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8월, 박종우가 런던 올림픽 3,4위전 한일전 승리 뒤에 '독도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스포티비뉴스=부산, 박대성 기자 이성필 기자] 8년 전, 2012 런던 올림픽 남자 축구에 출전한 올림픽 축구대표팀은 홍명보 감독(51, 현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의 '원팀' 아래 한국 축구사(史) 최초 동메달에 성공했다. 다만, '독도남' 박종우(32, 부산 아이파크)에게는 만감이 교차하는 대회였다.

딱 부러지게 정의할 수 없다. 기쁨과 아쉬움이 공존했다. 브라질과 4강전을 제외하고, B조 조별리그 첫 경기(멕시코전)부터 동메달 결정전이었던 한일전까지 모두 뛰었지만, 시상대에 오를 수 없었다. 한일전 승리 뒤 세리머니가 문제였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헌장 50조 '올림픽에서 정치적·종교적·인종차별적 선동행위를 금지한다'는 규정으로 스포츠중재재판소(CAS) 판결을 기다렸다.

▲ 2012년, 한국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 동메달을 목에 건 홍명보호

홍명보의 원 팀, 누구도 두렵지 않았다

홍명보호는 B조에서 시작했다. 멕시코, 스위스, 가봉을 뚫고 8강에 올라가는 것이 중요했다. 멕시코에는 엑토르 에레라(30,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라울 히메네스(29, 울버햄튼)가 있었고, 가봉에는 현 프리미어리그 최고 공격수 피에르-에메릭 오바메양(31, 아스널)이 있었다.

세계 최고 유망주가 모였지만, 두렵지 않았다. 예선부터 다져온 조직력으로 세계와 맞섰다. "연령별 대표팀이라 그런지 할 만했다. 상대 팀은 중요하지 않았다. 탄력 있는 남미와 아프리카 팀은 까다로웠지만 어렵지 않았다"라는 말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홍명보호는 조별리그를 거치며 자신감이 붙었다. 애런 램지(30, 유벤투스), 대니 로즈(30, 뉴캐슬 유나이티드), 톰 클레버리(31, 왓포드), 다니엘 스터리지(31, 트라브존스포르), 라이언 긱스(47, 현 웨일스 감독), 크레이그 벨라미(41, 현 안더레흐트 21세 이하팀 감독) 등 이름값 있던 프리미어리거가 포진한 영국 연합팀과 8강전에도 기죽지 않았다.

경기 전, 홍명보 감독은 "긱스? 동갑내기다. 나와 친구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초반에 베테랑 골키퍼 정성룡(35, 가와사키 프론탈레), 측면 수비수 김창수(35, 광주FC)가 부상으로 이탈했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교체 카드 이범영(31, 전북 현대)과 오재석(30, 나고야 그램퍼스)이 빠르게 녹아들면서 새로운 원 팀이 됐다. 한국은 180분 혈투 끝에 승부차기로 4강 진출에 성공했다.

세계의 벽을 차례로 무너트렸지만, '삼바 리듬' 브라질 파악은 어려웠다. 네이마르(28, 파리 생제르맹)는 다리가 세 개처럼 보였고, 현란한 발기술로 수비를 괴롭혔다. 두 명이 막아도 기어코 뚫어내 '멘탈 붕괴' 상황이었다. 벤치에서 브라질전을 본 박종우가 이렇게 말할 정도였으니, 그라운드 위에서 뛴 선수들은 오죽했을까.

"나와 (박)주영이 형 앞에서 조끼를 입고 몸 푸는 선수를 봤다. 엄청 굵은 종아리였다. 다시 보니 헐크(34, 상하이 상강)였다. 경기장에서는 오스카(29 상하이 상강), 티아고 실바(36, 첼시) 등 세계적인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휘저었다. 우리가 위축된 감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 치열했던 한일전, 박종우(오른쪽 아래)가 일본 올림픽 대표팀과 볼 다툼을 준비하고 있다

결승 진출 실패, 동메달은 한일전에 달렸다

"4강은 부담도 있었고, 의욕도 앞섰다. 3·4위전 한일전이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한다. 병역 혜택이란 큰 기회도 있는데, 일본과 맞대결은 절대 질 수 없었다. 한일전은 동메달 결정전에서 하늘이 준 기회였다."

