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젠 골키퍼 전문 코치로 유소년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는 김용대.
(편집자 주) 스포티비뉴스는 지난 3일부터 '나의 A-스토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축구대표팀 경기에 목마른 팬들을 위해 김태영(천안시 축구단 감독)을 시작으로 조현우(울산 현대) 골키퍼, 허정무(대전 하나시티즌 이사장), 황선홍(대전 하나시티즌 감독), 서정원(전 수원 삼성 감독), 하석주(아주대 감독) 등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축구계 인사들을 소환해 과거 경기를 회상하고 무용담(?)도 나누고 있습니다. 축구대표팀을 흔히 A대표팀이라 부르고 'A'라는 단어에는 '최고', '최상위'라는 개념이 녹아 있습니다. 연재를 거듭하면서 A를 구성하는 다양한 인물을 만나달라는 독자 분들의 이메일, 댓글 등이 생각 이상으로 쏟아졌습니다. 이에 부응하기 위해 그 폭을 넓히려 애쓰겠습니다. 전, 현직 선수는 물론 이들의 뒷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있는 주변인까지 두루두루 만나 전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스포티비뉴스=잠실, 유현태 기자 이성필 기자] 2000년 4월 첫 A매치를 치렀다. 그리고 2013년 3월 마지막으로 한국 축구 대표팀의 부름을 받았다. 그 긴 세월 동안 대표팀에 꾸준히 드나들었지만, A매치 통산 출전은 21경기. 메이저 대회 본선에 나선 것은 2000년 10월 중국전이 유일하다. 바로 골키퍼 '용대사르' 김용대(41)의 기록이다. 일찌감치 주목을 받았던 점을 고려하면 대표팀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던 셈.

그래서 붙은 별명이 '영원한 2인자'다. 실력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정상으로 이끌었던 에드윈 판 데르 사르(50)와 비슷해 그렇다. 차이는 판 데르 사르는 대표팀에서도 1인자였다. 김용대도 1인자로 치고 올라오고 싶지만, 차세대 수문장으로 주목을 받던 시절엔 이운재(47)와 김병지(50)라는 하늘 같은 선배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는 시점이 됐을 때는 '유망주 골키퍼' 김용대도 30대에 접어들었다. 그 역시 다음 세대의 도전을 받아야 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잠실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용대는 그 누구도 달갑지 않을 '2인자' 별명을 웃어넘겼다. 그리고 악의 없이 "소속 팀에선 늘 1인자"였다며 별명을 조심스레 바꿔놨다. K리그에서만 460경기에 출전한 전설의 항변은 그랬다. 대표팀에선 도저히 넘어서지 못할 것만 같았던 이운재의 K리그 통산 기록이 410경기 출전이니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경기에 나설 수 있는 골키퍼는 단 1명. '1인자' 김용대를 늘 '2인자'로 만들었던 대표팀 시절은, 김용대 본인에게 어떻게 기억에 남아 있을까. 김용대는 이제 대표팀도 소중한 추억이라며 웃는다. 대표팀이 있었기에 소속 팀에서도 더 잘할 수 있었고, 또, 축구 선수로서도 발전했기 때문이라고.

▲ 2002년 월드컵 8강에서 호아킨의 페널티킥을 막았던 이운재(오른쪽). 4강 신화의 주역이다.

◆ 유망주 골키퍼 앞엔 '전설 2명'이 있었다.

김용대는 20세 이하, 23세 이하 팀에서 확고한 주전으로 활약했고, 연세대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A대표팀에 소집됐다. A대표팀 입성까지 '초고속'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김병지, 이운재라는 거목들이 대표팀의 골문을 지키고 있었다. 소속 팀에서 변변한 골키퍼 코치도 없이 훈련했던 김용대에겐 경쟁과 동시에 배움의 장이었다.

