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용택의 야구선수 생활은 노란 박스에 담겨있는 저 공들과 씨름한 세월이다. ⓒ곽혜미 기자
[스포티비뉴스=이재국 기자]

“세상에서 한 명의 스승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김용달 코치입니다.”

박용택은 틈날 때마다 김용달 코치(현 삼성 타격코치)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오늘날 자신을 만들어준 진정한 스승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작 김용달 타격코치가 LG에서 자신을 지도할 때는 충돌이 잦았다. 둘 다 타격에 관해 누구보다 많이 고민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양보가 없었다. 둘은 타격 이론을 놓고 늘 씨름을 해야만 했다.

김재박 감독 시절이던 2008년 여름, 세상이 온통 베이징올림픽 야구 금메달로 흥분해 있을 때였다. 박용택은 당시를 돌이켜 보며 “솔직히 난 베이징올림픽 야구를 단 한 경기도 보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해 타율 0.257(334타수 86안타)로 생애 최악의 성적에 그쳤다. 2002년 프로 데뷔 후 2018년까지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매년 세 자릿수 안타를 때려냈지만, 연도별 기록에서 유일하게 이빨이 빠진 것처럼 2008년 100안타에 도달하지 못했다.

“자존심이 상했어요. 난 여기서 뭐하고 있나 싶어 TV도 못 보겠더라고요.”

박용택은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때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4강 신화의 멤버가 됐다. 이종범 이병규 이진영 송지만과 더불어 외야수 5명에 포함됐다.

그러나 2008년 부진한 성적으로 베이징올림픽 대표팀에 승선하지 못했다. 박용택에게 타격 이론이 정립될 듯 말 듯 하던 시기. 성공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로만 올라가다 브레이크가 걸렸다. 성장통이 찾아왔다. 혼돈의 시기였다. KBO리그가 중단된 채 온 국민이 드라마 같은 올림픽 야구에 열광할 때 박용택은 TV조차 보지 않고 절치부심했다.

▲ 박용택의 젊은 시절 모습. 타격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 성장통의 시간을 겪었다. ⓒLG 트윈스
김용달 코치(현 삼성 타격코치)는 “박용택은 그 시절 빠른 배트 스피드와 힘으로 타격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 코치가 설명을 이어갔다.

“그러다 보니 좌타자인 박용택 타구는 오른쪽으로 많이 치우쳤다. 배트 헤드가 ‘인→아웃’이 돼야 하는데 ‘아웃→인’이 될 때가 많았다. 나는 임팩트 순간 센터(중견수)를 기준으로 방망이가 90도가 되는 게 이상적이라면서 박용택 스타일상 외야 어디로든 타구를 날릴 수 있는 스프레이 히터가 좋다고 했다. ‘좌중간을 보고 치라’고 주문을 많이 했다. 그러면서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올림픽이 끝나고 리그가 재개됐다. 박용택은 여전히 타격의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8월 어느 여름날, 김용달 코치는 야간경기 후 박용택을 이끌고 잠실구장 실내훈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노란색 플라스틱 박스에 담긴 공을 계속 올려줬다. 박용택은 말없이 방망이를 돌렸다. 모두가 퇴근한 야구장. 격한 타구음만이 실내훈련장의 적막을 깰 뿐이었다.

한 박스(250~300개의 공이 담겨 있다)의 공이 비워졌다. 김 코치가 훈련을 끝내려고 돌아서는 순간, 온몸이 땀으로 젖은 박용택이 소리쳤다.

“한 박스 더 치겠습니다.”

2박스를 쳤다.

“한 박스 더 치겠습니다.”

3박스, 4박스, 5박스….

오히려 김 코치가 속으로 ‘내일 게임도 있는데’라며 걱정했지만, 박용택은 독기에 찬 표정으로 “코치님이 치라는 대로 계속 치겠습니다”라며 고집을 피웠다. 황소고집이었다.

김 코치도 오기가 생겼다. 말없이 계속 공을 올렸다. 10박스쯤 쳤을까. 말이 열 박스지 2500개에서 3000개의 공을 쳤다는 의미다. 시계는 어느덧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박용택은 10월 6일 잠실 삼성전에서 KBO리그 최초 개인통산 2500안타를 기록했다. 박용택이 최고 스승으로 꼽는 삼성 김용달 코치가 축하를 하며 포옹하고 있다. ⓒ곽혜미 기자

그렇게 코치와 선수가 치열하게 씨름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용택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스승을 꼽으라면 김용달 코치님”이라고 말한다.

김 코치 역시 박용택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난 코치와 선수가 이론을 놓고 충돌하는 것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성공한 선수는 모두 고집이 있다. 과거 심정수도 그랬고, 송지만도 그랬다. 그들과도 정말 많이 씨름하고 싸웠다. 선수가 코치 얘기를 무조건 수긍한다고 해서 소통이 아니다. 코치가 선수 얘기를 무조건 들어 준다고 해서 소통이라고 할 수 없다. 서로 다른 의견을 놓고 정반합(正反合)을 찾아가는 게 진정한 소통 아니겠나.”

‘싸우면서 정든다’고 하는데, 이 둘의 관계를 보면 그 말이 딱 들어맞는다. 순응만이 고수로 가는 길은 아니다.

#박용택 #엘지트윈스 #안타왕 #은퇴 #이별이야기

<6편에서 계속>

■ '안타왕' 박용택, 10가지 이별이야기?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그 공평한 시간은 야속하게도 우리에게 또 한 명의 레전드와 작별을 강요하고 있다. 2002년 데뷔해 2020년까지 줄무늬 유니폼 하나만을 입고 19시즌 동안 그라운드를 누빈 LG 트윈스 박용택(41). 수많은 기록과 추억을 뒤로 한 채 그는 약속대로 곧 우리 곁을 떠난다. 이제 선수로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를 그냥 떠나 보내자니 마음 한구석이 아리고 허전하다. ‘한국의 안타왕’ 박용택이 걸어온 길을 별명에 빗대 은퇴 전 10가지 에피소드 형식으로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연재물은 2018년 월간중앙 기고문과 기자의 SNS에 올린 글을 현 시점에 맞게 10가지 에피소드 형식으로 각색한 것입니다.

스포티비뉴스=이재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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