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정무 대전 하나시티즌 이사장





(편집자 주) 축구팬들에게는 각자 기억하는 축구대표팀의 명경기가 있습니다. 1954년 스위스월드컵 이후 32년 만에 나선 1986 멕시코월드컵에서 디에고 마라도나를 앞세운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박창선이 넣은 골부터 모두가 잊지 못하는 2002 한일월드컵 16강 이탈리아전 안정환의 헤더 골든골, 2010 남아공월드컵 그리스전에서 '해버지'로 불리는 박지성이 수비수의 볼을 가로채 골을 넣고 보여준 풍차 돌리기 세리머니까지 다양합니다. 스포티비뉴스에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의 영향으로 지난 3월부터 멈춘 축구대표팀의 과거 경기들을 회상하며, 직접 뛰었던 이들의 무용담(?)을 들어보는 시간을 시리즈로 마련해 연재 중입니다. A대표팀부터 연령별 대표팀이 치른 기억 속의 명경기, 내가 좋아했던 전설의 회상까지 '나의 A-스토리'에서 한 번에 느껴보시죠.


[스포티비뉴스=대전, 유현태 기자 이성필 기자] 한국의 월드컵 도전사는 험난했다. 도전과 경험에 의미를 두었던 1986년 멕시코월드컵부터, 성과를 내기 원했지만, 세계와 격차를 확인했던 1990년대 3번의 월드컵. 그리고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와 그 경험을 바탕으로 작은 성과들을 만들어가고 있는 그 이후의 월드컵들까지. 2002 월드컵과 더불어 가장 눈부신 성과로 평가받는 2010년 남아공월드컵 16강 진출은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허정무(65) 대전 하나시티즌 이사장은 2010년 남아공월드컵 당시 사령탑으로, 한국 축구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을 이뤄냈다. 주장이었던 박지성(39)을 비롯해 이영표(43), 차두리(40), 이운재(47), 김남일(43), 안정환(44) 등 2002 한일월드컵 4강 세대가 있었고, 여기에 새롭게 떠오른 박주영(35, FC서울), 기성용(31), 이청용(31, 울산 현대) 등 새 얼굴들이 더해졌다.

사령탑으로 산전수전 모두 겪으며 쌓은 경험이 토대였다. 허 이사장은 유럽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지도자로 전향한 뒤 프로 무대와 각급 대표팀을 두루 거치며 경험을 쌓았다. 선수로, 그리고 지도자로 월드컵을 3번이나 치르고,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도전에 나섰다.

박지성을 주장으로 선임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여러 차례 월드컵을 경험하며 그렸던 구상을 현실로 만들어가며 16강 진출의 기쁨을 한국 축구 팬들에게 안겼다.

▲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주장 박지성의 환호

◆ 주장이 박지성이었던 이유 "은은하게 드러나는 리더십"

"박지성이라는 선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참 좋다. 눈에 튀는 것보다는 스스로 잠재된 게 좋다는 말이다. 막 나서서 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같이 녹아드는데 모든 사람이, 선수단이 존중해주는 게 좋다는 이야기다. 확 눈에 띄진 않지만 나타나는 리더십이다."

2010년, 당시 대표팀엔 리더감인 선수들이 다수 있었다. 이영표, 이운재, 안정환, 이동국, 김남일, 이정수 등 경험과 실력을 겸비한 선수들이 포진했다. 허 이사장이 점찍은 '주장'은 박지성이었다. 그의 이름이 거론되자 코칭스태프 사이에서도 이견이 생겼다.

"코칭스태프와 주장 선임을 두고 회의를 했다. (이)영표가 많이 나오고, 안정환, 이동국, 이운재, 이정수가 많았다. 나는 '박지성이 (맞는 것) 같다, (주장을) 시키면 어떻겠냐'고 했다. 정해성 코치, 김현태 코치가 '예?'하고 놀라더라. 부정의 뜻이었다. 내가 보기엔 (박지성이) 가장 좋은 것 같았다. 누구와도 어울릴 수 있고, 한국에서 위상이란 게 있는데 맞지 않겠나. 주축 선수들하고 한 번 티타임을 해보자고 했다."