브라질전 패배는 한일전 투지로 바뀌었다. 모두가 결승처럼 집중했다.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홍명보호는 "절대 지면 안 된다. 일본에 진다면 국민들이 분노할 것"이라며 패배는 곧 죽음이란 각오로 준비했다.

경기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볼 다툼은 절대 피하지 말고, 상대를 부수자고 다짐했다. 간절한 투지는 득점으로 바뀌었다. 전반 38분 박주영(35, FC서울)이 일본 수비를 벗겨낸 뒤 감각적인 슈팅으로 골망을 뒤흔들었다. 생각보다 일찍 터진 선제골에 유리한 경기 운영을 할 수 있었다.

전술 대응과 노림수까지 적중했다. 양 팀 벤치가 가까운 카디프 밀레니엄 스타디움의 특징을 그대로 활용했다. 일본어에 능통한 홍 감독이 상대 지시를 듣고 곧바로 대응했다. 피치 위에는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선수들이 있었고 심지어 일본인인 이케다 세이고 피지컬 코치도 있었다. 벤치와 그라운드 호흡이 척척 맞았다. 런던 올림픽 동메달은 치밀한 전략과 일본의 모든 걸 통제한 결과였다.

"우리의 전투력은 200%였다. 한일전은 어떤 경기보다 동기부여가 강했다. 전날 예상한 일본의 전술 변화까지 적중했다. 일본은 전술적으로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길 가능성이 컸던 경기다. 이른 선제골도 큰 도움이 됐다."

▲ 박종우는 '독도 세리머니'로 동메달 수여가 보류. IOC 제재로 시상대에 오를 수도 없었다

'독도는 우리땅', 동메달 시상대에 박종우는 없었다

홍명보호는 라이벌 일본을 꺾고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8월15일 광복절을 나흘 앞두고 이룬 쾌거였다. 경기 하루 전 이명박(79) 전 대통령이 전격 독도를 방문해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얻은 기쁨이었다. 선수들은 숙적을 잡고 한국 축구 역사를 만들었다는 기쁨에 준비했던 만세 삼창을 했다.

박종우도 동료들과 행복했다. 기성용(31, FC서울)이 태극기를 두르고 경기장을 돌자, 따라가 승리를 만끽했다. 그때 관중석에서 어떤 팬이 '종우야!'라고 외쳤다. 바라보니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적힌 피켓을 던졌다. 땅에 떨어져 있으니 자연스럽게 주워 들어 올렸다. 

"맞는 말이었다. 어릴 때부터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배웠다. 그냥 들고 봤으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텐데, 2층에 일본 서포터가 보였다. 한글이라 읽지도 못할 텐데 일본 서포터들에게 들고 보여줬다."

대략 다섯 걸음 정도 걸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전 세계 카메라에 '독도 세리머니'가 담겼다. 당시 조중연(74) 대한축구협회 회장과 지원 스태프가 "안 된다"고 소리치자 깜짝 놀라 피켓을 내려놨고, 대형 태극기 주위를 도는 동료에게 돌아가 한일전과 동메달 기쁨을 즐겼다.

IOC는 박종우 행동이 정치적 행위라고 판단했다. IOC 헌장 50조 '올림픽에서 정치적·종교적·인종차별적 선동행위를 금지한다'는 규정으로 동메달 수여를 보류했다. 박종우는 4강전을 제외하고 전 경기에 출장했지만, 동메달을 목에 걸 수 없었다. 현장 요원들은 브라질-멕시코 결승전이 끝난 뒤 시상식에서 시상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웸블리 스타디움 꼭대기로 데려갔다.

"IOC 위원들이 어딘가로 가야 한다 했다. 시상대와 가장 떨어진 곳에서 봐야 한다더라. 당시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멕시코와 브라질 팬들이 앞에서 환호하고 있었다. 어딘가 소외된 느낌이었다. 힘들었다. 나중에 홍 감독님도 마음이 아팠다고 하셨다."

