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8 프랑스월드컵 멕시코전에서 하석주가 선제골을 넣고 동유상철-고종수-김태영(이상 왼쪽부터) 등 동료들과 함께 기뻐하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편집자 주) 스포티비뉴스는 지난 3일부터 '나의 A-스토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축구대표팀 경기에 목마른 팬들을 위해 '마스크맨' 김태영(천안시 축구단 감독)을 시작으로 '조헤아' 조현우(울산 현대) 골키퍼, '진돗개' 허정무(대전 하나시티즌 이사장), '황새' 황선홍(대전 하나시티즌 감독) 등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축구계 인사들을 소환해 과거 경기를 회상하고 무용담(?)도 나누고 있습니다. 축구대표팀을 흔히 A대표팀이라 부르고 'A'라는 단어에는 '최고', '최상위'라는 개념이 녹아 있습니다. 연재를 거듭하면서 A를 구성하는 다양한 인물을 만나달라는 독자 분들의 이메일, 댓글 등이 생각 이상으로 쏟아졌습니다. 이에 부응하기 위해 그 폭을 넓히려 애쓰겠습니다. 전, 현직 선수는 물론 이들의 뒷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있는 주변인까지 두루두루 만나 전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스포티비뉴스=수원, 박주성 기자 이성필 기자] "초등학교부터 축구를 시작해 (프랑스월드컵 전후로) 퇴장을 당해본 적이 없어요."

'왼발의 달인'으로 불리는 그에게 1998 프랑스월드컵 멕시코전 백태클 퇴장은 평생 지우기 어려운 기록으로 남았다. 한국과 일본 프로리그에서 뛰면서 경고 누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했던 경험이야 있어도 직접 퇴장은 겪어보지 않았기에 더 억울했다.

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온 국민이 그의 왼발 프리킥 골과 백태클로 '가린샤 클럽(골을 넣은 뒤 바로 퇴장당했던 브라질 전설 가린샤에게서 유래된 말)'에 가입하는 것을 봤기에, 1-0으로 앞서던 경기가 그가 빠지면서 1-3으로 바뀌며 한국 축구의 소원이었던 원정 월드컵 첫 승과 16강 진출을 수포로 만들었기에 죄인 된 마음으로 살아야 했다.

멕시코전 백태클 퇴장, 오랜 시간 죄책감 가져…"아직도 그 장면 제대로 안 봤어요"

폭우가 쏟아지던 지난 23일 수원 아주대학교 축구부 숙소에서 만난 하석주(52) 감독은 지겹지만, 평생 들어야 하는 프랑스월드컵 이야기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월드컵 기간도 아닌데 왜 만나러 오셨느냐"라며 "월드컵 시기마다 인터뷰를 참 많이 했다"라고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담담하죠. 골 넣은 것보다 퇴장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알아요. 근데 처음에는 그 이야기를 정말 쉽게 못 했어요. 재미있는 것은 (월드컵이 끝나고) 22년이 흘렀는데도 듣고 있다는 겁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그 이야기를 해요. '그때 기분 어땠냐'라고 물어보면 처음에 말하지 못하다가 시간이 좀 지나면 제가 (패배의)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억울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차피 벌어진 일이었으니까요."

프랑스월드컵 대표팀은 아시아 예선에서 승승장구했다. '도쿄대첩'으로 불리는 일본 도쿄 원정 2-1 역전승 등 기억에 남는 경기들도 많이 치렀다. 차범근(67) 당시 대표팀 감독의 인기도 하늘을 찔렀다. 적어도 월드컵 전까지는 말이다. 네덜란드에 0-5로 대패한 뒤 '부정적인 여론'을 앞세워 차 감독을 중도 해임하는 데 하 감독의 백태클 퇴장은 분명 나비효과였다.

"항상 축구 팬들과 차 감독님에게 죄송한 마음이 있어요. 동료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때 제가 퇴장을 당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지 모르니까요. 정말 오랜 시간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어요. 지금도 그런 것이 항상 마음속에 죄송함, 미안함이 많아요."

하 감독은 2018 러시아월드컵을 앞두고 한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차 감독을 만나 울면서 사과했다. 당시 그는 전라남도 영광에서 아주대 축구부를 이끌고 대회 참가 중이었는데 '무조건 올라오라'는 제작진의 강권에 정신없이 가서 차 감독을 만나 프랑스월드컵의 아픔을 치유했다.

"솔직히 그 화면(백태클 장면)은 어쩌다 지나가면서 본 것밖에 없어요. 아직도 한 번을 제대로 안 봤어요. 경기 자체를 안 봤다고 하는 것이 맞아요. 백태클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으니 퇴장도 당해본 적이 없고요. 축구 팬들이 하석주는 시원시원한 축구를 한다는 그런 좋은 평가가 있지만 (월드컵 이후) 굉장히 욕도 많이 먹었고 팬들끼리도 서로 싸우게 했어요. 그 당시 지금처럼 인터넷이 없었으니까 팬들끼리 싸웠던 거죠. 어쨌든 정말 큰 사건으로 인해 늘 월드컵이 열리고 한국 선수가 퇴장당해 패하면 그 선수의 마음을 잘 알게 되더라고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시계가 하 감독에게 있다면 당연히 프랑스전 백태클 전으로 가지 않았을까. 골 잘 넣었으니 태클 대신 몸싸움을 하던가 다른 방법으로 대응해 극복하는 것이다. 그날의 경기 후 선수대기실 역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풍경이기 때문이다.