"(연세)대학교 재학 시절 (대표팀에) 처음 갔어요. (이)운재 형이나 (김)병지 형이나 선배들을 보기만 해도 좋았거든요. 남이 훈련을 하는 걸 보는 것도 훈련이라고 하더라고요. 잘하는 형들을 보는 것만으로 도움이 되던데요. 두 분은 키가 좀 작아요. 키 큰 사람과 다른 장단점이 있어요. 키 작은 선수의 장점을 흡수하면 더 좋은 선수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캐칭, 다이빙, 위치 선정, 판단 등을 계속 봤어요. 똑같이 하는 게 아니라 실험을 해보는 거죠. 나름대로 연구를 해서 내 색깔에 맞추는 것이죠."

이운재는 안정감에서, 김병지는 빠른 발을 살린 넓은 활동량에서 장점을 발휘했다. 김용대는 상대적으로 작은 키인 두 선배의 움직임을 잘 살폈다. 자신이 훔칠 수 있는 장점은 훔치려고 했다.

"운재 형은 안전을 추구해요. 무게감이 있고 기본기도 아주 잘 돼 있어요. 원래는 필드 선수였어요. 빌드업도 좋고 킥도 좋아요. 나갈 때 나가고, 안정적으로 해야 할 땐 안정적으로 하고. 모험은 잘 안 하시죠. 병지 형도 기본기가 좋고 스피드가 있으니까 활동 범위가 아주 넓어요. 다른 사람이 보기엔 조금 불안해 보이기도 하죠. 막 튀어 나가니까. 그런데 스피드가 없으면 그렇게 나가지도 못해요. 자기 장점을 최대한 살린 것으로 봐야죠."

다만 무조건 '따 라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김용대의 신체 조건과 성향은 이운재, 김병지와 달랐다. 자신에게 맞는지 확인한 뒤 배울 수 있는 것은 배우고, 스타일에 맞지 않는 것은 과감하게 버려야 했다.

"한 선수만 닮는 게 아니에요. 형들의 장단점 가운데 보고 나한테 맞는 걸 배우는 거죠. 키 작은 사람은 속도, 탄력, 판단력에서 앞설 수가 있죠. 키 큰 사람이 그걸 따라가려면 조금 더 나아져야 해요. 그걸 배워가면 키 큰 골키퍼도 업그레이드가 되는 거죠."

김용대 역시 자신의 장단점을 알고 있었다. 189cm로 경쟁자들보다 훌쩍 큰 키에, 안정적인 캐칭 능력이 장점이었다. 그렇게 '기본기에 강한 골키퍼'가 돼 갔다.

"캐칭, 공중볼 처리에서 남들보다 열심히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죠. 훈련에서 계속 잡는 연습을 했어요. 다양한 상황을 경험하게 되면 판단이 서더라고요. 경기 땐 안전하게 하고. 공을 쳐 내더라도 측면으로 내보내고. 캐칭과 공중볼에 대해선 최고가 되어보자고 했죠. 남들 쳐 낼 때 잡아내면 멋지지 않나요(웃음)."

▲ 2000년 아시안컵 중국전에 나선 김용대(오른쪽 뒤에서 두 번째)

◆ NO.2 골키퍼가 '자존감'을 지키는 법

김용대는 자신의 A매치 출전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2000년 4월 한일전을 꼽았다. 한일전이 주는 특유의 열기 속에서도 김용대는 제 몫을 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비록 2002년 월드컵 본선 최종 명단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이후 꾸준히 대표팀 발탁을 노리는 선수가 됐다.

"대학교 1학년이었나. 한일전이 있었어요. 제가 경기에 나가는 게 아니었어요. 병지 형이랑 같은 방을 쓴 시절인데 허리를 다쳐서 못 일어나더라고요. 저밖에 없으니까 다음 경기를 뛰었죠. 2002년 월드컵 때 형들이 다 계셨어요. 1-0으로 이겼는데 정말 기억에 많이 남는다. 준비도 많이 못 했는데 이겼죠. 한일전은 정말 중요한 경기 아닌가요. 상암도 아니고 잠실이었어요. 당시 경기장이 꽉 차서 사람들이 다 들어오지도 못했어요. 그때가 제일 기억에 많이 남아요. 어찌 보면 병지 형이 다친 게 저한테는 좋은 일이었죠. 그때 이후로 팬레터도 많이 늘고 팬들도 늘었거든요.(웃음)"

