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전에서 선제 결승골을 넣고 박항서 수석코치에게 손짓하며 뛰어가는 황선홍(오른쪽) 대전 하나시티즌 감독

[스포티비뉴스=대전, 유현태 기자 이성필 기자] "마지막 월드컵이 35살 때였어요. 사실상 공격수로서는 은퇴였어요."

대한민국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인정받던 황선홍(52) 대전 하나시티즌 감독에게 1994 미국월드컵은 상처로 남았다. 그 이후 어떤 활약을 펼쳐도 고칠 수 없는 깊은 상처, 같은 해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한일전에서 3-2 역전승을 이끌고 대회 득점왕까지 차지했지만, 월드컵의 실패는 그대로 남았다.

당시 축구 선수 황 감독의 나이는 20대 중반. 한국 축구의 기대를 고스란히 젊어지기에는 너무 젊었다. 선수 생활이 창창했지만, 실패는 아팠고 심각하게 미래를 고민했다. 결론은 월드컵에서 명예 회복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월드컵이 안긴 아픔은 월드컵으로 자가 치유하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네

월드컵이 안긴 상처는 오히려 황 감독이 축구에 매진하는 계기가 됐다. 월드컵을 한 해 앞뒀던 1997년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큰 부상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재활에 매달렸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에 월드컵 첫 승리를 안기겠다는 각오였다.

"질타를 많이 받았다. 정신적으로 약하거나, 오기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으면 포기했을 수도 있었어요. 엄청난 시련이었으니까요. 길을 다니면 고개를 들지 못했거든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는 축구에 엄청난 관심이 있었어요. 두문불출하며 집에서 몇 날 며칠을 생각해도  경기장에서 보여주는 것 말고는 없더라고요. 최선을 다해서 돌아간 '팬심'을 돌려놓는 것뿐이었어요. K리그에서 8경기 연속 골을 넣고 골든볼을 받아도 안 되더라고요. 월드컵에서 실패하면 월드컵에서 만회해야 했으니까요."

"(프랑스월드컵을 앞두고) 1년 4개월 동안 독일과 한국에서 재활했어요. 독일에서 순리대로 잘했지만, 한국에 돌아온 뒤 포항에서 혼자 했는데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절제했고 일정대로 알아서 했어요. 목표는 딱 하나. '월드컵에 나가겠다'는 분명하고도 정확한 목표가 있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간절하게 준비했던 프랑스월드컵은 황 감독에게 또 다른 아픔으로 남았다. 1998년 6월, 월드컵을 코앞에 두고 치른 한중 정기전에서 황 감독은 상대 골키퍼와 충돌하며 무릎을 크게 다쳤다. 최종 엔트리에 속해 프랑스까지 날아갔지만, 출전 불가였다. 명예회복을 위해 칼을 갈았으나 불운이 그를 덮쳤다.

"1990 이탈리아월드컵이야 아무것도 모르고 나가서 뛰었어요. (미국월드컵은) 정말 팀의 주축이었는데 전성기 시절 해보고 싶었던 때는 다 말아 먹었고요. (프랑스월드컵은) 31살이었는데 정말 (기량이) 무르익고 축구도 좀 보이고 옆 사람도 좀 활용하고, 최용수(현 FC서울 감독)와 투톱도 가능했어요. 기대를 갖고 대회를 준비했는데 중국전에서 다치면서 뛰지 못했어요. 월드컵은 나와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16강 좌절의 아픔을 안고 귀국한 그해 7월, 세레소 오사카 유니폼을 입고 일본에 진출했다. 수원 삼성을 거쳐 가시와 레이솔(일본)에서 유상철, 홍명보와 함께 뛰었다. 세레소에서는 1999년 J리그 득점왕도 차지했다. 그래도 마음속에서 덜지 못한 부채, 월드컵에서 한국에 첫 승을 안기겠다는 의지는 그대로였다. 그래서 당시 축구 선수로서는 환갑을 넘었다는 35살의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기다렸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고민했어요. 해외에 나가야 하나, 아니면 그만둬야 하나 말이죠. 자존심이었던 것 같아요. 일본에서 뛰면서도 은퇴는 한국에서 하겠다고 했거든요. 일본에서 득점왕도 하고 좋았던 시절이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월드컵'이라는 부채가 있었어요.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서 인식을 바꾸고 은퇴하겠다고 말했어요. 1998년에는 성공하지 못해서 1994년의 빚을 갚지 못했다고 생각했거든요. 어쨌든 목표는 하나였어요. 지금이 좋아도 만족하지 못했으니까요.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것 같아요."

