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냥의 시간'의 이제훈. 제공|넷플릭스
[스포티비뉴스=김현록 기자]지금으로부터 9년 전 '파수꾼'(감독 윤성현)이라는 영화가 세상에 나왔다. 이제훈(36)이라는 배우도 '파수꾼'과 함께 세상에 알려졌다. 어느덧 이제훈이 주연을 맡은 영화·드라마만 십 수 편에 강렬한 작품도 여럿이지만, 가끔 생각난다. 다음 표정을 예측할 수 없던 하얀 얼굴의 위태로운 소년이. 돌아선 친구를 향해 "너까지 나한테 이러면 안돼"라며 무너지던 그 애 이름은 기태였다.

9년이 흘러 이제훈은 '파수꾼'의 감독과 다시 만났다. 지난달 우여곡절 끝에 넷플릭스에서 단독 공개된 영화 '사냥의 시간'(감독 윤성현)은 젊은 세대에게 지옥이라 불리는 이 땅의 불안을 스크린에 펼쳐놓은 독특한 추격 액션물이다. 이제훈은 탈출을 갈망하는 청춘 준석을 연기했다. 준석은 대범하게도 친구들과 무장까지 하고 도박장을 털지만, 이내 무시무시한 킬러에게 쫓긴다. 이제훈은 점점 더해가는 극한의 긴장과 공포를 땀이 줄줄 흐르는 얼굴로 그려내며 134분의 추격전을 끌고간다. 

근미래, 총격액션, 서스펜스, 넷플릭스와 베를린국제영화제… 하지만 이제훈에게는 윤성현 감독과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는 고백했다. '이 사람이라면 나는 나를 다 던지고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는 마음이었다고. 긴 기다림과 까다로운 촬영과 집요한 후반작업을 견뎌내고 '사냥의 시간'을 세상에 내보인 이제훈은 "나는 역시 틀리지 않았다"며 웃었다.

▲ '사냥의 시간'의 이제훈. 제공|넷플릭스
※다음 인터뷰에는 영화 '사냥의 시간'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넷플릭스를 통해 세계 190개국에 '사냥의 시간'이 공개됐다. 공개된 뒤 예상 밖의 반응도 있던가.

"액면 그대로 직선적으로 생각을 하다가 영화 다 찍고 마지막 장면을 찍을 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일 때. 나는 도망갈 것인가, 다시 마주하고 맞서 싸울 것인가. 개인적으로 느낀 메시지였는데, 그런 요소까지 해석해주시는 게 좋았다. 시나리오를 보면서는 느끼지 못하다 막판에 느낀 것을 완성된 영화를 보고 느껴주셔서. 영화든 드라마든 국내 반응만 들었는데, 해외 반응이 여기저기서 쏟아져나오니까 보고 즐기고 있다. 영화를 보는 시각이 다양한데, 전세계의 이야기를 들으니 더 신기하다."

-단순히 '파수꾼'을 함께 한 윤성현 감독과의 친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왜, 어떻게 녹록찮은 과정을 거치면서까지 '사냥의 시간'에 출연했나.

"'파수꾼'을 하면서 이 사람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와 자세, 시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파수꾼'도 열악한 환경이었는데 잠 안 자 가면서 서로 모든 걸 다 갈아넣어서 만들었던 순간이 이후 하는 작품에서도 엄청난 뿌리가 돼줬다고 저는 생각한다. 그만큼 배우 인생에서 절때 빠뜨릴 수 없는 뿌리를 내려준 사람이다. 무엇이 됐든 함께하면 좋을 것 같았고 성장할 기회라고 여겼다. 보통 시나리오와 감독, 여러 상황을 고려하면서 작품을 하게 된다. 그런 걸 차치하고 '이 사람이라면 나는 나를 다 던지고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 하며 하게 됐다.

녹록치는 않았다. 중간에 프리프러덕션이 중단되기도 하고 촬영도 길어지고 준석을 연기하는 데 굉장히 힘들었다. 후반작업도 CG가 많고, 사운드가 중요하다보니까 후시녹음을 20번 이상, 30번은 한 것 같다. 그런 영화는 없다. 그만큼 사운드에 공을 들였다. 배우 숨소리 이런 것까지도 하나하나 디테일하게 채웠다. 보여주고 싶은 세계관을 채워가는 윤성현 감독을 보면서 '영화에 대한 집념이 어마어마한 사람이구나. 내가 이 사람과 했다는 데 있어서, 나는 역시 틀리지 않았다'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사람은 발전하고 다른 영역에서 발전할 수 있는 세계가 펼쳐진다고 생각한다. '사냥의 시간'을 통해서 윤성현 감독이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한국영화에 미스터리 스릴러가 많지 않았는데 그 점도 대견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

▲ '사냥의 시간'의 이제훈. 제공|넷플릭스
-감독은 '파수꾼'보다 10배 힘들었다던데.

