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기현의 슈팅
▲ 포효하는 설기현

(편집자 주) 스포티비뉴스는 지난 3일부터 '나의 A-스토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축구대표팀 경기에 목마른 팬들을 위해 김태영(천안시 축구단 감독)을 시작으로 조현우(울산 현대) 골키퍼, 허정무(대전 하나시티즌 이사장), 황선홍(대전 하나시티즌 감독), 서정원(전 수원 삼성 감독), 하석주(아주대 감독) 등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축구계 인사들을 소환해 과거 경기를 회상하고 무용담(?)도 나누고 있습니다. 축구대표팀을 흔히 A대표팀이라 부르고 'A'라는 단어에는 '최고', '최상위'라는 개념이 녹아 있습니다. 연재를 거듭하면서 A를 구성하는 다양한 인물을 만나달라는 독자 분들의 이메일, 댓글 등이 생각 이상으로 쏟아졌습니다. 이에 부응하기 위해 그 폭을 넓히려 애쓰겠습니다. , 현직 선수는 물론 이들의 뒷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있는 주변인까지 두루두루 만나 전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스포티비뉴스=신문로, 박주성 기자 이성필 기자] 2002 한일월드컵은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를 넘어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한 사건이었다. 늘 축구 변방에 있던 한국이 월드컵을 개최했고, 4강이라는 믿을 수 없는 성적을 낸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경기를 꼽자면 단연 16강전을 꼽는다. '빗장 수비'로 대표되는 전통의 축구 명가 이탈리아를 상대했고 연장 혈투 끝 8강에 진출했다. 스포츠가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경기였다.

2002 월드컵의 기적, 설기현을 바꾸다

이 경기는 연장 후반 12분 '테리우스' 안정환(44)의 골든골로 승리했다. 이영표(43)의 크로스를 안정환이 방향만 살짝 바꾸는 헤더로 철벽같은 잔루이지 부폰(42, 유벤투스)을 뚫었다. 하지만 안정환의 골이 나오기 전, 후반 43분 설기현(41)의 골이 없었다면 태극전사의 여정은 월드컵 최초 16강 진출에서 마침표를 찍었을 것이다. 스물셋 설기현은 어떻게 생의 첫 월드컵에서 맹활약할 수 있었을까. 설기현 감독은 담담하게 18년 전 어느 때보다 붉고 뜨거웠던 여름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일월드컵 조별리그에서 거의 풀타임을 뛰었고 기회도 많았어요. 그때 우스갯소리로 ‘내가 기회에서 골을 다 넣었다면 호나우두와 득점왕 경쟁을 했을 텐데’라고 말하기도 했죠. 기회가 많았는데 아쉬웠습니다. 골을 더 넣었다면 더 좋은 역할을 했을 거예요. 어쨌든 이탈리아전에 골이 들어가서 인생골이 됐습니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다. 후반 43분, 황선홍(52)이 올려준 크로스를 페널티지역 안에 있던 수비수 크리스티안 파누치(47)가 제대로 걷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공이 팔에 맞아 불안하게 떨어졌는데 이를 설기현이 지체하지 않고 바로 슈팅으로 연결해 골망을 흔들었다. 설기현은 핸드볼을 주장하며 바이런 모레노(51) 주심을 바라보는 불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았고, 공에만 집중하며 극적인 동점골로 기적의 씨앗을 심었다.

“그날 주심은 파울이 나오면 그 장면이 지나가도 불었습니다. 제 슈팅이 골대를 넘기면 페널티킥을 불겠디고 생각했어요. 제가 이걸 골대 안에 못 넣어도 페널티킥을 불겠다는 느낌이 있어 자신 있게 찼는데 생각과 달리 어설프게 맞더라고요. 그런데 제대로 맞췄으면 부폰이 반응을 했을 텐데 어설프게 맞아 반응을 못 했습니다. 그렇게 결국 골이 됐죠. 그래도 자신 있게 차서 들어간 것 같습니다. 슈팅할 때 길이 딱 보였어요. 부폰은 방향을 예측을 못 해 엉거주춤 서 있었습니다.”

