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전 득점 후 환하게 웃는 하석주 ⓒ대한축구협회

▲ 하석주 감독의 미소 ⓒ대한축구협회

(편집자 주) 스포티비뉴스는 지난 3일부터 '나의 A-스토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축구대표팀 경기에 목마른 팬들을 위해 '마스크맨' 김태영(천안시 축구단 감독)을 시작으로 '조헤아' 조현우(울산 현대) 골키퍼, '진돗개' 허정무(대전 하나시티즌 이사장), '황새' 황선홍(대전 하나시티즌 감독) 등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축구계 인사들을 소환해 과거 경기를 회상하고 무용담(?)도 나누고 있습니다. 축구대표팀을 흔히 A대표팀이라 부르고 'A'라는 단어에는 '최고', '최상위'라는 개념이 녹아 있습니다. 연재를 거듭하면서 A를 구성하는 다양한 인물을 만나달라는 독자 분들의 이메일, 댓글 등이 생각 이상으로 쏟아졌습니다. 이에 부응하기 위해 그 폭을 넓히려 애쓰겠습니다. , 현직 선수는 물론 이들의 뒷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있는 주변인까지 두루두루 만나 전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간절했던 하석주, 마침내 환하게 웃다

하나님부처님천주교알라신이고 뭐고 모든 신들에게 나 한번만 도와달라고 기도했어요그 당시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도 기도를 했죠.”

[스포티비뉴스=수원, 박주성 기자 이성필 기자하석주(52, 현 아주대학교 감독) 하면 ‘왼발의 달인’, 1998 프랑스월드컵 멕시코전 ‘백태클 퇴장’이라는 두 가지 꼬리표가 평생 따라다닌다. 당시는 요즘처럼 스마트폰만 꺼내면 전 세계 모든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지만 2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꼬리표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석주 본인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 전 국민의 입에 오르고 내렸던 하석주. 일반인이라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고통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 감독을 ‘왼발의 달인’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국민들에게 많은 감동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2000년 4월 26일 7만여 관중이 가득 찬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은 하 감독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장소다. 멕시코전 악몽 이후 축구 팬들 앞에서 가장 환하게 웃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위해 만났던 하 감독의 감독실에도 유일하게 있는 사진이 이 경기에서 골을 넣은 후 모습이었다. 하석주 감독은 이 경기를 자신의 인생 최고의 경기로 꼽았다. 최악은 물론 모두가 알고 있는 그 경기다.

"그때가 7만 관중이 가득 차 있을 때에요. 허정무 감독이 경질이냐, 필립 트루시에 감독이 경질이냐 그 상황이었죠. 우리와 일본 모두 해외파를 총집합해 잠실에서 경기했는데 7만 관중이 꽉 차고 분위기가 삭막했어요. 경기 전날 운동을 하는데 나는 지는 별이었고, 이영표가 뜨는 별이었죠. 그런데 한일전은 경험이 중요하고 내가 또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어서 잘 아니까 나를 선발로 넣더라고요. 부담이 어마어마하게 됐죠. 1998년이 생각났어요."

그래서 하 감독은 곁에 없는 아버지를 애타게 찾았다고 한다. 그것도 부족해 세상의 모든 종교를 다 끌어왔다.

"그날 저녁부터 아침까지 하나님, 부처님, 천주교, 알라신이고 뭐고 모든 신한테 나 한 번만 도와달라고 기도했어요. 그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한테도 기도했어요. 아버지에게 ‘내가 잘해준 거 하나 없지만 나 한 번만 도와달라’고 했죠. 진짜 간절했거든요. 그런데 골이 들어가는 상황도 묘했던 것이 그게 원래 들어가는 게 아니었어요. 상대 선수에 맞는 게 당연했는데 희한하게 피해서 바깥 발에 맞고 살짝 휘어서 골대 맞고 들어갔어요. 그때 내 간절함이 통했다고 생각했죠. 친선경기여도 한일전은 비중이 크잖아요? 이 경기가 제 최고의 경기입니다. 반대로 최악의 경기는 역시 98년 월드컵 멕시코전이고요.”

하 감독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선수들은 경기 전부터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다. 한일전처럼 비중이 큰 경기는 더욱더 그렇다. 막상 경기에 들어가면 긴장은 눈 녹듯 사라지지만 그 경기를 준비하는 과정이 선수들에게는 정말 힘든 시간이다. 특히 저녁에 경기하게 되면 당일 아침부터 피할 수 없는 긴장의 시간이 시작된다.

