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리 슬로언 ⓒ NBA.com 웹사이트 갈무리
[스포티비뉴스=박대현 기자] 제리 슬로언(1942~2020)이 타계했다. 향년 78.

NBA.com은 23일(한국 시간) "선수와 스카우트, 감독과 고문으로 50년 넘게 코트를 지킨 미국프로농구(NBA) 큰 별이 졌다"며 슬로언 죽음을 기렸다.

1980년부터 NBA를 취재한 스티브 애스츠버너 기자는 '슬로언에 대해 알아야 할 10가지 사실'이란 제목의 특집 기사를 적었다. 슬로언 자취를 훑으니 유타 재즈 역사가 확연해졌다.

◆지구력 (Staying power)

NBA는 야구와 풋볼, 아이스하키와 달리 한 구단에서 20시즌 연속 장기근속한 감독이 없었다. 최초가 슬로언이었다. 

2007-08시즌. 슬로언은 20년을 꽉 채웠다. 1988년 12월 프랭크 래이든으로부터 유타 지휘봉을 넘겨받은 뒤 한 해도 쉬지 않고 지도하면서 이룬 쾌거다.

시간만 채운 게 아니다. 내용도 챙겼다. 단일 구단에서 1000승을 거둔 최초 인물도 슬로언이다. 샌안토니오 스퍼스 그렉 포포비치 감독보다 먼저 금자탑을 쌓았다.

◆독종 (Walked two miles to school, really)

슬로언은 미국 일리노이주 매클레인즈버러에서 나고 자랐다. 매클레인즈버러는 농업이 기반인 한적한 시골 도시.

10남매 중 막내였던 슬로언은 4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살림이 퍽퍽했다.

아침 일과가 매일 같았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농장 잡무를 처리한 뒤 꼬박 2마일(약 3.2km)을 걸어 등교했다. 그리고 농구 연습.

초등학교 때는 방 한 칸짜리 스쿨하우스(마을에 하나 있는 작은 학교 건물)에서 공부했다. 학교라기보다 교사 사택에서의 과외에 가까웠다. 동기생은 단 2명. 

그야말로 깡시골에서 성장한, 백인 농업층 가정 막내로 자란 가난한 체육인이 슬로언이었다.

◆2번의 지명 (Drafted twice by the same team)

대학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슬로언은 일리노이 대학에 입학했지만 오래 다니지 못했다.

향수병이 심했다. 고향은 물론 당시 여자친구이자 훗날 결혼에도 골인해 반평생을 함께한 바비 슬로언을 향한 그리움이 컸다.

결국 에반스빌 컬리지(1967년 에반스빌 대학으로 격상)란 곳을 찾아 겨우 학업을 이어 갔다.

▲ NBA.com 영상 갈무리
곡절이 있었지만 슬로언은 이내 에반스빌 컬리지 에이스로 활약했다. 득점과 리바운드, 플로어 게임 모두에서 눈부신 기량을 뽐냈다.

슬로언 활약 덕분에 에반스빌 컬리지는 승승장구했다. 미국대학체육협회(NCAA) 디비전Ⅱ 챔피언십에서 연속 우승을 거뒀다.

슬로언도 두 시즌 연속 토너먼트 최우수선수(MVP)와 올-아메리카 세컨드 팀에 이름을 올렸다. 일리노이에서 적응 실패가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슬로언은 전학으로 소요된 시간이 있어 1964년 NBA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때 전체 19순위로 볼티모어 불레츠(현 워싱턴 위저즈) 지명을 받았다.

하나 슬로언은 입단을 거부했다. 학교로 돌아갔다. 에반스빌 컬리지에서 4학년을 마치고 다시 드래프트에 응하기로 결정했다.

불레츠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듬해 드래프트에서 재차 지명권을 슬로언에게 썼다. 슬로언은 전체 7순위로 불레츠 유니폼을 입고 NBA에 데뷔했다.

◆영구결번 (The first Mr. Bull)

데뷔 시즌은 평범했다. 59경기에 나서 평균 5.7득점 3.9리바운드 1.9어시스트. 야투율도 41.5%에 그쳤다.

볼티모어는 슬로언을 포기했다. 1966년 NBA에 발 들인 신생 팀 시카고 불스를 위한 확장 드래프트(expansion draft)에 슬로언을 내놓았다.

절치부심. 슬로언은 비 시즌 동안 오랜 스승인 애러드 맥커천 농구 캠프에 들어가 기량 향상에 몰두했다. 데뷔 시즌 부진으로 실망했던 그는 그 해 여름, 완전히 다른 선수로 탈바꿈했다.

▲ NBA.com 웹사이트 갈무리
소포모어 시즌에 펄펄 날았다. 80경기에 나서 평균 17.4점 9.1리바운드를 챙겼다. 출전 시간도 2배 넘게 늘었다(16분 6초→36분 48초).

슬로언은 올스타에 뽑혔다. 소속 팀 플레이오프(PO) 진출도 이끌었다. 갓 합류한 막내 구단이 봄 농구 무대를 밟는 데 크게 한몫했다.