▲ 황선홍(가운데, 18번)은 1998 프랑스월드컵에서 부상으로 마음껏 웃지 못했다. 유상철(왼쪽, 6번)과 최용수(오른쪽, 10번)와 같이 뛰는 꿈도 수포로 돌아갔다. ⓒ대한축구협회

'여우' 히딩크가 부를 것이라 믿었던 황새, 스스로 강해졌다

황 감독의 현역 시절을 두고 무겁게 압박해오는 관심과 그에 따른 짙은 그림자가 공존했다고 평가한다면 과언일까. 큰 기대가 있었지만, 잦은 부상과 심리적 부담 때문에 원하던 결과를 내지 못했다. 물론 월드컵이라는 기준에서다. 그래서 여러 가지 시선 속에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한국 축구 구세주'로 등장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처음부터 황 감독을 대표팀에 호출한 것은 아니다. 2001년 1월 히딩크 감독이 부임 후 약 5개월여 소집 명단에 들지 못했다. 2001년 5월 카메룬과 친선 경기를 앞두고서야 대표팀에 부름을 받았다. 대표팀에 발탁되지 못하는 동안에도 조급해지지 않았다. 황 감독은 "자신감이다. 저 자신에 대한 확신은 가지고 있다. 내 능력을 믿는 것도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일본에 있을 당시에 월드컵이 오기 전 저를 한 번은 부를 것이라고 확실하게 생각했어요. 몸 관리도 잘했고 경기장에서도 무언가 더 보여주려고 했어요. 핌 베어벡 코치도 보러 왔었어요. 대표팀에는 선수들이 들락날락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부르지 않더군요. 그래도 틀림없이 한 번 불려갈 것이고 그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월드컵에 갈 수 있을지가 결정된다고 봤어요."

'태극마크'를 다시 한번 가슴에 단 뒤, 황 감독은 월드컵만 바라봤다. 간절한 마음 못지않게 긴장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잔디 위에서 경기력을 위해 구슬땀을 쏟으면서도 부상을 피하고자 조심했다. 1990, 1994, 1998년으로 이어진 3번의 월드컵에서 실패를 겪으면서 얻은 교훈들 덕분이었다.

"마지막 월드컵이 35살이었어요. 사실상 공격수로서 은퇴하는 나이였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했던 게 마음도 편안하고 의지도 다지고 제어하면서 좋은 결과를 낸 것 같아요. 반드시 해야겠다는 의지가 있어서 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했어요."

"2002월드컵을 준비하면서 걱정했던 것은 부상이었어요. 책도 많이 보고 음악도 많이 들었어요. 불안감 제어를 위해 굉장히 노력했는데도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겠더라고요. (폴란드전까지) 1주일, 6일, 5일 줄어가는데 훈련하다 발목이라도 삐끗할까 너무 두려운 거죠. 마인드컨트롤을 정말 많이 했어요."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치른 잉글랜드(1-1 무), 프랑스(2-3 패)와 평가전을 치르고 본선으로 향했다. 4강 신화는 채 시작되기도 전. 한국 대표팀의 목표는 우선 '눈앞'에 있었다. 월드컵에서 단 한 번도 해내지 못했던 비원의 첫 승이었다. 황 감독이 1988년부터 무려 15년 동안 태극마크를 달고 그토록 원했던 목표였다.

"2002년이 (1994년보다) 더 절실했어요. 경기 전 인터뷰를 하는데, 웬만해서는 '내일 꼭 골을 넣겠습니다'라고 말을 하지 않아요. 보통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폴란드전을 앞두고 '내일 기회가 오면 반드시 골을 넣겠습니다'라고 인터뷰한 기억이 있어요. 1994년보다 훨씬 강했으니까요. 저 스스로도 강해져야 했고요."