"사람들이 많으면 신나죠. 또 관중이 많으면 위축되는 사람들도 있어요. 저도 1991년에 대표팀 생활을 시작할 때는 엄청나게 콩닥콩닥하고 긴장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사람이 없으면 신이 안 나더라고요. 비중 있는 경기들은 관중이 가득 차는데, 선수들 모두 골을 넣고 세리머니 멋있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거예요. 보통 경기 1시간 30분 전에 경기장에 도착하는데 그때면 관중이 절반 정도 찼을 때죠. 바깥에 나와서 산책하고 들어와서 테이핑하고 준비하면 2/3 정도 관중이 들어와요. 그리고 준비 운동을 끝내고 들어와서 경기하려고 나가면 관중이 꽉 차 있죠. 우리는 경기할 때는 하나도 안 떨리는데 경기하기 전까지가 너무 힘들어요."

차라리 낮 경기면 조금이라도 빨리 매를 맞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A매치는 TV 시청층이 가장 주목하는 야간에 열리게 마련이다. 저녁 7시 시작이 보통이지만, 최근에는 8시, 더 늦으면 9시에도 시작한다. 

"야간 경기를 하면 아침부터 긴장이 됩니다. 화장실에 자주 가는 선수들도 많죠. 그런 선수들이 정말 많아요. 비중이 있는 한일전의 경우 스트레스를 받는 선수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다들 밥은 많이 안 먹고 소식했어요. 감독이나 코칭스태프는 더 심했겠죠. 보는 사람들은 그런 게 없지만, 선수들은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어요. 야간 경기면 오전에 체조하고 밥 먹고, 3시 반에 간식 먹고 준비해서 사우나 가고 찬물에 있다가 나와서 경기를 가는데 경기할 때는 하나도 긴장이 안 되는데 경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정말 긴장되더라고요.”

▲ 마라도나와 경합하는 하석주 ⓒ대한축구협회

▲ 1997년 대표팀

왼발의 달인하석주와 윙백의 운명적 만남

왼발의 달인으로 불렸던 하 감독은 골, 도움 모두가 가능했던 멀티플레이어였다. 그런 득점력은 사실 그가 공격수로 축구를 시작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공격 본능을 풀백 자리에서도 발휘했고, 그를 한국 역대 최고의 풀백으로 평가받을 수 있게 했다. 하 감독과 풀백의 만남은 운명적 만남이었다.

"처음에 윙포워드, 스트라이커도 봤는데 6년 정도 지나서 갑자기 부산 대우 로얄즈 조광래 감독님이(현 대구FC 대표이사) 저에게 왼쪽 측면 수비수를 맡기더라고요. 그 당시 윙백들은 공격적으로 많이 나갔죠. 윙백을 하니까 재밌는 자리더라고요. 공간을 두고 침투할 수도 있고, 공을 갖고 드리블하면서 상대를 제칠 수도 있었죠. 윙백인 나와 일대일 하는 사람이 상대 측면 공격수인데 대부분 수비력이 좋지 않거든요. 그렇게 제치는 재미가 좋았죠. 그러면서 그쪽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대표팀에 발탁, 계속 왼쪽을 보게 됐어요.”

하 감독의 날카로운 킥은 당시 최전방에서 뛰던 공격수들에게는 반가운 선물이었다. 왼쪽 측면에서 올라온 크로스(당시엔 센터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들은 대표팀의 가장 큰 무기였다. 그가 많은 도움을 기록했던 것도 날카로운 킥 능력과 함께 이를 해결해준 공격수들이 있어 가능했다. 하석주 감독에게 가장 호흡이 잘 맞았던 선수를 묻자 선한 미소를 지었다.

“(최)용수도 그렇고, (김)도훈도 그렇고, (황)선홍이는 부상을 너무 많이 당해서…용수랑 호흡이 제일 잘 맞았어요. 세트피스에서는 (유)상철이가 수비하다가 올라가고 그랬죠. 실질적으로 크로스나 프리킥, 세트피스를 찰 때 정확히 자기를 보고 올려주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자기들은 ‘형 내 앞으로 줘’라고 하죠. 어쨌든 가장 골이 잘 들어가는 지역에 공을 올려주면 그건 누가 들어가도 골이 됩니다. 킥은 강하게 차려고 하면 실수가 잦아져요. 탄도가 일정해야 하죠. 킥 연습할 때도 너무 높이는 안 가고 항상 일정하게 차려고 했어요. 그쪽으로 킥을 하면 짤라 들어가면서 용수나 상철이가 세트피스에서 골을 많이 넣었죠. 걔네들은 내가 직접 보고 정확히 준 것으로 알고 있는데 킥이 그렇게 정확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대강 그 정도 올려 주는 거지.”

하 감독은 A대표팀에서 95경기 23골을 기록했다. 전문 공격수가 아닌 풀백, 윙백을 소화하는 선수로는 많은 득점이다. 대우 로얄즈(현 부산 아이파크) 시절에도 많은 골을 넣었다. 부산(1990-1996년)과 포항 스틸러스(2001-2003년)에서 활약했던 그는 258경기에서 45골 25도움을 기록했다. 하 감독은 어떤 골이 가장 기억에 남을까. 하 감독은 여러 골을 신나게 이야기하면서 잠시 그 시절로 돌아갔다.

