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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국의 야구여행]'18년차 스페어'에게 온 선물…지석훈의 '할미꽃 인생'

네이버구독_201006 이재국 기자 keystone@spotvnews.co.kr 2020년 11월 23일 월요일

▲ NC 다이노스 지석훈이 21일 한국시리즈 4차전 9회초에 3-0으로 달아나는 2루타를 날린 뒤 덕아웃 동료들을 향해 V1 손가락 세리머니를 펼치고 있다. 프로 데뷔 18년 만에 생애 첫 한국시리즈 안타와 타점을 기록했다. ⓒ고척, 곽혜미 기자

[스포티비뉴스=이재국 기자] 화려하고 예쁜 꽃만 찾는 세상, 힘없이 허리 굽어 피어난 들판의 '할미꽃'에 누군들 관심이나 둘까.

지석훈. 2003년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했으니 프로 18년차다. 1984년생으로 우리나이 서른일곱. 자신도 모르게 어느덧 공룡 군단의 맏형이 됐다. 그러나 이번 한국시리즈 30명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의 이름 석 자에 주목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어쩌면 엔트리 맨 가장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NC 다이노스의 할미꽃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늘 꽃대를 숙인 채 살아왔던 할미꽃이 세상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21일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4차전. NC로선 3차전까지 1승2패로 뒤져 이날 경기마저 패한다면 그야말로 벼랑 끝이었다. 그 칼끝 같은 승부에서 NC는 팽팽한 투수전 속에 6회초 얻은 두 점을 지키며 2-0 살얼음판 리드를 이어갔다.

9회초 NC 마지막 공격. 두산은 3차전에서 깜짝 세이브를 올린 ‘파이어볼러’ 이승진을 7번째 투수로 올리면서 마지막 저항에 나섰다. 1점 더 내느냐, 막느냐의 싸움.

2사 후 애런 알테어가 좌전안타를 치고 나갔다. 타석에는 전날 손가락 부상으로 빠진 박석민을 대신해 9번 3루수로 선발출장한 지석훈이 등장했다. 통산 타율 0.225의 타자. 올 시즌엔 87경기에 출장했지만 이보다 더 떨어진 0.207(121타수 25안타)의 타율을 기록했다. 한국시리즈에서도 전날까지 6타수 무안타, 이날 앞선 3타석에서도 안타를 치지 못했다. 7회 세 번째 타석 1사 1루 상황에서 희생번트 같은 기습번트 작전을 수행한 것이 공격에서의 유일한 기여였다. NC 벤치도 2사가 되더라도 주자를 득점권에 두고 다음 타자 박민우에게 기대하는 것이 확률적으로 낫다고 본 것이었다.

9회 마지막 기회. 볼카운트 2B-2S까지 몰고 갔다. 5구째 몸쪽 높은 볼이 날아드는 순간, 알테어가 2루 도루에 성공했다.

이어 6구째 바깥쪽 시속 147㎞ 빠른 볼에 방망이를 돌렸다. 1루 관중석에 들어가는 파울. 7구째는 몸쪽 시속 147㎞ 직구. 3루 덕아웃 펜스로 향하는 파울.

속으로 기분이 좋았다.

“잘 치는 타자들은 파울이 되는 타구도 우리 같은 백업 선수들은 희한하게 파울플라이가 되거든요. 평소 같으면 저도 일찌감치 파울플라이로 아웃됐을 텐데, 이날따라 연속으로 2개가 파울이 되면서 살아났잖아요. 남들은 뭐라 할지 몰라도 저는 그 파울 때문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운이 따르는 날이라고 봤죠.”

▲ NC 다이노스 지석훈 ⓒ곽혜미 기자
고난의 세월을 견뎌온 메마른 억새 같은 눈빛. 다음 공을 기다리는 표정은 인상파 배우처럼 자못 비장했다.

8구째 시속 146㎞짜리 몸쪽 높은 공. 방망이는 바람개비처럼 가볍게 돌았고, 배트에 귀퉁이를 강타당한 타구는 둔탁한 비명을 지르며 좌익 선상 펜스까지 굴러갔다. 스코어를 3-0으로 만드는 2루타.

“무조건 저하고 승부를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음 타자가 박민우니까. 볼카운트가 3B-2S가 되고 나서도 유인구를 던지지 않고 계속 직구 승부를 해올 거라고 생각했죠. 파울 2개도 직구였지만 8구째도 ‘무조건 직구다’ 하고 방망이를 돌렸습니다.”

통산타율은 ‘멘도사 라인(Mendoza Line)’ 언저리지만, 그래도 18년간 ‘프로 밥’을 먹은 베테랑. 세월 속에 다져온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결국은 경험과 노림수가 빚어낸 값진 적시타였다.