"그때는 첫 승이 하고 싶었다. 2002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 은퇴를 하겠다고 선언하고 배수의 진을 치고 치렀어요. 한 경기, 한 경기가 태극마크를 달고 뛰는 게 마지막이 될 수 있었어요. 내가 득점하는 것도 중요했고, 승리하면 최고였을 거에요. 그렇지만, 그동안 1승도 못했으니까. 1승만이라도 내 힘으로 하게 하고 은퇴하고 싶었거든요. 다행히 득점도 하고 1승을 했으니까 더는 바랄 수 없는 피날레였어요."

▲ 2001년 거스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받고 출전했던 컨페더레이션스 컵.

비원(悲願)의 월드컵 첫 승, 절실했던 황새의 발이 만들었다

폴란드전은 한국의 월드컵 성공 여부를 가늠할 경기였다. 잉글랜드, 프랑스를 상대로 선전했어도 본선은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기대감과 부담감, 두려움까지 온갖 감정이 범벅이 됐을 경기다. 하지만, 팬들의 뜨거운 응원 앞에서는 그 많은 감정이 고스란히 책임감으로 돌아왔다. 뜨거운 팬들의 응원에 보답해야겠다는 각오였다.

"준비 운동을 위해 운동장으로 나가니 관중이 드문드문 있더군요. 운동을 마치고 나서 유니폼을 갈아입고 나가는데…와. 완전히 빨갛고 옆에 사람 이야기도 안 들리더라구요. 애국가가 나오고 태극기가 올라가는데, '아, 운동장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지배했어요.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생각, 못 이기면 못 걸어 나간다는 생각. 가슴에서 이만한 게 올라왔어요.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정말 강했거든요."

황 감독은 폴란드전을 통해 한국의 월드컵 도전사(史)에서 중요한 골 중 하나를 넣었다. 월드컵 첫 승 경기에서 얻은 선제골이자 결승골이 된 골, 전반 26분 왼쪽 측면에서 연결된 이을용(현 제주 유나이티드 수석 코치)의 크로스를 골문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이)을용이를 제가 얼마나 원망했는지 몰라요. 그 짧은 시간, 슬로비디오 같더라구요. 눈이 딱 마주쳤는데 제가 앞으로 빠져나갔거든요. 대인방어 하던 수비가 나를 따라오지 못했어요. 느낌으로 알았죠, (이을용과) 눈이 맞았고 (볼이) 올라올 것이라는 걸요. 그런데 잘 주면 잘 슈팅하겠는데 정말 애매하게 왔어요. 튕기기도 애매하고, 바로 슈팅하기도 애매했죠. 물기가 있으니 그라운드에 튕기면 뜰 것 같았어요. 그대로 발에 대는 것이 조금 더 나았는데 가까스로 댄 거죠. 볼이 이렇게 휘어져 들어가는데, 예지 두덱 골키퍼가 딱 뜨는데 골대 사이로 지나가는 게 보이더라구요. 그게 정말 좋았죠."

황 감독은 월드컵에서 2골을 기록했다. 1994년 독일전 골은 너무도 뒤늦게 터져 기쁨을 나눌 새도 없었지만, 폴란드전의 귀중한 골은 달랐다. 득점 뒤 냅다 벤치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박항서(현 베트남 대표팀 감독) 코치에게 안겼다. 굳이 벤치로 달려 감독이 아닌 코치를 얼싸안은 이유는 '원 팀'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골을 넣었을 때 감정은) 말로 표현이 안 된다. 코너 깃발로 가려고 하다가 아내와 약속한 것도 있고, 벤치로 가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경기를 못 뛰는 선수들, 윤정환이나 이런 선수들이 있었어요. (주변 선수들이) 잡으러 오니까 막 비키라고 (손짓) 했거든요. 한 70m 정도 됐는데 뛰어가서 안겼죠. 선참으로서 같이 느끼면서 힘을 받기를 원했어요. 골을 넣으면 항상 벤치로 가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사실 힘들어서 3~4분여 정신 차리지 못했어요."