"프로리그에서는 97년도에 대우가 3관왕 할 때가 있었어요. 아디다스컵, 프로스펙스컵, 리그까지 3관왕을 했죠. 차만 3대를 받았어요. 라노스, 마티즈, 레간자를 받았는데 당시 대우가 어려우니까 돈을 안 주고 차를 준 거 같아요. 아디다스컵에선 우리가 4위였는데 1위 팀을 꺾고 2-3위 승리 팀을 꺾고 골득실차로 역전 우승을 했어요. 그때 성남 일화와 경기를 했는데 제가 멋있게 골을 넣었죠. 그걸 넣으면서 팀이 우승하는 기쁨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어요. 대표팀에서는 이집트전에서 첫 번째 다이빙 헤딩골 넣고 페널티킥도 넣어 득점왕과 MVP를 받았을 때에요. 그다음에 한일전 골도 있고, 98년도 프리킥 골은 생각하기도 싫어요. 또 디에고 마라도나 내한 당시 보카 주니어스랑 했는데 7만 관중이 꽉 찬 경기장에서 헤딩골을 넣었어요. 그 골도 굉장히 기억에 남아요. 마라도나 때문에 7만 관중이 꽉 찼죠. 1997년도 월드컵 예선 아랍에미리트전(UAE)에서는 잠실에서 결승골을 넣어서 이겼는데 기억에 많아요.”

▲ 히딩크 감독 ⓒ대한축구협회

▲ 2001 컨페더레이션스컵 프랑스전에 출전한 하석주

2002 한일월드컵 뛸 뻔했던 하석주? 100경기를 채우지 못한 이유

1991년부터 대표팀에서 활약한 하 감독은 2001년 대표팀에서 은퇴할 때까지 정상급 활약을 보여주며 대표팀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굵게 남겼다. 하지만, 하 감독의 대표팀 기록은 95경기로 5경기가 부족해 센추리클럽(*A매치 100경기 출전)에 가입하지 못했다. 이유는 올림픽 와일드카드 차출이었다.

“(홍)명보와 나는 대표팀에서 가장 부상이 없고 한 번도 탈락한 적이 없었어요. 당연히 100경기를 해야 했는데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와일드카드를 나가는 바람에 한 8경기를 뛰지 못했어요. 전 그때 그 경기들도 다 A매치로 포함되는 줄 알았어요. 나중에 보니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아시안컵에 나갈 때 한국에서 평가전 2경기 치르고 현지에 가서 6-7경기를 하잖아요. 그때 뛰었다면 충분히 100경기를 하는 거였겠죠. 황선홍, 나, 이임생이 거기로 가는 바람에 100경기를 못 채웠죠. A매치를 100경기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대표팀만 생각하면 항상 백태클만 떠올라서….”

'선수 하석주'는 2001년 대표팀에서 물러났다. 많은 사람은 그가 거스 히딩크 감독과 함께 뛰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하 감독은 월드컵을 1년 앞둔 2001년, 개최국에서 열리는 컨페너레이션스컵(대륙간컵)에도 출전해 히딩크 감독의 신임을 받았다. 하석주는 2002 영웅의 일원이 될 수도 있었지만 무심한 세월과 백태클 트라우마가 그를 붙잡았다.

"이집트 4개국 대회에서도 우승하고 골도 넣었어요. 솔직히 히딩크 감독이 있었을 때 컨페더레이션스컵에도 나갔지만, 저는 대표팀 축구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어요. 1998년 백태클 퇴장 때문에 그렇죠. 1998년에 대표팀 은퇴를 하려고 했다가 선후배들, 팬들이 그래도 아직 더 할 수 있으니까 더 해줘야 한다고 해서 꾸역꾸역했죠. 2000년도 한일전에서 골을 넣고 마음이 위안이 많이 됐어요. 4개국 대회에서도 선발이 돼 경기도 잘했어요. 우승도 했죠. 그런데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체력이 안 됐어요. 이영표, 이을용 이런 선수들도 있었고 제가 끝까지 간다고 해서 대표팀에 뽑힌다는 보장도 없었죠. 저도 욕심은 있지만 내가 해가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박항서 코치님에게 얘기를 했어요. 대표팀에서는 제가 여러 가지 힘든 상황이라 은퇴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죠. 그래서 박 코치님이 히딩크 감독에게 이야기를 했고 마지막 경기가 됐어요.”

그가 족적을 남긴 대표팀에는 왼발의 계보가 있다. 하석주, 고종수, 이을용, 염기훈 그리고 이강인까지. 여기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양발잡이로 무시무시한 왼발을 가진 손흥민도 있다. 하석주 감독은 이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편에 계속>

스포티비뉴스=수원, 박주성 기자 이성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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