누군가에겐 수많은 안타 중 하나일지 모른다. 그러나 지석훈에겐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이 안타로 프로 데뷔 18년 만에 한국시리즈 첫 안타와 첫 타점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타구가 참 아름답게 날아가더라고요. 솔직히 그게 저의 한국시리즈 첫 안타와 첫 타점인 줄도 몰랐거든요. 그저 1점을 더 얻었다는, 내가 해냈다는 안도감부터 밀려왔어요. 1루를 돌아 2루로 달려가는데 손가락으로 ‘V1’을 그리는 세리머니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사실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제가 그 세리머니를 할 수 있을지 상상도 못했거든요. 그래도 팀의 맏형인데, 모처럼 면목이 섰습니다.”

이날 경기 스포트라이트는 당연히 2000년대생 최초로 한국시리즈 승리투수가 된 송명기와 결승타를 친 양의지, 그리고 클로저로 등판해 승리를 마무리한 에이스 드류 루친스키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NC 이동욱 감독은 승장 인터뷰에서 지석훈을 언급했다. “2-0이면 한 번에 역전당할 수 있는 점수인데 마지막 적시타가 승리에 결정적이었다”고.

경기 후 취재진 앞에 설 일도 없었고 기사에 인터뷰 한 줄 없었지만, 감독이 인정했으니 지석훈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 NC 다이노스 큰형님 지석훈(왼쪽)이 한국시리즈 4차전 승리 후 박민우 등 후배들과 마운드에 모여 기뻐하고 있다. NC는 3-0으로 승리하며 2승2패로 균형을 맞췄다. ⓒ고척, 곽혜미 기자
그도 한때는 촉망받던 유망주였다. 휘문고 2학년 때 2001년 황금사자기 고교야구 결승전에서 인천동산고 에이스 송은범을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치며 최우수선수(MVP)에 올랐고, 졸업반 때는 현대에 2차 1라운드 지명을 받았다.

푸른 꿈을 안고 프로에 입단하자 현대 김재박 감독도 “수비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다”며 그를 스프링캠프에 데려갔다. 주전공 유격수는 물론 2루수와 3루수까지 되는 만능 수비꾼. 그러나 산 넘어 산이었다. 주전 유격수 자리에는 ‘국민유격수’라는 박진만이 버티고 있었고, 박진만이 FA(프리에이전트)로 삼성으로 간 뒤에는 황재균, 강정호, 김민성, 서건창 등 후배들에게 밀려났다.

2013년 신생팀 NC로 트레이드돼 잠시 주전으로 나서는 듯했지만 FA 손시헌, 박석민이 영입되면서 지석훈은 운명처럼 다시 그 자리, 백업으로 돌아갔다.

공격력 하나만 놓고 보면 진작에 방출돼도 할 말이 없는 성적. 해마다 가을이 오면 정리 대상이 될까 노심초사하던 시절도 있었다. 내야에 펑크가 날 때 나서는 ‘스페어 타이어’ 같은 인생. 늘 내일을 걱정하고, 1군과 2군을 오르내리는 반복되는 생활에 지쳐 서른 즈음엔 홀로 울면서 야구를 포기하려고 마음먹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악착같이 버텼다.

“어릴 땐 세상을 보는 눈이 부정적이었어요. 야구 잘했던 어린 시절만 생각하고 기회가 없는 것에 원망을 했죠. 백업으로 있으니 무시당한다고 생각하고, 누군가의 한마디에 쉽게 상처도 받았어요. 그러나 나이도 들고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진 것 같아요. 투정을 부린다고 달라질 건 없잖아요. 상대방 입장에서 이해를 하게 돼요. 제가 감독이어도, 구단 오너여도 제 타격 성적이면 시즌 후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좋은 지도자들 만난 덕분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저에게 기회를 안 준 게 아니라 지금까지 기회를 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프로 데뷔 18년 만에 이렇게 한국시리즈 첫 안타와 첫 타점도 기록했잖아요. 제게도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하하.”

할미꽃의 꽃말은 ‘슬픈 추억’이다. 쓰러진 술병 같았던 지난날, 힘겨웠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슬픈 추억'이 많다. 그러나 지석훈은 2020년 늦가을, 비로소 생애 첫 한국시리즈 안타와 타점이라는 ‘기쁜 추억’을 쓸어 담았다. 포기하지 않고 긴긴 세월을 버텨온 그에게 작은 훈장처럼 날아온 선물이었다.

2003년과 2004년 현대 왕조 시절엔 스타군단 사이에서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2016년 처음 NC에서 한국시리즈를 경험했지만, 두산에 4연패로 무너졌다. 그래서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올해는 손가락에 우승 반지 하나는 끼고 싶은 것이 그의 소원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18년간의 백업으로 살아오며 숱한 ‘깔딱 고개’를 넘어선 NC 다이노스의 할미꽃이 힘겹게 살아가는 세상의 무명꽃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스포티비뉴스=고척, 이재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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