"감독님은 늘 거기(벤치)에 계시는 분이었어요. 팀의 중심을 잡고 모든 것을 하시는 분이었죠. 경기에 참여하지 못하면 조금은 소외당하게 되거든요. 경기에 뛰는 우리가 주축이지만, 같이 고생하는 이들 아닌가요. 코치님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감독님이 주이고 코칭스태프는 약간 소외당하는 처지 아닌가 싶었어요. 그래서 분위기를 일신하고 싶었죠. 우리는 하나다, 뭐 그런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물론 박 감독의 청탁처럼 느껴지는(?) 묘한 부탁도 있었다.

"사실 히딩크 감독님은 선발 명단을 미리 알려주지 않아요. 경기 당일 알려줬어요. 박 선생님이 전화가 와서 '선발로 나가니까 몸 관리를 잘하라'고 하시더군요. 끊으려는데 농담조로 '골 넣으면 나한테 오라'고 하셨어요. 벤치로 가다 보니까 '박쌤'이 보였는데 참 좋았어요. 그때는 세상을 다 얻은 듯한 느낌이었거든요.".

"아버님이 1996년에 돌아가셨는데, 하늘을 보고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어요. 이기고 나서는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거든요. 제가 정말 절실하고,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모든 것을 쏟아부으면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 확신했거든요. 지금도 아주 중요한 순간, 포항 스틸러스, FC서울에서 우승했던 그 마지막 순간, 이겨야 우승하는 어려운 순간에, 그게 교훈이 되더라고요."

▲ 이탈리아의 지안루카 참브로타(파란색 유니폼)을 막다가 쓰러진 황선홍

이탈리아전 연장 전반 11분, 부폰의 선방이 없었다면…안정환의 골든골은 없었다?

폴란드전 승리는 황 감독 개인을 넘어 대표팀 전체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간 한국 축구를 옥죄고 있던 '월드컵 첫 승'이라는 굴레가 사라지자 한계가 없어진 것, 이제 어떤 팀을 만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기세를 살려 한국은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연파하며 4강에 오르는 신화를 썼다.

"(안)정환이도, 홍명보 (대한축구협회) 전무도, (유)상철이도 그렇고. 주축들이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싶었어요. 다 같은 세대니까요. 저나 홍 전무는 조금 더 책임감이 심했어요. 대표 선수를 16년이나 했는데 월드컵에서 1승도 못했다니, 이대로 은퇴하면 후배들한테 해줄 말도 없었거든요. 16강은 둘째치고 1승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컸어요. 우리는 월드컵 경험이 많았어요. 나갔다가 실패하고를 반복하니 반신반의했구요. 불안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될 수 있어'라고 생각하다가도 다음 날에는 또 불안하더라고요. 선제 득점한 경우가 많지 않았으니까요. 선제골 넣고 2-0으로 이긴 것이 굉장히 큰 힘이 되더군요. '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팀에 퍼졌어요. 다음 경기부터는 자신감을 갖고 할 수 있었죠."

눈부신 성공이었지만, 다시 돌이켜보면 아쉬운 점도 있게 마련이다. 황 감독은 득점 행진을 이어 가지 못한 것을 정말 아쉬워했다. 황 감독은 기세를 타면 말리기 어려운 유형의 공격수였다. 몰아치기에 능하다는 뜻이다. 1995년 K리그에서 8경기 연속 골을 기록한 것은 그의 능력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황 감독은 "한 번 골을 넣으면 계속 흐름을 이어 간다"라고 자랑(?)했다. 미국과 조별 리그 2차전에서는 원했던 페널티킥을 차지 못했고, 이탈리아와 16강에서는 1-1 동점으로 흘러가던 연장 11분 미드필드 오른쪽에서 얻어 시도한 재치 있는 프리킥이 잔루이지 부폰(유벤투스) 골키퍼의 손에 막혔다. 경기장 조명에 공이 숨는 불운까지 겹쳤다.