▲ 박주영, 기성용(왼쪽부터)과 함께했던 한일전 승리 세리머니. 박종우는 6개월 만에야 웃었다.
▲ 홍명보 감독 중심으로 똘똘 뭉쳤던 런던 올림픽대표팀. 조용한 엔진 역할을 했던 박종우(오른쪽)

CAS 재판, 6개월 만에 동메달 수여

귀국길에서 독도 세리머니 효과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일본 기자들이 런던 히드로 공항에 진을 치고 있었다. 보안 요원들의 제재에 여행객처럼 위장해 몰래 박종우를 찍는 무리도 있었다.

한국에 도착해서도 박종우는 예외였다. 올림픽 동메달 환영사보다 독도 세리머니에 더 시선이 집중됐다. 언론의 관심을 피하는 것이 필요했고 동료들과 다른 출구로 공항을 빠져나갔다. 불쌍한 느낌을 받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켰는데 부재중 500통의 전화, 메시지 800개가 와 있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올림픽 환영식보다 박종우 이름이 도배됐다. "그때 실감 났다"라는 한 마디에서 그날의 감정을 알 수 있었다.

세리머니의 정치적 판단은 CAS로 넘어갔다. 재판을 받으면서도 축구에 몰두하려 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심리적 불안으로 경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주변에서 걱정스러운 말들까지 부담스러웠다.

"평생 법정을 갈 일이 없었다. 국내에서 법정을 가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재판을 위해서 스위스에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재판까지 많이 초조했다. 모든 것이 집중되지 않았다. 힘들었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를 기억하는 축구협회 관계자는 "(박)종우에게 CAS에서는 사실 그 자체만을 말하라고 교육했다. 다만, 감정적으로 필요한 부분에서는 가감 없이 말하라고 했다. 세계가 박종우를 주시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정당한 메달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그랬다. (박)종우도 피곤함이 역력했다"라고 전했다.

CAS는 다각도에서 찍힌 독도 세리머니를 검토했다. 조중연 전 회장이 박종우에게 '안돼, 내려'라고 외쳤을 때 깜짝 놀란 사진이 있었다. 이 사진이 박종우의 행동을 우발적이라고 판단하는 결정적 자료가 됐다.

하지만 대형 태극기 위에 '독도는 우리땅' 피켓을 올려둔 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다. CAS는 태극기 위 피켓에 정치적 의도를 살폈다. 박종우는 "짧은 순간에 그런 판단을 할 정도로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아니다"라며 솔직하게 말했다. 동료들과 승리를 만끽하려 잠시 던져둔 것뿐이라는 걸 설명했다. 진정성을 위해 편지까지 썼다.

대위원장의 마지막 질문이 있었다. "길을 걷는데 일본인이 그 사건으로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하면 뭐라고 할거냐"라고 물었다. 박종우는 "계획적이지 않았다. 우발적이었다. 당신에게 피해가 갔다면 미안하고 사과를 하겠다"라고 말했고 6개월 만에 동메달 수여가 결정됐다. 동료들과 땀을 흘린 노력으로 얻은 것인데 의도적이었다는 일본의 논리는 말이 되지 않았다.

"참 우여곡절이 많았다. 정말 축구를 잘해서 얻은 이미지보다 몇 배는 강했을 것이다. 일반적인 이미지라면 말을 하고 다녔겠지만, 정치적인 것이 얽혀 조심스럽다. 메달을 받는 과정에서도 제재를 받았다. 축구 선수라 축구로 인정받았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지금은 괜찮다. 꽤 시간이 많이 지났다. 후회도 없다. 이제는 추억으로 간직하려 한다.”

그래도 한국을 대표하는 '애국지사(?)' 이미지가 생긴 것은 나쁘지 않았다. 그해 12월, 박종우는 친한 동료들과 봉사 모임인 '축구로 만드는 행복(추캥)'의 일원으로 경남 진해로 내려가 독도함에 올라 1박2일을 보냈다. 독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며 모든 것에 감사했다.

어쨌든 런던의 경험을 바탕으로 박종우는 2014 브라질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과정에 있었고 본선도 경험했다. 30대로 가는 과정에 큰 자산이었다.

<③편에서 계속…>

 스포티비뉴스=부산, 박대성 기자 이성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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