슬로언은 무릎 부상으로 1975년 은퇴하기까지 2번의 올스타와 6번의 올-디펜시브 팀에 선정됐다. 시카고 최초 영구결번도 슬로언 몫. 

그가 달았던 등 번호 4번이 시카고 홈 구장 천장에 올랐다.

키 196cm 스윙맨이었던 슬로언은 보드 장악에 일가견을 보였다. NBA 역사상 커리어 평균 7리바운드-2스틸 이상을 동시에 거둔 유일한 선수가 슬로언이다(통산 755경기 출장, 평균 14득점 7.4리바운드 2.2스틸 야투율 42.7%)

◆비껴간 비극 (Sidestepping tragedy)

슬로언 멘토였던 맥커천은 제자를 후계자로 여겼다. 슬로언이 에반스빌 대학을 이끄는 지도자로 성장하길 바랐다.

그래서 슬로언이 은퇴 선언한 1976년. 곧장 에반스빌대 감독직을 제안했다.

학교가 배출한 최고 유명인사였던 슬로언은 맥커천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며칠 안 돼 슬로언이 마음을 바꿨다. 딕 모타 후임으로 시카고 감독에 부임한 에드 바드가(Ed Badger)를 보좌하는 어시스턴트 코치가 되기로 결심한 것.

에반스빌대는 달리 수가 없었다. 부랴부랴 오럴로버츠 대학 바비 왓슨을 새 감독으로 앉혔다.

1977년 12월 13일. 에반스빌대 농구부는 미국 테네시주 중부에 있는 머프리즈버러(Murfreesboro)로 향했다. 경기를 위해 비행기를 탔다. 

비안개가 그득한 날씨에 선수단을 태운 비행기가 이륙했다.

이륙하고 90초 뒤 에반스빌대 농구부를 태운 DC-3 항공기가 땅바닥에 쾅하고 부딪혔다. 탑승 인원 29명 전원 사망.

사망자 중에는 슬로언 대신 부임했던 왓슨도 포함돼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3년 동안 전선을 누빈, 퍼플 하트 훈장(Purple Heart·미국에서 전투 중 부상을 입은 군인에게 주는 훈장)만 5개에 이르는 역전의 용사도 액운(厄運)을 피하지 못했다.

슬로언은 이 사실을 몇 년 뒤에 알았다고 한다. 이후 한동안, 거의 매일 이 비극에 시름했다.

성적 부진으로 시카고 감독직에서 물러난 슬로언은 1984년 에반스빌 지역을 연고로 둔 CBA 농구 팀 선더(Thunder) 코치로 부임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유타 래이든 감독 부름으로 다시 NBA 무대에 복귀했다. 전력분석원으로 새출발했다.

◆수집광 (Another man’s treasure)

슬로언은 끝내 NBA 파이널 우승 반지를 손에 끼우지 못했다. 선수와 코치로서 50년 넘게 도전했지만 화룡점정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반지 말고 세상 모든 물건을 수집한 '수집광'이었다.

슬로언 집에는 싸구려 보석(bauble)과 장식품(doodad)이 홍수를 이뤘다. 다른 이가 버린 골동품도 오와 열을 맞췄다. 슬로언은 무언가를 모으는 데 광적으로 집착했다.

아기자기한 소품만 쌓아 둔 게 아니었다. 한 번은 농업용 트랙터를 수집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수년에 걸쳐 미국 농기계 제조업체 '존 디어(John Deer)' 브랜드 트랙터를 집안에 거둬들였다.

슬로언도 "나도 이유를 모르겠다. 왜 내가 (잡동사니를) 수집하는지. 그냥 물건 모으는 게 즐겁다"며 멋쩍어했다.

한 번은 쓰던 물건을 집 차고에 내놓고 파는 개러지 세일(garage sales)을 슬로언이 진행한 적이 있다. 이때 나온 물품이 볼 만했다. 

도자기와 인형, 장난감, 대리석, 트랙터(!)가 진열됐다. 범인(凡人)은 아니었다.

◆테크니컬 파울계 '큰형님' (Can’t spell ‘Sloan’ without a T)

선수 시절 슬로언은 공격성과 투쟁심이 높았다. 백인 허슬러를 상징했다. 당대 터프 디펜더를 꼽을 때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지도자가 됐다고 성격이 바뀔까. 그럴 리 없다. 슬로언은 정장 입고 구두를 신어도 슬로언이었다.

다만 공격 대상이 바뀌었다. 상대 선수가 아니라 '심판'과 싸웠다. 슬로언은 선수와 감독 시절 통틀어 테크니컬 파울 446회(!)를 받았다.

1년에 꼬박 10번씩은 심판 '티(T) 파울' 제스처를 경험한 셈이다.

다혈질 성격 탓에 헤드라인을 장식한 적도 많다. 주제는 심판과 몸싸움.

슬로언은 1993년 4월 밥 델라니 심판을 팔로 밀어 1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먹었다.

2003년 1월에는 코트니 커클랜드 심판을 거칠게 밀쳐 7경기 정지 처분을 받았다.

유타 감독에서 물러난 지 2년째 되던 2013년. 슬로언은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혈기를 누르지 못한 과거가 살짝 후회된다고 고백했다.