"부폰, 아! 그건 원래 막지 못하는 거였어요. 정말 약하게 찼는데, 조금 더 세게 찼으면 막지 못하는 거였어요. 저는 원래 (세트피스) 키커가 아니에요. 그런데 제가 차겠다고 벤치에 말했거든요. 그 이후 한 번 더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아쉬웠어요. 미국전에서 페널티킥을 제가 차고 싶었어요. 벤치에는 제가 차겠다고 했어요. 저는 한 번 넣으면 계속 넣거든요. 그런데 벤치에서 다른 사람(이을용)이 차라고 하더라구요. 한 번 더 골을 넣을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있었어요. 부상 때문에 포르투갈전을 뛰지 못했고 이탈리아전에 나섰어요. 핑계 같지만, 라이트에 볼이 숨었어요. (후반 막판 기회에서) 크로스가 오는데 가슴 트래핑을 해놨어야 했어요. 볼이 떴으면 오버헤드킥을 하던가 어떤 식으로든 슈팅해야 했어요. 하필 볼이 라이트에 숨어서 정확히 못 댔죠. 한 골은 더 넣었어야 했어요. 그리고 (연장 전반) 그 프리킥은 감아 차는 척하면서 (수비벽)아래로 킥을 했죠."

황 감독은 월드컵 첫 승을 선수 생활 하는 동안 가장 기뻤던 순간으로 꼽았다. 월드컵 4강에 오르는 그 순간은 차마 생각지도 못했겠지만, 승리를 얻겠다는 마음은 선수 생활 내내 수없이도 그렸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는단다. 축구 선수의 인생을 전부 바치고 난 뒤, 모두가 늦은 것이 아니냐는 의문의 눈빛을 보낼 때 간절히 원했던 목표를 이뤄 그렇다.

"(첫 승이) 살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고 감독을 하면서도 그런 순간들을 어떻게 준비하고, 경기했고 이런 것들이 기억이 나요. 감독으로서 어려운 경기를 앞두고 있으면 그때와 같은 마음으로 준비를 해요. 설사 실패를 하더라도 말이죠. 그래도 확률은 상당히 높다고 봐요. 절실하게 하고 집중하고 준비하면 이뤄진다는 생각을 항상 해요."

▲ 4강 진출 확정의 순간

스스로 인정하는 드라마틱 축구 인생

황선홍. 한국 축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역대 A매치 출전 횟수로는 12위(103경기)에 올라 있고, 득점 부문에서는 '차붐' 차범근(67) 전 수원 삼성 감독(136경기 58골)에 이어 역대 2위(50골)를 기록 중이다. 월드컵 4강이라는 빛나는 성과도 붙어 있다.

하지만, 그의 축구 인생을 되짚어보면 기쁨보다는 고난의 순간이 많았다. 부상도 잦았고 팬들의 환호만큼 비난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았을 축구 인생, 그래도 황 감독은 현역 시절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성공은 물론이고 고난의 순간마저도 사람으로서 성장하는 소중한 경험이었으므로.

"드라마틱해요. 저는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살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게 됐어요. 우여곡절도 많았고 힘들었어요. 잘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았으니까요. 지도자 생활하면서도 똑같지만, 축구를 하면서도 힘들었어요. 삶이란 다 그런 것 같아요. 꼭 축구를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 어려운 일도 있을 것이고, 그만둘 때도 있고, 그런 것들을 축구에서 밟아온 것 같다고 생각해요. 그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 더 단단해지고 어려운 일을 겪어도 차분하게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한테는 소중한 추억이자 경험이니까요. 어려움은 있었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준비했던 것이 결실을 봤으니 좋았다고 생각해요."

한국 공격수의 계보를 이었던 황새였기에 환희와 고통은 공존했다. 어쩌면 공격수의 길을 걷기 시작한 순간부터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책으로 쓰라면 '공격수개론' 정도는 충분히 낼 수 있을 정도로.

<③에서 계속…>

스포티비뉴스=대전, 유현태 기자 이성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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