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대 시절 박용택. ⓒ박용택 제공
[스포티비뉴스=이재국 기자]

“2억3000만 원이요? 저는 이 금액에 사인 못합니다.”

“아니, 구단이 그렇게 책정했다는데 신인이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냐. 그냥 사인하자.”

“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어떻게 제가 서승화 계약금 반 토막도 안 됩니까?”

2001년 가을, 입단 계약금을 놓고 LG와 줄다리기를 벌이던 고려대 4학년 박용택은 좀처럼 도장을 찍지 않았다. 계약 협상을 하던 LG 유지홍 스카우트는 햇병아리 신인 선수와 씨름을 해야 했다. 정확히 말하면 ‘신인’도 아닌, 대학 졸업을 앞둔 ‘지명 선수’였다.

박용택은 휘문고 졸업반이던 1997년 9월, ‘1998년 KBO 신인드래프트’에서 ‘연고지 고졸 우선지명’으로 LG의 선택을 받았다. 당시 LG 1차지명 선수는 연세대 포수 조인성. 3명까지 선택할 수 있는 연고지 고졸 우선지명 선수는 박용택과 더불어 신일고의 안치용, 배명고의 정현택이었다.

요즘엔 고졸 선수가 프로 구단에 지명받으면 당연하다는 듯 KBO리그에 직행하지만, 당시만 해도 야구 좀 하는 선수들 중에 대학을 가서 국가대표를 지낸 뒤 프로 구단에 입단하는 것을 로망으로 삼는 선수도 많았다. 안치용(연세대 진학)도 그랬고 박용택(고려대 진학)도 그랬다. 그래서 박용택의 LG 입단 협상 역시 고려대 졸업반이던 2001년 가을에 진행됐다.

“야야, 그냥 도장 찍자.”

“아니, 어떻게 제가 서승화 계약금 반 토막도 안 되냐고요?”

“서승화는 왼손 투수고 150㎞짜리 강속구를 던지는 유망주야. 메이저리그에서도 데려가려고 하니까 5억을 책정한 거라고.”

좀처럼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실랑이가 계속됐다.

동기 서승화는 대전고 졸업반 시절, 1998년 신인드래프트에서 2차지명 3라운드에 LG 지명을 받았다. 동국대로 진학한 서승화는 195㎝의 큰 키에서 4학년 때 시속 150가 넘는 강속구를 던져 주가가 치솟았다. ‘지옥에서도 데려온다’는 좌완 파이어볼러.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표적이 됐고, LG 역시 서승화를 잡기 위해선 거액의 계약금을 베팅할 수밖에 없었다.

▲ 후불제 계약을 성사시키며 LG에 입단한 박용택은 2002년 KBO리그에 데뷔하자마자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활약하기 시작했다. ⓒLG 트윈스 제공
“제가 계약금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까?”

박용택이 답답하다는 듯 먼저 운을 뗐다.

유지홍 스카우트는 고려대 출신의 직속 선배. 유 스카우트는 ‘임자 제대로 만났다’는 표정을 짓더니 후배에게 “한 가지 방법이 있다”고 제안했다.

“마무리캠프 가서 김성근 감독님 앞에서 실력을 보여줘. 감독님이 당장 내년에 주전으로 쓸 수 있는 선수라고 인정하면 구단에 얘기해서 계약금 올려줄게.”

“좋습니다. 그럼 마무리캠프 끝나고 다시 평가해 주세요. 구단이 그때 저를 1000만 원짜리 선수라고 판단하시면 저도 1000만 원만 받겠습니다. 대신 3억짜리 선수라고 평가하시면 3억 원 주세요.”

박용택은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참 당돌했다”며 웃었다.

“신인이 계약도 안 하고 마무리캠프에 가는 것도 이례적인데, 사실 그땐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어요. 마무리캠프 가서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매일매일 혼을 실어 훈련했던 것 같아요.”

2001시즌 초반 이광은 감독이 해임되면서 임시로 LG 지휘봉을 잡았던 김성근 감독대행은 시즌 종료 후 정식으로 LG 사령탑에 올랐다. 예나 지금이나 ‘지옥훈련’의 대명사. 김 감독은 11월 오키나와 마무리캠프가 끝나자 12월에 LG 선수단을 이끌고 '삼다도' 제주도로 넘어가 삭풍 속에서 훈련을 이어갔다.

그때 김 감독이 박용택을 불렀다.

“왜 아직 계약 안 하고 있냐?”

산전수전 다 겪은 김 감독도 신인 선수가 12월까지 계약도 하지 않은 채 구단 훈련에 참가하는 모습을 보곤 의아하게 여겼다.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리고 며칠 후, 유지홍 스카우트가 제주도로 날아왔다. 박용택과 마주앉았다.

▲ 당돌했던 신인 박용택은 KBO리그 최초로 2500안타를 돌파하면서 '한국의 안타왕'이 됐다. ⓒ곽혜미 기자
“감독님이 널 당장 주전으로 쓰겠다고 하신다. 그래서 계약금 7000만 원 더 올렸다. 이제 됐냐?”

선배는 후배에게 눈을 ‘찡긋’ 하면서 웃더니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금 3억 원. LG 야수 역사상 3위에 해당하는 계약금(1위는 1997년 이병규 4억4000만 원, 2위는 1998년 조인성 4억2000만 원)이었다.

프로야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후불제 계약’이었다. 신인 선수가 일단 물건의 쓰임새부터 먼저 보여주고 나중에 제값을 받은 셈이었다. 그런 자존심이 있었기에 수많은 별이 뜨고 지고 사라지는 험난한 프로야구 세계에서 불혹을 넘어 지금까지 살아남았는지 모른다.

어쩌면 박용택은 그때부터 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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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에서 계속>

■ '안타왕' 박용택, 10가지 이별이야기?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그 공평한 시간은 야속하게도 우리에게 또 한 명의 레전드와 작별을 강요하고 있다. 2002년 데뷔해 2020년까지 줄무늬 유니폼 하나만을 입고 19시즌 동안 그라운드를 누빈 LG 트윈스 박용택(41). 수많은 기록과 추억을 뒤로 한 채 그는 약속대로 곧 우리 곁을 떠난다. 이제 선수로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를 그냥 떠나 보내자니 마음 한구석이 아리고 허전하다. ‘한국의 안타왕’ 박용택이 걸어온 길을 별명에 빗대 은퇴 전 10가지 에피소드 형식으로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연재물은 2018년 월간중앙 기고문과 기자의 SNS에 올린 글을 현 시점에 맞게 10가지 에피소드 형식으로 각색한 것입니다.

스포티비뉴스=이재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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