K리그에선 꾸준히 활약하며 자신의 진가를 입증했다. 하지만 대표팀에선 안정적인 활약을 펼친 이운재의 벽을 넘기가 쉽지 않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4강 신화의 주역이었던 이운재는, 풍부한 경험까지 더해가며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도 골문을 책임졌다. 김용대는 선배의 활약을 지켜보며 묵묵히 뒤를 지켰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 출전하진 못했지만) 사실 계속 뒤에 있어서 내성이 생긴 것 같더라고요.(웃음) 계속 운재 형이 잘했기 때문에 나가는 건 당연했죠. 옆에서 간절히 준비하면서 기도했어요.(웃음) 저희야 못 나가서 속상하지만, 2006년에 불러준 이유도 제가 잘해서라고 생각해서 감사하게 여겼어요. 열심히 훈련했고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 파이팅도 넣고 응원도 많이 했어요. 하나의 팀이 되려고 했죠. 경기에 나가면 좋은 거고, 그렇지 않더라도 감사히 생각하고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16강 갈 수 있었는데 아까웠죠."

그래서 '2인자'라는 수식어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 대표팀에 발탁되는 것은 한국 최고로 우뚝 서는 '과정'의 일부일 수도 있지만, 그 자체가 기량을 인정받은 '결과'라 그렇다. 김용대는 자신을 '1인자'였다고도 자신 있게 표현했다. 김용대는 K리그에선 부산 아이파크, 성남 일화, FC서울, 울산 현대에서 뛰면서 K리그 우승 3회, FA컵 우승 3회를 기록했다.

"(2인자라는 별명이) 화가 나고 짜증 나기도 했어요. 대표팀 경력은 긴데, '2번(세컨드 골키퍼)'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어요. 대표팀에선 두 번째라도 소속 팀에서는 첫 번째 아닌가요. 그렇게 하면 꼭 '1인자'가 아니더라도 (대표팀에서) 불러주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이에요. 대표팀에서 쓰지 않는다고 짜증 내면 저에게만 손해에요. 소속 팀에서 1번 자리를 굳히고, 대표팀에서 불러주시면 열심히 하고. 이렇게 올라오는 것도 거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경기에 못 나간다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저만 손해에요. 후배들에게도 대표팀 가서 짧게 선수 생활하지 말고, 대표팀에 가지 못하더라도 프로 생활 롱런하라고 말하죠. 그게 승자라고. 또 군대 빼고 선수 생활 짧게 하는 것보다, 군대 다녀와서 선수 생활 길게 하는 게 낫다고도 해요. (이)동국이 봐요. 지금 군대 다녀와서 오래 하니까 승자 아닌가요.(웃음) 안 다치고 선수 생활 오래오래 하라고 말해줍니다. 은퇴하면 더 힘들다고요."

그래서 시간이 준 불운 역시 단단히 넘길 수 있었다. 확고한 주전 이운재의 입지가 흔들리던 2008년 이미 김용대도 30대에 접어들었다. 골키퍼에도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었고, 자연스럽게 떠오르던 신예 정성룡이 주전 골리로 도약했다. 정성룡(35, 가와사키 프론탈레)은 2010 남아공월드컵 예선부터 주전으로 활약하며 2014년 브라질월드컵까지 한국의 골문을 책임졌다. 김용대의 마지막 A매치 출전은 2008년 5월 남아공월드컵 3차 예선 요르단전(2-2 무)이다.

"세대교체였죠. 운재 형 다음에 저 그리고 김영광(37, 성남FC)이었어요. 여기서 저와 (김)영광이는 빠지고, (정)성룡이로 가버렸어요. 군대를 제대하고 30대가 됐는데 성룡이 세대가 됐어요. 프로에서 선수 생활 오래하자고 생각했죠. 한 번씩 불러주면 좋은 거고 꾸준히 열심히 하면서 가치를 보여주자고 생각했어요. 대표팀에 가는 것은 잘해서 불러주는 거고, 주는 소속 팀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잘하면 또 불러주니까요. 플러스 알파로 생각했고요. 대표팀에 가면 좋고 그것이 목표지만, 팀에서 가치를 보여줘야 선발될 수 있으니까요. 코칭스태프도 다 경기를 보고 있잖아요."