경기는 굉장히 치열했다. 경기 종료 2분을 남기고 동점골을 내준 이탈리아는 약이 올라 더욱 거세게 한국을 몰아붙였다. 위기의 순간은 쉴 틈 없이 찾아왔다. 설기현도 불과 30분 만에 영웅에서 역적이 될 뻔했다. 연장전 수비 상황에서 뒤꿈치로 공을 걷어내려다가 쇄도하던 젠나로 가투소(42)에게 공을 빼앗긴 것이다. 다행히 이운재(47)가 슈퍼세이브로 막아 위기를 넘겼고, 안정환의 골까지 나올 수 있었다. 설 감독은 여전히 그 장면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기억납니다. (이)운재 형한테 욕 엄청나게 먹었습니다. 저를 죽일 듯이 쳐다봤죠. 그거 먹혔으면 모든 게 끝나는 것이었어요. 운재 형이 정말 잘했었어요.” (설기현의 골이 있었기에 안정환도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거군요?) “누가 영웅이 되는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골을 넣었다는 게 중요하죠.(웃음)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정환이 형의 골든골이 정말 멋지게 들어갔습니다.”

설 감독은 한일월드컵에서 얻은 자신감으로 한 단계 더 올라설 수 있었다. 월드컵을 마친 후 벨기에 명문 안더레흐트로 복귀한 설 감독은 완전히 다른 선수로 변신했다. 2002-03 시즌 43경기에서 13골을 넣었고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UCL) 예선에도 활약했다. 한국인 첫 UCL 골도 설 감독이 달성했다. 이런 활약으로 발롱도르 50인 후보에 포함되기도 했다. 벨기에 언론들은 설기현이 다른 선수가 됐다고 난리였다.

“한일월드컵이 끝난 후 벨기에에 갔을 때 자신감이 많이 생겼습니다. 벨기에에서 깜짝 놀라더라고요. 다들 ‘설(Seol)’이 작년과 너무 달라졌다고 했습니다. 감독 인터뷰를 하면 꼭 나왔던 질문이 ‘설기현이 왜 이렇게 변했나?’였습니다. 감독 본인도 작년에는 훈련 전에 책만 보던 선수였는데 뭐가 그를 바꿨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어요. 그때부터 축구를 재밌게 했습니다. 월드컵 골이 그런 계기가 됐죠.

▲ 설기현과 비에이라

▲ 아쉬웠던 스위스전

아쉬웠던 2006 월드컵, “16강 갈 줄 알았죠

기적 같은 2002 월드컵이 끝난 후 첫 월드컵은 독일에서 열렸다. 4강에서 독일을 만나 탈락했던 것처럼 독일 월드컵은 쉬운 대회가 아니었다. 토고와 1차전에서는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며 4년 전의 감격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프랑스와 2차전에서도 극적인 동점골로 승리와 같은 무승부를 거뒀다. 이 경기에서 설기현은 달리면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올리는 러닝 가로지르기(크로스)로 동점골을 만들었다.

“요즘은 축구 스타일이 예전과 달라진 것 같아요. 예전에는 윙들이 최대한 벌려놓고 크로스를 하면서 마무리했는데 지금은 전술적으로 플레이를 해요. 풀백이 나갈 수 있도록 많이 올라가서 중앙에 들어가 있죠. 그러다 보니 그렇게 뛰어서 크로스를 올리는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적어졌습니다. 예전처럼 전형적인 윙어가 많이 없어졌죠. 우리 때는 정말 간단하게 했어요. 돌파 후 크로스를 올려주면 피지컬 좋은 선수들이 마무리하는 그런 축구를 했죠. 그때는 당연히 그런 축구였고 자신이 있었어요.”

설 감독의 발을 떠난 볼은 폴짝 뛰어 오른 조재진(39)의 머리를 거쳐 박지성(39)의 발에 닿았다. 파비앙 바르테즈(49) 골키퍼가 손을 들어 올렸지만, 굴절되며 골문 안으로 꺾였다. 분노한 수비 윌리엄 갈라스(43)는 허공으로 볼을 차버렸다. 설 감독의 기막힌 판단이 귀중한 동점골로 이어진 셈이다.