"퇴장당하니까 관중석에 앉지도 못하고 선수대기실로 들어가라고 하더군요. 텔레비전도 없었으니 들어가서 혼자 앉아 있는데 별생각이 다 나더군요. 퇴장 당해도 이기는 경우가 있을지 몰라서 작은 희망을 가졌거든요. 슈팅에서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면 함성이 크게 나왔다가 줄어드는데 골이 들어가면 큰 소리가 났었어요. 세 번의 엄청난 소리가 났는데 별 생각이 다 들더라구요. 1-3으로 지고 있거나 2-2로 가고 있거나 싶었던 거죠. 물론 우리가 3골을 다 넣었을리는 없었기에 제발 2-2 무승부라도 되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경기 종료 후) 차 감독님을 비롯해 선수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오더군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 백태클로 퇴장 당하자 얼굴을 감싸며 나가는 하석주, 그는 "경험 부족이 컸다"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홀로 선수대기실에 남아 관중의 함성만 들어 "무승부라도 되기를 바랐다"

하 감독이 프랑스월드컵에서 승리를 갈구했던 이유는 4년 전의 아쉬움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무더위를 안고 싸웠던 1994 미국월드컵. 하 감독은 교체 요원으로 뛰었다. 벤치에서 경기가 돌아가는 것을 보다가 투입됐다. 스페인과 조별리그 1차전 후반 29분 노정윤을 대신이 들어갔고 볼리비아와 2차전은 후반 19부 서정원과 교체로 투입됐다. 독일과 3차전은 벤치에서 대회를 끝냈다.

가장 아쉬움 남는 경기는 볼리비아전이었다. 후반 추가시간 하 감독은 두 번의 슈팅 기회를 얻었다. 황선홍(52, 현 대전 하나시티즌 감독)이 아크 오른쪽으로 침투하는 자신에게 절묘한 패스를 연결했고 그대로 왼발로 슈팅했는데 하필 골키퍼 손에 걸렸다. 이어진 공격에서 수비가 걷어낸 볼을 페널티지역 정면 뒤에서 잡았는데 슈팅한 것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이후 '아시아의 삼손' 김주성(54)에게도 한 번 기회가 왔지만, 무위에 그쳤다.

"미국월드컵에서는 무조건 (16강에) 갔어야 했어요. 가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가 저 때문이 아닐까 싶었어요. 볼리비아전 추가시간에 있었던 슈팅 기회에서 넣었으면 16강에 가는 거였어요. 해외에서 축구를 경험하고 월드컵에 갔다면 긴장하지 않았을 텐데 아쉬웠어요. 그 상황에서 그렇게밖에 못했나 싶었던거에요. 긴장을 많이 했어요. 해외 진출을 빨리했었다면 그 상황에서 툭 밀어서 골을 넣지 않았을까요. 얼마나 힘이 들어갔으면 넘어졌겠어요."

물론 볼리비아전 비판 지분 90%은 황선홍이 가지고 갔다. 황 감독은 스포티비뉴스와 인터뷰에서 "매국노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라고 한 바 있다. 허공으로 난사한 슈팅이 골문 안으로만 향했다면 역사는 180도 달라졌을 것이라 그렇다. 독일전에서 골을 넣고도 기쁨 대신 성난 포효를 한 것이 그랬다.

"(황)선홍이가 계속 '*볼'(하 감독의 표현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똥볼) 차고 그랬잖아요. 추가시간 슈팅 기회에서 선홍이가 패스했었거든요. 그것을 넣었으면 서로 아무것도 없이 좋았을 텐데 결국 못 넣었으니까요. 미국월드컵은 우리가 무조건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것이 날씨가 유리했거든요. 영상 38~40(℃)도까지 올라갔는데 외국 선수들은 그런 날씨에 경기해보지 않았지만,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했었으니까요. 도핑 테스트받으러 갔더니 스페인 선수는 얼굴이 완전 익어서는 '살면서 이런 경기는 처음 해봤다'라고 하더군요. 반면에 우리 선수들은 잘 뛰었어요. 스페인, 독일 모두 시간만 더 있었으면 이겼을 거에요. 우리가 경험이 없어서 그랬지 있었다면 충분히 16강에 가는 성적을 거둘 수 있었을겁니다."

그래서 4년이 지난 프랑스월드컵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라는 빡빡한 상대들이 기다렸지만, 유벤투스, AC밀란(이상 이탈리아) 등 국가대표급 클럽팀과 친선경기도 치렀고 스웨덴, 덴마크, 슬로바키아, 유고 등을 경험하며 유럽에 대한 면역력을 키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결과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솔직히 거기(프랑스)에 있으면서 한국에 귀국하면 돌이나 칼에 맞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왜 그렇지 않나요. 한일전 중계 시청하시다가 패하면 심장마비로 돌아가시는 분들이 많았으니까요. 나이 드신 분들이 흥분하면 그런 경우가 있었으니까요. 또는 TV를 집어 던지던가요."

