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독 정진영. 제공|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스포티비뉴스=김현록 기자]"메시지야 뭐, 조금 이상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힘든 코로나 시국에 즐겁게 보십시오."

조금 이상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감독 정진영(56)의 데뷔작 '사라진 시간'에 대한 이만한 설명이 있을까. 무대와 스크린, 안방극장을 누비며 활약해 온 관록의 배우가 내놓은 첫 연출작은 러닝타임 내내 보는 이의 허를 찌른다.

'사라진 시간'은 의문의 화재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 형구(조진웅)가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충격적인 상황과 마주하면서 없어진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 영화의 3분의 1이 지나서야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 영화는 무난한 예상을 번번히 배반하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사라진 나를 찾아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33년을 배우로 살아온 감독이 품어온 오랜 질문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배우란 나 아닌 작품 속 캐릭터로 살면서, 대중의 눈에 비친 나 아닌 누군가를 늘 마주해야 햐는 직업일 테니까.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정진영은 "내가 배우를 해서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냐 말씀하신 분이 많다. 의식하지 못할 사이 그럴 수도 있다"며 "아닌데 아니라고 증명할 방법이 없다"고 슬쩍 이야기를 돌렸다. 대신 "누구나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너는 그거야' 하는 데 맞춰 살기로 한다. 그래야 통용되니까, 그러다 겪는 충돌은 누구나 경험하고 사는 것"이라는 답을 내놨다.

"다들 왠지 서글퍼지는 순간이 그럴 때 아닐까요. 내가 왜 나 없이 어디론가 가나. 내가 좋아하는 게 뭐지, 그걸 찾아서 하면 어차피 사는 인생 재미있게 살지 않을까. 심오한 뭔가를 전달하려 했다기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면 좋겠어요. 계속 끊임없이 변하잖아요. 그 변화를 따라가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어요."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이제 와 첫 영화를 만들게 된 그의 이야기와 이어졌다. '사라진 시간' 자체가 변화해가는 정진영 삶 속에 있으니. 그는 17살부터 영화 연출을 꿈꿨다. 이창동 감독의 연출부 막내로 영화계에 발을 들였지만 거장들을 곁에서 지켜보서 '내 능력 밖'이라며 꿈을 접고 지낸 터였다. 40년 만에 꿈을 이룬 지금도 "부족함을 무릅쓰고 내 식으로 만들겠다 시작한 거지만, 여러가지를 통해 내가 다 발가벗겨지는 듯한 느낌, 통째로 보여지는 느낌이 있다"고 고백한 정진영. 하지만 그는 '하고 싶다'는 꿈을 향해 과감하게 다가갔다.

▲ 감독 정진영. 제공|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4~5년 전, 우리 애가 고3이었는데 생각해보니까 제가 가장으로 할 일이 끝났더라고요. 오랜 시간 가장으로서 역할을 크게 생각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떄 생각했죠. 나는 예술가로 살길 바랐는데, 나는 예술가로 살고 있는가를. 저는 예술가지만 어쩌다보니 안전한 시스템 안에서 계속 작업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젊어서 생각한 예술가는 도전하고 돌파하는 어려운 작업이었거든요."

영화가 응답했던 걸까. 정진영이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쯤부터 홍상수, 장률 등 작은 영화를 만드는 작가주의 감독들과 일할 기회가 이어졌다. 영화는 돈이 아니라 '이야기와 진심'으로 만든다는 걸 실감하는 기회였다. 출연키로 했던 한 독립영화가 촬영 1주일을 앞두고 엎어졌을 때 생긴 여유는 도리어 시나리오를 쓸 기회가 됐다. '굉장히 관습적'이란 생각에 처음 쓴 시나리오를 버리고 다시 쓴 이야기가 바로 '사라진 시간'이다.

"망신당해도 어쩔 수 없어, 나는 잘 만들 수 없는 사람이 아닌데. 규칙에 얽매이며 검열하지 말고 자유롭게 해보자 했어요. 뭔가 새로운 걸 해보고 싶었다기보다는 그냥 자유롭고 싶었어요. 황당한 이야기, 이상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시놉시스를 썼고, 그대로 시나리오를 써내려갔어요. 이렇게 이상한 이야기가 그렇게 나왔습니다."

정진영은 원래 사비를 털어 직접 영화를 제작할 생각이었다. 내 마음대로 쓴 시나리오를 내 마음대로 만들려면 제작비도 직접 대야 온당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단칸 사무실을 얻어 영화사도 하나 차렸다. 그런데 일이 커졌다. 발단은 조진웅이었다.

조진웅을 그리며 쓴 시나리오기는 했지만 할 가능성은 얼마 없다 생각한 터였다. 그런데 책상 하나 노트북 하나 시나리오 하나 있는 사무실에서 '사라진 시간' 초고를 본 조진웅이 "하겠다"고 나선 것. 충무로에선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던 시나리오였기에 "어디 좀 고칠까" 물었던 정진영에게 조진웅이 시원하게 돌려준 답은 '사라진 시간'을 만드는 내내 큰 힘이 됐다. "왜 고쳐요. 토씨도 건드리지 마요!"

알려졌다시피 조진웅은 개런티 한 푼 받지 않고서 '사라진 시간'에 함께했다. 그를 필두로 다른 뜻 있는 배우들이 하나둘 합류하고. 제작사가 생기고 투자자까지 참여하면서 '사라진 시간'이 궤도에 올랐다. 한때는 덜컥 겁이 나 다른 감독에게 연출을 맡겨야 하나 고민한 시절도 있었다. 아내의 한 마디는 그런 정진영을 붙잡았다. '당신이 하고 싶어서 한 거니까, 이번에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거다.' 정진영은 "제가 필연적으로 연출을 할 이유는 없지만, 제 인생에서 안 했으면 후회했을 것"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감독 정진영. 제공|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상업영화라는 틀 안에서 첫 연출작을 선보일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두렵다면서도 정진영의 얼굴은 밝았다. 꿈을 꾸고, 그것을 향해 애쓰고, 끝내 이룬 이의 표정은 이런 걸까. 하지만 그는 단호하고 또 겸손했다.

"성취감이라기보다 벅차네요. 영화는 관객을 만남으로서 완성된 거죠. 해보자 생각했던 것이 현실이 됐네요. 묘한 기분이 들어요. 감개무량하다는 옛날 4자성어를 쓸 수밖에요. 다음 영화요? 없어요. 한 번은 '하고싶다는 이유만으로 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2번을 하면 욕심이죠.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해요."

스포티비뉴스=김현록 기자 roky@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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