박지성은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명문 구단에서 뛰고 있었다. 실력의 측면에서는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개성 강한 선수들이 두루 모인 대표팀에서 주장 완장을 차기엔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평가가 코칭스태프 사이에서는 녹아 있던 것으로 보인다. 허 이사장의 예상대로 선수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러운 공감대가 있었다고 한다.

"주장을 누가 희생적으로 해줘야 할 텐데, 이야기해보자고 했다. 이영표 얘기를 꺼내면 다른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코치들에게 이야기했다. (이)영표에게 물었더니 '저는 아닙니다. 지성이가 하는 게 어떨까요'라더라. 다른 선수들도 다 박지성을 이야기하더라. 그래서 결정했다. 예상한 내용이었다. 지성이가 (주장이) 되면서 전체가 응집되는 모습이 있었다."

박지성은 경기장 안팎에서 부드러운 리더십을 보여줬다. 선배들은 물론, 개성이 강한 박주영, 기성용, 이청용 등 후배들까지 박지성의 리더십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또 그라운드 안에서는 누구보다 뛰어난 경기력으로 팀을 이끌었다. 월드컵 본선에서도 16강까지 모두 선발 출전해 풀타임 활약했다. 사활을 걸었던 그리스와 조별리그 1차전에서 득점을 해냈으니 계획이 차근차근 맞아들어갔던 셈이다.

▲ 공을 모는 파브레가스(왼쪽)를 김정우(가운데)가 수비하고 있다. 2010년 월드컵 직전에 열렸던 평가전.

◆ 두려운 것이 없었던 허정무호

2002 월드컵에서 4강까지 올랐고, 유럽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경쟁했던 것은 그 자체로 저력이 됐다. 허 이사장은 "남아공 월드컵 때는 이미 박지성, 이영표, 안정환, 김남일 같은 선수들은 4강까지 경험하지 않았나. 해외에서도 오래 활약했고 큰 경기도 뛰어봤다"라며 당시 팀의 자신감을 전했다. 박지성은 물론이고 김남일, 차두리, 박주영, 이청용, 기성용이 유럽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이영표, 안정환도 유럽 빅리그에서 활약한 경험이 있었다.

이제는 세계의 강호들을 상대로도 주눅 들지 않는다. 축구의 본고장 유럽에서 경쟁을 펼치는 이들에게 월드컵이란, 더는 'TV에서만 보던 선수'와 맞대결이 아니었다. 상대할 팀들과 목표, 그리고 그 수준을 정확히 알고 있으니 두려움도 없었다. 허 이사장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를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고 회상했는데, 이미 한국 축구는 성큼 성장했다.

2010 남아공월드컵은 시작부터 겁 없이 싸웠다. 한국은 2010년 5월 16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에콰도르에 2-0으로 이긴 뒤 일본으로 향했다. 2010년 5월 24일 일본의 월드컵 출정식에 상대로 맞서기 위함이었다. 통쾌하게도 박지성-박주영의 연속 골로 2-0 승리를 거두며 일본의 출정식을 망쳐놨다.

"엄청나게 부담이 가는 경기 아닌가. 요청이 왔는데 할 거냐고 묻더라. (당연히) 하자고 했다. 두려워할 게 뭐 있나 싶어 하겠다고 했다. 사실 우리보다 일본에 도움이 된 경기였다. 오카다 다케시 감독에게 득이 된 것 같다. 우리가 2-0으로 이기면서 오카다 감독이 느낀 것 같다. 그때까지만 해도 들떠있다가 현실을 느낀 것 같다. 본선에선 극단적으로 수비를 했다. 최악의 수비팀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그렇지만 16강에 갔다. 맞상대해서는 곤란하다고 느낀 것이다."

허정무호는 세계 최고의 팀을 상대로도 자신만만했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서 벌어졌던 스페인과 '최종 리허설'에서 0-1로 패했지만 경기력은 나쁘지 않았다. 스페인은 남아공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로테이션을 가동했다지만, 한국이 유럽 최고 수준의 팀을 상대로도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는 강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강팀과 경기를 원했다. 어떤 경기에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 인스브루크에서 스페인과 경기를 잡았다. 축구협회 측에서는 본선 가기 전, 전지훈련 하면서 스페인과 해서 박살 나면 사기에도 영향이 있고 안 좋지 않겠나 하더라. 나는 '괜찮다, 하고 가겠다, 해보겠다'고 했다."