당시 국제축구연맹(FIFA)의 판정 기준을 명확하게 습득하지 못했던 것도 아쉬움으로 꼽힌다. 백태클을 하면 경고 아닌 직접 퇴장도 가능하다는 것, 하 감독의 백태클이 소위 시범 사례였고 그 이후에는 비슷한 사례에서 경고로 끝났기에 억울함은 컸다.

"원래 직접 퇴장은 2경기 출전 징계인데 1경기로 바뀌더라고요. 처음에는 퇴장 후 (제 월드컵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네덜란드전에 0-5로 지고 나서도 미칠 것 같더군요. 얼굴을 들지 못했어요. (황)선홍이도 다쳐서 같이 벤치에서 봤는데 너무 실력 차이도 크게 나고 분위기도 좀 그랬어요. 벨기에전에 제가 뛸 수 있다고 해서 뛰었지만, 겁이 나더군요. 퇴장이 계속 생각났으니까요. 그런데 선수들이 옆에서 모두 '이렇게 무너질 수 없다. 마지막으로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자'라고 하더군요. 그 소리를 듣고 죽을 듯이 뛰었어요. 눈물이 났구요. (유상철의 동점골에 왼발 프리킥으로) 도움도 했었지만, 이임생도 (이마가) 깨질 정도로 정말 열심히들 뛰었어요."

▲ 1994 미국월드컵에서 교체 선수로 뛰었던 하석주는 1998 프랑스월드컵에서는 주전으로 뛰었다. 사진은 멕시코전 당시 선발진. 아랫줄 왼쪽 두 번째가 하석주다.

"1994 미국월드컵 볼리비아전 마지막 슈팅만 골이 됐었어도…"

하 감독은 벨기에전에서 0-1로 지고 있던 후반 27분 왼쪽 측면에서 김태영(50, 현 천안시청 감독)이 만든 프리킥의 키커로 나서 왼발로 강하게 연결했고 유상철(49, 현 인천 유나이티드 명예 감독)이 넘어지며 동점골로 연결했다. 벨기에 벤치는 차갑게 식었지만, 우리 벤치는 환호로 뒤덮였다. '붉은악마'와 '태극전사'라는 수식어 원천인 '투혼'이 발휘됐기 때문이다. 16강 진출이야 일찌감치 좌절됐지만, 한국 축구가 좋아하는 '유종의 미'를 거뒀기 때문이다.

"한국에 와서 어디 숨어 있다가 (소속팀이 있는) 일본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두려웠거든요. 모자를 쓰고 돌아다녔는데 약을 지어야 해서 경동시장에 가족들과 갔는데 누가 저를 알아봐서 사람들에게 둘러쌓였어요. 그런데 막 사인을 요청하더니 사진을 찍어달라데요. 힘내라는 말도 들었어요. 욕을 할 줄 알았는데 '심판이 너무했다'는 등 저를 위로해주더라구요. 경기 순간에는 욕을 했겠지만, 저를 안쓰럽게 생각하지 않았나 싶었는데 정말 고마웠죠. 눈물이 나더라고요."

국민적 관심을 받았던 대표팀이라, 태극기를 가슴에 새기고 뛰었기에 실수 한 번에 엄청난 비난은 감수하고 살아야 했던 시절이다. 도피까지 생각해야 할 정도로.

"그런 일도 있었어요. 모자를 쓰고 서울 시내 어느 식당에서 식사하는데 다른 자리에서 젊은 사람 4명이 '하석주는 한 골 넣고 세 골을 준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래서 지금의 모든 관심사는 제게 있다고 느꼈죠. 저라도 충분히 욕을 했을 것에요. 그래서 겸허히 받아들이고 후배들이 그런 상황이 되지 않길 바라고 있어요. 그런 상황이 나오면 제가 잘 아니까요.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해 더 심해졌잖아요. 미국월드컵에서 콜롬비아 선수(안드레스 에스코바르)가 (자책골을 넣어서 귀국 후) 총격으로 사망했잖아요. 예를 들어 1993년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일본에 패한 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귀국하면 다 죽이겠다는 이야기가 많았거든요. 수영해서 오라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정말 분위기가 삭막했죠. 일본이 이라크에 비기는 바람에 우리가 본선에 갔지만, 늘 영웅이 있으면 역적도 있게 마련이에요. 축구는 실수의 스포츠라는 점에서 더 가슴 아픈 일이에요.

혹독함을 겪어봤기에 하 감독은 태극마크를 달고 뛰는 순간에는 최선을 다했다. 2002 한일월드컵으로 가는 길에 있었던 A매치에는 늘 목숨을 걸었다. 특히 한일전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②편에 계속…>


스포티비뉴스=수원, 박주성 기자 이성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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