공

이 이사는 "트리플 악셀은 최근 도전하는 선수들이 많지만 쉬운 점프가 아니다. 부상 위험도 크고 많은 선수가 어려워한다. 또한 다른 점프에도 나쁜 영향을 주면 안 된다. 유영은 발목 상태가 좋지 않은데 보강 운동으로 잘 이겨내더라. 웜업 때도 빙판에 넘어져 걱정이 많았는데 정말 정신력이 강했다"라며 유영을 칭찬했습니다.

유영은 "쇼트프로그램이 끝난 뒤 치료도 받고 몸 상태를 관리하면서 트리플 악셀을 뛰니까 많이 회복했다. 트리플 악셀(성공률)이 왔다 갔다 했는데 경기 때 성공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대회 기간 유영의 트리플 악셀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쇼트프로그램에서 실수한 것은 물론 훈련과 웜업 때도 빙판에 넘어질 때가 있었죠. 수많은 국내 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영이 받은 압박감은 대단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유영은 강한 정신력으로 이를 이겨내며 개인 최고 점수인 223.23점을 받았습니다.

세계 상위권 피겨스케이팅 선수에게 필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강한 정신력과 실전에서 강한 집중력'입니다. 주니어 시절 쉽게 멘탈이 흔들렸던 유영은 올 시즌 시니어 무대에 진출하며 한층 성숙해졌습니다. 그는 아직 자신의 트리플 악셀 성공률이 55%라며 냉정하게 평가했습니다. 트리플 악셀을 더블 악셀처럼 뛰고 싶다는 그의 소망은 다음 시즌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여겨집니다.

▲ 유영이 ISU 4대륙선수권대회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경기를 펼치고 있다. ⓒ 곽혜미 기자

올 시즌 유영의 성공 요인 가운데 하나는 '도전'이었습니다. 현재 하는 기술에 만족하지 않고 과감하게 고난도 점프에 도전한 도전 정신은 4대륙선수권대회 은메달로 열매를 맺었죠. 유영은 이번 대회 개인 최고 점수를 갈아치우며 선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대회 프리스케이팅에서도 '옥에 티'는 분명 존재했습니다.

프리스케이팅에서 유영은 스텝 시퀀스에서 레벨2에 그쳤습니다. 이 부분에서 조금은 집중력이 흔들린 듯 유연한 스텝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쇼트프로그램에서 유영은 트리플 플립에서 스케이트 에지가 모호하다는 어텐션(!로 표기) 판정을 받았죠. 프리스케이팅에서도 유영의 트리플 플립은 회전 수 부족으로 언더 로테이티드(Under rotated : 90도 이상 180도 이하로 점프 회전수 부족) 지적이 내려졌습니다.

이번 대회 여자 싱글 우승을 차지한 키히라 리카(18, 일본)는 트리플 악셀에서만 장점을 보이는 선수가 아닙니다. 그의 또 다른 저력은 비 점프 요소입니다. 키히라는 올 시즌 출전한 대부분의 대회에서 스텝 시퀀스 레벨4를 받았습니다. 스핀에서도 그는 좀처럼 레벨4를 놓치지 않습니다.

유영도 비 점프 요소가 약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스핀에서 좀처럼 레벨4를 놓치지 않습니다. 새로운 점프 완성과 더불어 비 점프 요소도 업그레이드된다면 김연아처럼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 ISU 4대륙선수권대회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을 마친 유영(오른쪽)이 지도자인 하마다 미에 코치(왼쪽)와 포옹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제공

유영은 다음 시즌 연습 결과에 따라 쿼드러플(4회전) 점프를 들고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유영이 새로운 쿼드러플 점프를 장착하거나 트리플 악셀의 성공률을 높이고 여기에 후속 점프까지 붙인다면 러시아 선수들과 비교해 경쟁력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어느덧 유영은 '포스트 김연아'로 불리던 유망주 시절을 벗어나 시니어 무대 상위권에서 경쟁하는 선수가 됐습니다. 이쯤 되면 온전하게 '제2의 누구'가 아닌 유영이라는 이름 두 글자로 불리는 것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난달 유영은 인천국제공항에서 열린 유스 동계 올림픽 선수단 환영식에서 '제2의 김연아'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 질문에 그는 "그렇게 불린다는 점은 영광스럽다"라며 김연아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냈습니다.

유영은 국내에서 열린 ISU 챔피언십 대회에서 김연아 이후 두 번째로 태극기 세리머니를 한 선수이기도 합니다. 시상식이 끝난 뒤 태극기 세리머니를 하던 그는 빙판에 넘어졌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유영은 "다치지 않았지만, 정말 당황스러웠다. 빙판에 깔린 카펫을 못 봐서 넘어졌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다"라며 활짝 웃었습니다.

유영의 4대륙선수권대회 은메달 획득으로 한국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은 '시즌 2' 서장을 열었습니다. 유망주 세 명이 펼친 포스트 김연아 경쟁은 유영의 독주로 종착지에 다다랐죠. 유영은 어느덧 일본의 에이스 키히라의 경쟁자 가운데 한 명이 됐습니다. 또한 다음 달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세계 상위권을 점령하고 있는 러시아 선수들에게 도전합니다.

▲ 2019~2020 시즌 ISU 피겨스케이팅 4대륙선수권대회 여자 싱글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유영이 태극기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제공

김예림과 임은수도 이번 대회에서 모두 200점을 넘으며 선전했습니다. 여기에 이해인(15, 한강중)이라는 새로운 다크호스가 등장해 한국 여자 피겨스케이팅 구도는 새롭게 잡혔습니다.

이번 대회를 마친 유영은 국내에서 짧게 한숨을 돌린 뒤 오는 18일 개막하는 제101회 전국 동계체전에 출전합니다. 이 대회가 끝나면 지도자 하마다가 있는 일본으로 출국합니다.

스포티비뉴스=목동, 조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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