▲ 우루과이전 패배 뒤 눈물을 훔치는 차두리(오른쪽)와 이를 달래는 안정환

◆ 2010년 월드컵의 아쉬움 "우루과이와 한 번 더 붙어봤으면"

선수단에는 자신감이 퍼져 있었다. 허 이사장은 풍부한 경험을 쌓은 덕분에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한국은 본선에서 그리스,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와 함께 묶였다. 이겨야 할 경기에 조금 더 신경을 쓰고,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하면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것도 필요했다. 허 이사장은 "월드컵에서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선수들이 편안하게 하도록 해줬다. 대회도 전략적으로 했다"라고 평가한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은) 정말 아쉬움이 많았다. 끝나고 아쉬움이 가장 많았다. 어떻게 해야겠다는 로드맵이 정리된 상태였다. 그래서 조별 리그 고비에서 잘 넘겨줬다. 첫 경기 그리스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 아르헨티나전은 최선의 결과가 비기는 거였다. 진다고 봐야 했지만, 한번 해보자고 했다. 결국은 마지막 경기에서 승부가 난다고 봤다."

허 이사장의 큰 구상은 그대로 맞아 들었다. 첫 경기에서 그리스를 2-0으로 이겼다. 아르헨티나에 1-4로 패했지만, 자력으로 16강행을 확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최종전에서 나이지리아와 2-2로 비기며 16강에 올랐다. 아르헨티나가 허 이사장의 예측대로 3승을 거뒀고, 한국 역시 바라고 있던 1승1무1패를 해냈다. 아르헨티나전의 완패에도 분위기가 떨어지지 않은 것이 중요했다. 아르헨티나전 패배를 예상했기에 오히려 선수들을 편안하게 만들어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아르헨티나전에서 1-4로 졌지만, 경기는 아주 잘했다. 후반에 계속 밀어붙였다. 염기훈이 그 슛을 못 넣었지만, 재수가 좋았다면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리오넬 메시한테 역습을 허용해 실점했다. 내용은 괜찮았다. 선수들에게도 잘했다고 했다. 베이스캠프 돌아와서도 피곤할 텐데 쉬라고 했다. (박)지성이가 오더니, 선수들이 운동하자고 한다고 하더라. 분위기가 좋았다. 운동하겠다고 하길래 나가자고 했다. 약간의 심리전이기도 했다."

한국은 16강에 오르면서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스스로 키웠다. 단판 경기에서는 변수가 더 큰 법이기 때문이다. 기대감도 있었다. 우루과이전 1-2 패배가 유난히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다. 허 이사장은 모든 가정이 '결과론'임을 알고 있지만, 때론 후회하거나 아쉬울 때가 있다고 말했다. 우루과이와 한 번 더 붙어보고 싶다는 말에는, 농담이 절반 그리고 진심이 절반쯤 담겨 있는 느낌이었다.

"(우루과이전) 이동국의 그 슈팅은 하늘의 뜻이다. 본인도 안 넣고 싶었겠는가. 마찬가지로 (교체로 투입된 선수가) (이)동국이 말고 안정환이었으면 어땠을까 싶더라. 우루과이전 첫 실점이 실책성이었다. 이운재였으면 실수가 나왔을까? 그런 생각도 많이 했다. 사실 (우루과이 쪽에) 기회도 별로 없었다. 그게 참 결과로 이야기하긴 편한데, 선택하는 처지에선 정말 (어렵다).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는 모른다. 내가 축구 인생에서 우루과이와 한 번 더 붙었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사실 안정환에게 기대가 컸는데 몸이 안 돌아오더라. 몸이 조금만 돌아왔으면 안정환을 썼을 수도 있었다. 코치들하고 확인하는데 몸이 안 돌아왔더라."

그래도 소득을 만든 월드컵이었다. 현역 시절 네덜란드에서 활약하며 이름을 알렸던 과거와 더불어서.

<③편에 계속…>

스포티비뉴스=대전, 유현태 기자 이성필 기자
저작권자 © SPOTV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