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용택 캐리커처 ⓒLG팬 김정택 화백 제공

[스포티비뉴스=이재국 기자]

“우리 학교에서 달리기 가장 잘하는 학생이 누구니?”

“박용택이요!”

“그럼 키 크고 운동신경이 가장 좋은 친구가 누구니?”

“박용택이요!”

“공부 잘하는 친구가 누구니?”

“박용택이요!”

1989년 11월 서울 강동구 명일동의 고명초등학교. 야구부를 창단한 최재호 감독(59·현 강릉고 감독)은 야구부원 모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야구선수로 적합한 학생을 찾기 위해 등교나 하교 때 지나가는 학생들을 붙잡고 이것저것 캐물었다. 그런데 뭐든 묻기만 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박용택”이었다.

“고명초 야구부가 창단될 때 박용택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어요. 키도 제일 컸고, 발도 가장 빨랐고, 공부도 잘했고, 영리했죠. 어릴 때부터 깔끔하고 예쁜 스타일이었는데, 가정교육도 잘 받아 모범생이었어요. 원래 오른손잡이인데 우투좌타를 시켰죠. 2루수 앞 땅볼만 때려도 1루에서 살았을 정도로 발이 빨랐으니까요.”

최재호 감독이 기억하는 박용택의 어린 시절 얘기다.

<최 감독은 훗날 덕수고와 신일고 감독으로 전국대회만 8차례 우승을 지휘해 ‘우승 제조기’가 됐다. 2016년 야구의 변방 강릉고 사령탑으로 부임한 뒤 올해 에이스 김진욱(롯데 2차 1라운드 지명)을 앞세워 대통령배 우승을 이끌면서 강원도 야구 역사상 첫 전국대회 우승의 이정표를 세워 다시 한 번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 강릉고 최재호 감독 ⓒ강릉, 이재국 기자
박용택은 최 감독의 말을 전해 듣고는 야구를 시작했던 그 시절로 기억의 태엽을 되감았다.

그는 “또래 친구들보다 키가 크고 달리기도 잘했던 것은 아버지를 닮아 성장이 빨랐기 때문이었다"면서 "중학교 1학년 때 키가 지금의 키라고 보면 된다”며 웃었다.

박용택의 아버지 박원근(74) 씨는 엘리트 농구선수 출신. 대경상고와 경희대를 나와 실업농구 한국은행에서 명가드로 활약하며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30대까지 선수생활을 하면서 장수했다.

“최재호 감독님이 그 시절 등하교 시에 저만 보면 붙잡아 앉혀놓고 ‘야구 하자’고 꼬셨어요. 아마 6~7개월을 따라다니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아들이 공부를 하기를 바라셨고, 아버지는 제가 농구를 했으면 하셨어요. 그러다가 5학년이 되고 1990년 6월 3일 야구를 시작하게 됐죠. 공교롭게도 2000경기 출장 날이 6월 3일이더라고요.”

매사에 ‘꼼꼼한’ 박용택은 자신이 야구를 시작한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 휘문고 시절 ⓒ박용택
운동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버지는 야구선수를 허락하는 조건으로 어린 아들에게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는 단단히 일렀다.

“한 번쯤 해본다는 생각으로 시작해서는 안 된다. 이제 야구를 하면 정말 야구선수로 들어가는 거다. 중간에 멈춰선 안 된다. 나중에 어른이 돼서 야구선수의 삶을 살아야 하고, 야구로 돈을 벌고, 야구로 가정을 꾸려야 한다. 야구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열두 살 어린 나이의 박용택은 아버지와 약속했고, 불혹을 넘어선 아들은 은퇴를 앞둔 지금까지 한순간도 그 약속의 끈을 놓지 않았다.

#박용택 #엘지트윈스 #안타왕 #은퇴 #이별이야기

<2편에서 계속>

■ '안타왕' 박용택, 10가지 이별이야기?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그 공평한 시간은 야속하게도 우리에게 또 한 명의 레전드와 작별을 강요하고 있다. 2002년 데뷔해 2020년까지 줄무늬 유니폼 하나만을 입고 19시즌 동안 그라운드를 누빈 LG 트윈스 박용택(41). 수많은 기록과 추억을 뒤로 한 채 그는 약속대로 곧 우리 곁을 떠난다. 이제 선수로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를 그냥 떠나 보내자니 마음 한구석이 아리고 허전하다. ‘한국의 안타왕’ 박용택이 걸어온 길을 별명에 빗대 은퇴 전 10가지 에피소드 형식으로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연재물은 2018년 월간중앙 기고문과 기자의 SNS에 올린 글을 현 시점에 맞게 10가지 에피소드 형식으로 각색한 것입니다.

스포티비뉴스=이재국 기자


저작권자 © SPOTV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