“프랑스 골의 지분은 33.3%씩 나눠 가진 것 같아요. (박)지성이의 마무리도 어려웠고, 크로스가 살짝 길었는데 조재진도 머리로 잘 떨어트렸죠. 특별한 공격 옵션을 찾지 못했던 때였습니다. 교체로 들어갔는데 상대 풀백이 지친 것이 보였어요. 돌파에 자신이 있었죠. 내가 좋아하는 플레이였습니다. 그때 딕 아드보카트(73) 감독님이 적절한 타이밍에 넣은 것도 있었어요. 그게 들어가서 프랑스에는 큰 타격이었죠. 프랑스는 우리를 쉽게 이길 거로 생각했을 거예요.”

프랑스전에서 극적인 무승부를 거두며 한국은 1승1무로 16강 진출의 희망을 키웠다. 마지막 상대는 역시 1승1무를 거둔 스위스였다. 무조건 이겨야 16강에 가는 외나무다리에서 상대를 만난 모습이었다. 하지만 경기는 0-2 완패였다. 오프사이드 논란까지 겹치며 한국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한일월드컵 4강 진출 그리고 2006 월드컵 16강 진출 실패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였다.

“스위스전이 아쉬웠죠. 사실 스위스가 그렇게 잘하는 팀이 아니었습니다. 스위스는 우리가 이길 거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특별한 선수가 없었죠. 하지만 스위스에 지는 바람에 1, 2차전 잘해놓고 탈락하게 됐습니다. 16강에 갈 줄 알았습니다. 스위스가 팀으로선 단단했어요. 아쉬움이 큰 대회였습니다. 결국 축구는 기회에서 결정을 짓는 싸움이에요. 경기력도 중요하지만, 토너먼트에서는 변수가 많죠. 프랑스는 결국 결승까지 갔어요. 약팀들은 잘하다가 어느 순간 ‘뭐지?’ 하는 그런 게 있습니다. 우리가 그랬던 것 같아요. 여유롭게 플레이를 해야 했는데 아쉽습니다.”


▲ 설기현 경남 감독 ⓒ한국프로축구연맹

감독이 된 설기현, “신기하고 재밌습니다

설기현은 2010년 포항 스틸러스로 오면서 해외 생활을 마쳤다. 이후 울산 현대, 인천 유나이티드를 거쳐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2015년 성균관대학교 감독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초보 감독으로 많은 것들을 처음부터 배운 그는 마침내 2019년 경남FC의 제안을 받으면서 프로 감독이 됐다. 초보 감독 설기현은 아직도 많은 것들이 신기하고 재밌다. 배울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처음 유럽 나갔을 때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잘해야겠다는 부담 없이 신기하고 재밌고 그렇습니다. 감독을 하게 된 것도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거예요. 때로는 스트레스도 받는데 감독으로서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새롭고 배워지는 게 많죠. 현실과 많이 다르구나 느낍니다. 잘되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게 감독으로서 특별해질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혼란스러운 것들도 있는데 그게 정리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래도 설 감독에게 지도자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선수 시절과는 다른 어려움과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굉장히 재밌습니다. 재미라는 게 스트레스도 있어야 하죠. 새로운 걸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뭔가 계속 흥미가 생깁니다. 너무 스트레스가 된다면 그건 제 능력 밖의 일인 거죠. 아직 거기까진 아닙니다. 그래서 할만해요. 가끔 내 나름대로 생각을 합니다. 여기서 감독으로서 도전하기 위해서 외국에서 다양한 경험을 했던 것 같아요. 열심히 하고 있는데 선수 하다 감독하니 완전히 다른 분야에요. 선수는 혼자 잘하면 되는데 감독은 완전히 달라요. 나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선수가 잘해야 하죠. 그래서 제 생각대로 안 될 때가 많습니다. 8개월 정도 됐는데 처음과 지금은 완전히 다릅니다.”

설 감독은 경남을 맡고 역대급 승격 경쟁을 펼치고 있다. 현재 순위는 승점 25점으로 리그 4위. 초보 감독 설기현은 어떤 지도자가 되고 싶을까?


<편에서 계속>

스포티비뉴스=신문로박주성 기자 이성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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