"10배 힘들었다고 하나? 저는 곱하기2 하겠다. 20배는 힘들었던 것 같다. 그때는 기태라는 인물을 연기하면서 '이게 맞느건가'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내가 느끼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 판단하는 역량이 부족했다. 그래서 감독님이 저에게 디렉션을 잘 주면서 다듬었을 것이다. 이번엔 누군가에게 쫓겨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을 연기하는데,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한(박해수)이 지하주차장에서 눈앞에 총을 갖다대고 했을 때 저는 그 총 안에 총알이 있고 발사되면 나는 죽는다는 생각을 계속 하면서 연기했다. 계산과 계획을 따로 하지는 않았다. 막바지 분노에 절규하며 총을 쏠 때도 제가 그렇게 쏘게 될지 몰랐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눈 앞에서 죽는다면? 장호(안재홍)가 그렇게 연기를 해줬고, 모든 과정에서 경험하고 체험했다. 그것이 켜켜이 쌓여서 준석이가 만들어졌다."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주고받으며 만들어간 부분도 있나.

밑바닥 이생 아이들이라 아무 신경 쓰지 않는 편안하고 자유로운 스트리트 패션인데, 그렇게 입어보고 싶었다. 타투도 많이 했는데, 저는 어머니와 꿈꾼 하와이를 연상시키는 야자수 나무 타투를 팔에 하면 좋겠다 해서 그렇게 했다. 장호에게 샷건 쏘는 방법을 알려주는 장면에서는 장호가 군대에 안 갔다왔으니 모르는 설정이라 애드리브를 했다. '파수꾼' 때 생각을 하게 됐다. 대본에 있지 않아도 아이들과 편안하게 툭툭 나오는 대사들이 있다. 초반 클럽에서 낄낄대는 것도 대본에 없이 저희들끼리 떠드는 이야기가 녹아 있다. 그러니 디테일한 설명 없어도 관계가 확 느껴지는 게 아닐까. 쫓기는 부분에서는 감독이 오케이를 해도 '한 번만 더' 이러기도 했다. 내가 죽을 것 같은 상상이 안되고, 됐다 해도 저를 한계에 몰아붙이고 싶었다. 그래서 너무 힘들었다. 이렇게 더는 못할 것 같다."

▲ 영화 '사냥의 시간'. 제공|넷플릭스
-스스로 '파수꾼'과 비교하면 어떤 변화가 느껴졌나.

"그때 저는 단편영화를 찍다가 단편영화 주인공 하는 게 처음이었다. '연기를 잘해야겠다, 그 인물처럼 내가 살아야겠다'는 데만 집중했다. 기태라는 인물만 생각하고, 경주마가 달릴 때 앞으로만 달릴 수 있게 시야를 가리는 것처럼.

이후에는 많은 작품을 하면서 무게감, 책임감을 가지고 임하다보니 함께하는 동료, 스태프와 잘 어우러져서 으쌰으쌰 분위기를 만드는 분위기메이커가 돼야 하지 않을까, 연기를 잘하는 것뿐 아니라 그런 것까지 해야 좋지 않을까 하며 여러 작품을 했던 것 같다. 계속 현장에 있으면서 잘 융화될 수 있게 귀를 열게된 것 같다. 윤성현 감독과는 특별히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만 봐도 안다. 이 사람이 이 장면에 만족하는지."

-9년 만에 만난 감독은 어떻던가.

"'파수꾼' 이후 9년 만이고, 독립영화 하다가 상업영화를 하는 것이지 않나. 녹록치 않고 버거웠을 텐데 생각하고 계획한 걸 끝까지 집요하게 만들어내는 모습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구나 했다. 이 사람은 영화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가 할 정도로 한 장면 한 장면에 에너지와 열정을 집중하고 쏟아낸다. 그러니 제가 연기를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두번째 작품이 9년 만에 나왔는데 다음에는 그렇게 오래 안 걸리면 좋겠다. 2~3년에 하나 정도? 더 많은 작품으로 많은 사람을 즐겁게 또 곱씹게 만들어줄 감독이라고 생각했다."