▲ 서울 시절의 김용대.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트로피가 없는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2013년 우승 문턱에서 무너졌다.

◆ 김승규vs조현우 "실력 차이는 없다"

이제 김용대는 골키퍼 전문 코치로서 유소년 선수들을 가르치고 있다. 자신이 선수 생활을 하면서 쌓은 경험을 후배 세대와 공유하기 위해서다. 지도자가 된 김용대의 눈에 현재 벤투호에서 경쟁을 펼치는 김승규(30, 가시와 레이솔)와 조현우(29, 울산 현대)의 경쟁 구도는 어떨까.

"김승규나 조현우는 톱클래스 선수죠. 선택권은 상대 팀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요. 한 끗 차이다. 상대에 맞춰서, 감독의 전술과 색에 맞춰 골키퍼를 기용하니까요. 둘이선 누가 잘하고 못하고는 없는 것 같아요. 누가 나가더라도 잘하는 선수들이에요. 워낙에 잘하고 있어요. 영원한 주전은 없으니 믿음에 부응하면 되는 것 같아요."

최근 후방부터 세밀한 빌드업을 강조하는 벤투호의 스타일에서 골키퍼의 임무도 달라졌다. 골키퍼 역시 적극적으로 패스 흐름에 관여해야 한다. 이른바 '발밑 기술'의 중요성이 높아진 이유다. 김용대 역시 "현대 축구에선 골키퍼는 그저 골키퍼가 아니라 최종 수비다. 빌드업도 잘해야 한다. 그게 하나의 전술이다. 흐름이 그렇다. 골키퍼도 최종 수비수처럼 공을 돌리면서 비중이 커졌다. 골키퍼도 필드 훈련을 함께 시키고 볼 돌리기도 같이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김승규와 조현우의 발기술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김)승규는 일본에 가서 늘었어요. 무조건 잘해야 하죠. 일본은 골키퍼도 티키타카를 하니까요. 현우도 일본에 조만간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웃음) 티키타카를 좀 배우고 돌아와야 할 것 같아요. 일본은 공격수가 압박해서 싸더라도 풀어 나오더라고요. 한국에선 압박에 쌓이면 골키퍼는 무조건 멀리 걷어내라고 하거든요. 수비수들이 푸는 능력이 떨어지면 골키퍼도 풀어나갈 수가 없어요. 일본에선 계속 그런 걸 배웠지 않나 싶어요."

선배 선수로서 대한민국 최고의 골키퍼들에게 하나의 과제도 줬다. 바로 큰 무대로 나가서 경험을 하길 바란다는 것. 아직은 성사된 적 없는 한국 골키퍼들의 유럽 빅리그 또는 중급 리그 진출이다. 2009년 권정혁이 핀란드 리그에 진출한 경험이 있지만, 상위 리그는 아니었다.

"골키퍼도 많이 나갔으면 좋겠어요. 일본도 그렇지만 유럽에 많이 나가서 대한민국 골키퍼들이 잘한다는 게 알려지면 좋겠어요. 일본에서 (권)순태, (정)성룡이, 승규가 잘하지 않나요. 계속 일본에서 한국 골키퍼를 영입하려고 하잖아요. 한국 골키퍼가 가서 유럽에서 잘하면 인식이 바뀌고 찾게 될 것 같아요. 많은 경험을 하게 되면 골키퍼가 정말 큰 몫을 할 수 있으니까요. 배운 노하우를 어린 친구들한테도 가르쳐주면 좋겠어요. 지도자 하시는 분들도 배우지만, 직접 선수들이 배우는 건 또 다르니까요."

도대체 김용대는 어떤 노하우로 골키퍼를 육성하려는 것일까.

스포티비뉴스=잠실, 유현태 기자 이성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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