"심판과 사이좋게 못 지냈던 게 후회된다. 잘 지냈다면 더 좋은 코치가 됐을텐데... 난 그러질 못했다. 유타를 우승시키겠다는 생각이 너무 강해 종종 팀에 폐 끼치는 행동을 했다. 그게 좀 마음에 걸린다."

◆올해의 감독상 (No COY for you)

NBA에는 1000승 이상 거둔 감독이 총 9명 있다. 이들이 수집한 올해의 감독상 트로피는 모두 13개.

돈 넬슨과 포포비치, 팻 라일리가 각각 3개로 가장 많다.

하지만 슬로언은 트로피가 없다. 0개다. 릭 아델만과 더불어 1000승 이상 거둔 지도자 가운데 '유이하게' 올해의 감독상을 거머쥐지 못한 인물이 슬로언이다.

억울할 만하다. 슬로언은 +60승 시즌만 3번에 +50승 시즌도 14번이나 이룬 명장이다. 시카고(1회)와 유타(19회)를 이끌면서 두 팀을 총 20번 PO에 안착시켰다.

2번의 파이널과 6번의 서부 결승 진출은 덤. 숫자로는 더는 입증할 게 없다.

▲ 1998년 미국프로농구(NBA) 파이널에서 마이클 조던(슛 던지는 이)를 막는 제프 호너섹
유타는 1998년 NBA 파이널에서 시카고에 고개를 떨궜다. 시리즈 스코어 2-4로 쓴맛을 봤다.

'준우승 청부사'란 달갑잖은 꼬리표가 슬로언에게 붙었다.

이때 휴스턴 로키츠 루디 톰자노비치 감독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씩씩대며 옹호했다.

"확실하다. 슬로언은 정당한 평가를 못 받고 있다. 그는 유타의 위대한 리더다. 항상 올바른 방식으로 팀을 이끄는 흔치 않은 명장이다. 슬로언은 절대 (무언가를 판단할 때) 자신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동상을 세워달라 (Stockton, Malone and Sloan)

존 스톡턴은 1984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16순위로 유타 유니폼을 입었다. 칼 말론은 이듬해 전체 13순위로 재즈에 합류했다.

이후 18년간, 유타는 14순위 밑으로 픽을 행사하지 못했다. 말론과 스톡턴, 슬로언이 주축이 된 뒤 팀 성적이 늘 정상권이었기 때문이다.

셋은 18시즌 동안 함께했다. 이 기간 781승을 쓸어 담았다.

2005년 드래프트는 유타에 낯선 풍경이었다. 이 해 유타는 전체 3순위로 데론 윌리엄스를 호명했다. 

아이러니하다. 거의 20년 만에 얻은 로터리 픽으로 지명한 선수가 '슬로언 장기집권'을 끝내는 방아쇠가 될 줄은. 그땐 아무도 몰랐다.

슬로언은 2009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영원한 동료 스톡턴과 함께. 말론도 이듬해 자리를 같이했다.

2010년 솔트레이크 시티는 집단 청원에 나섰다. 유타 홈 구장인 비빈트 아레나 주변에 슬로언 동상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이미 말론, 스톡턴 동상은 세워져 있던 상황. 지역민은 둘 옆에 슬로언도 함께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야 유타가 완성된다는, 재즈 연주가 완성된다는 손팻말을 들고.

◆영혼의 콤비 (Sidekick, partner, friend)

슬로언에겐 영혼의 단짝이 있다. 필 존슨 코치다. 존슨을 빼고 커리어를 논하긴 어렵다. 

슬로언이 셜록 홈즈, 마이클 조던, 배트맨이었다면 존슨은 존 왓슨, 스코티 피펜, 로빈이었다.

1979년 슬로언이 시카고 코치로 부임했을 때, 그는 감독 경영진에 존슨을 추천했다. 당시 존슨은 새크라멘토 킹스에서 5년간 코치로 있다가 해고된 상황. 이때 맺은 인연은 이후 30년 넘게 이어졌다.

래이든 감독 후임으로 유타 지휘봉을 잡은 슬로언은 다시 존슨을 호출했다. 1988년 재결합하고 2011년 '데론 쿠데타'로 슬로언이 하야할 때까지, 존슨은 늘 옆을 지켰다.

언젠가 존슨은 슬로언과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나와 슬로언은 비슷한 성장배경을 지녔습니다. 우리는 함께 성장했죠. 서로 영감을 주고받으면서 말입니다." 

"(세월이 흘렀는지) 이젠 생각도 (거의) 똑같아요. 우린 언제나 솔직하게 서로를 대했습니다. 슬로언은 내가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알아요. 나 역시 그렇습니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기분인지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슬로언은 존슨과 견줘 짤막하게 둘 사이를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호감이 전제된 말씨였다.

"존슨과 나는 훌륭한 관계를 (오랫동안) 맺어왔어요. 존슨은 머리가 정말 비상한 친구에요. 멍청한 나와는 다르죠(Phil and I had a great relationship. Phil is a very smart guy. I’m the dummy)."

스포티비뉴스=박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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