▲ '사냥의 시간'의 이제훈. 제공|넷플릭스
-바에서 한을 보고 식은땀 흘리는 장면은 셔츠를 여러번 갈아입었겠다 싶을 정도였다. 어떤 감정으로 찍었나.

"일차원적 경험으로 보면, 어려서 학교가다가 '너 이리로 와봐' 이런 소리 들을 때 심장이 '쿵' 하는 것 아시나. 그런 경험이 좀 있다. 우윳값인가, 노란 봉투에 넣어 달랑달랑 들고 학교 가는데 누가 와보라고 하는 거다. 뺐기면 어머니에게 혼날 것 같아 냅다 뛰는데 심장이 그렇게 뛰더라. 하교하는 데 그 사람 이있을 것 같아서 나갈 수가 없었다.

바 신은 느낌이 확 왔다. '나는 그냥 망했다.'(웃음) 하체에 전율이 있다가 확 빠지는, 그런 경험이 있었던 것 같다. 내 스스로 콘트롤하지 못하는 상황을 매번 상상했다. '나는 지금 회생불가', '한 발만 내딛으면 낭떠러지에서 바로 굴러 떨어진다', '수영을 못하는데 물에 빠지는 기억' 등을 떠올렸다. 뭔가를 어떻게 연기할지는 매번 계획하지 못했다. 저도 그렇게 하면서 이게 맞나 판단이 안되더라. '다시는 하고싶지 않다. 제발 그만' 하면서 '계속 더해 더해' 이게 사이클처럼 반복됐다.

-극중 박정민을 두드려패는 장면이 있다. '파수꾼' 생각이 안 날 수가 없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 아니야, 이거 이런거 있었던 것 같은데' 했다.(웃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오버랩되는 게 있었다. 하지만 피하고자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파수꾼'을 보신 분들은 연상을 하실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또래 배우들과 연기하며 '왜 이렇게 안하지' 하는 생각도 했다. 똘똘 뭉쳐 시너지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 또 나왔으면 좋겠다. 간절히 바란다. 기회가 있다면 동년배들과 함께 할 기회를 꿈꾸고 찾고 같이 만들어갈 거다. 한 번 통하면 현장에 오는 게 행복해진다. 일을 하거나 '나 연기한다'가 아니라 같이 만나 이야기하면서 같은 꿈을 꾸는 게 너무 좋은 순간이었다."

-총쏘는 장면은? 쾌감은 없던가.

"공교롭게도 촬영 당시 전년에 예비군을 못가서 10번 정도 예비군훈련을 갔다. 2박3일을 못가면 5일씩 출퇴근을 해야 한다. 갈 때마다 실제 총알을 5발 넣고 쏘는 걸 열흘 간 하는데, 이게 촬영과도 약간 겹쳤다.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들더라. 실제 총을 쏴본 분들이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는데, 저는 쾌감보다는 어마어마한 무서움을 느꼈다. 무기나 전쟁은 그 자체가 공포다. 그걸 영화를 통해 리얼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촬영 때는 공포탄을 썼지만 영화를 보는 분들은 진짜 총으로 느끼게 하고 싶었다. 소총을 쏘면 반동이 큰데, 능숙하지 못하고 좀 미숙한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더 무섭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 '사냥의 시간'의 이제훈. 제공|넷플릭스
-준석의 유토피아에 대한 꿈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다. 이제훈에게 유토피아가 있다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다. 저는 극장 하나 차리는 게 꿈이다. 필름으로 영화를 상영하는 로망이 있다. 허락이 된다면 넷플릭스 스트리밍을 틀어서 영화를 보는 것도 좋고. 예전엔 필름을 틀어주는 독립영화관을 다니면서 나름 시네키드로서 꿈을 꿨다. 뉴욕 독립영화관에 가면 필름으로 영사해주는 곳이 많다. 50~60년 전 필름을 그대로 상영하는 거다. '사냥의 시간' 끝나고 뉴욕으로 바로 도망을 갔다. 남은 거 촬영한다고 할까봐 크랭크업 하자마자 다음 날 갔다.(웃음) '티파니에서 아침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이런 걸 필름으로 상영해주는데 환상적이더라. 내가 뭘 한다면 극장을 차리는 거다. 그게 제 플렉스일 거다. 하루종일 그 배우 그 감독 작품을 쫙 일대기로 보여주는 걸 꿈꾼다."

김현록 기자 roky@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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