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배구 스타 이다영(왼쪽)과 이재영은 과거 학창 시절의 폭력 사실이 드러나 선수생명의 기로에 섰다. ⓒ곽혜미 기자
[스포티비뉴스=양중진 객원 칼럼니스트] 어느 고교 야구부 연습장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수비 연습을 하던 선수가 알을 까거나 만세를 부르면 그 즉시 감독이나 코치의 호출이 이어졌다. 호출 받은 선수는 ‘엎드려뻗쳐’ 자세로 방망이 세례를 받은 후에야 그라운드로 복귀할 수 있었다. 심지어 연습장 주변에는 학부모들과 동문, 학생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그 부당성 아니, 불법성을 지적하지 않았다. 누구나 그 정도는 좋은 성적을 위해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이런 일은 정도의 문제일 뿐 특정 종목이나 학교를 불문하고 아직도 상당수 남아 있는 현상이다.

지금도 합숙소를 운영하는 일부 종목에서는 여전히 서열 문화가 남아 있다. 후배가 선배의 빨래를 대신해주고 청소를 전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스포츠 이외의 분야라면 진즉 ‘갑질 문화’라고 대서특필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스포츠 분야에선 오히려 미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제대로 된 문화라면 오히려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조금이라도 경험이 더 많은 선배가 후배를 잘 돌봐주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필자가 군대에 있던 시절의 일이다. 당시만 해도 선배 기수들로부터 집합이 매우 잦았다. 하루라도 집합을 하지 않고 엉덩이를 매로 데우지 않으면 왠지 횡재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당시 동기들에게 “고참이 되면 이런 문화를 없애자”고 제안했다. 모두가 그렇게 하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과연 문화가 바뀌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폭력을 몸으로 습득한 동기들 중 일부는 똑같이 후배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폭력이 대물림된 것이다.

영화 ‘4등’은 수영을 좋아하지만 메달권에 들지 못하고 만년 4등에 그치는 선수를 통해 폭력의 위험성을 고발한다. 그저 수영이 좋았던 주인공은 폭력에 길들여져 성적을 내지만 예전처럼 행복하지 않다. 수영을 시작한 이유를 잃고 오로지 결과를 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포츠 분야는 결과지상주의가 지배하는 가장 대표적인 분야다. 스포츠야말로 결과, 그 중에서도 1등에 목말라 하는 가장 대표적인 영역이다. 이 때문에 결과를 내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과연 이게 옳은 일일까.

인생에 있어 성적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성적으로 진학을 하고, 성적으로 취업을 하고, 성적으로 승진을 한다. 성적으로 행복한 순위도 매기라면 매길 수도 있을 것처럼 보일 정도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성적지상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다른 말로는 결과지상주의라고 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우리 사회를 떠받들고 있는 시스템인 법치주의 시스템에서도 한때는 결과지상주의가 판을 지배했다.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조금 삐뚤어져도, 조금 엇나가도 된다는 사고가 난무했던 것이다. 하지만 법치주의가 제 자리를 잡아가면서 이러한 굳건한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도 중요하다는 데 모두가 인식을 같이 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요즈음에는 결과가 아닌 과정이 더 중요한 가치라는 인식이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는 사람을 강제적으로 처벌하는 영역인 형사법 영역에서 두드러진다. 2007년 6월 1일 개정된 형사소송법은 제308조의 2에서 이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적법한 절차에 따르지 아니하고 수집한 증거는 증거로 할 수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규정에 따라 최근 국내 유력 기업의 최고 경영자 중 한 명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판사가 법정에서 무죄 이유를 설명하면서 증거수집 절차에 하자가 있어 어쩔 수 없이 무죄를 선고하지만, 실체적으로는 무죄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수사기관이 아무리 좋은 수사 결과를 내더라도 절차에 문제가 있으면 그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최근 배구계에 과거 학교폭력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커지고 있다. 폭력이라는 절차적 하자가 있었다면 성공한 스포츠 스타도 반드시 책임을 져야하는 시대가 됐다. ⓒ곽혜미 기자

스포츠 분야에 있어서도 지도자나 학부모의 성적지상주의 사고에 전환이 필요하다. 스포츠에도 절차적 정당성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아야 한다. 잘못된 절차나 훈련으로 성적을 내면 그 성적을 취소하거나 그 이후의 성과를 인정하지 않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위법하거나 부당한 훈련방식으로 인한 성적에 대해서는 결과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모두의 머릿속에 뿌리내릴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종목별 협회의 규정을 정비해야 한다. 우선은 경기뿐만 아니라 훈련 과정에서도 하면 안 되는 행동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한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 잘못을 막는 첫걸음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무엇이 해서 안 되는 행위인지에 대해 각자의 판단에 맡겨 놓으면 잘못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무엇이 잘못된 행동인지를 정확히 모르는데 처벌만 하면 누구도 승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잘못된 행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징계할 수 있는 규정을 명확히 만들어야 한다. 물론 거기에는 현재의 잘못뿐만 아니라 과거의 잘못이 나중에 드러날 경우에 대한 징계 규정도 포함돼 있어야 한다. 잘못은 잠시 가라앉아 있을 뿐 언젠가는 반드시 드러난다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아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성적지상주의의 상징물과 같은 엘리트 체육 시스템에 대한 재점검이 필요하다. 스포츠는 본래 ‘여가’를 뜻하는 프랑스어 ‘desport'에서 유래했다. 세파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휴식과 여유를 준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여가가 지나친 경쟁과 결합하면서 성적지상주의라는 괴물을 낳은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스포츠 영웅이 온 국민들에게 많은 희열과 자부심을 안겨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경쟁에서 뒤처지며 좌절한 엘리트들의 수많은 회환과 눈물이 있다.

지금의 시스템은 경쟁에서 밀리면 사회생활에서도 만회하기가 매우 어렵게 설계돼 있다.

필자는 그동안 좌절한 스포츠 엘리트들의 사회 부적응 사례를 사건으로 적잖게 만나봤다. 그럴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과 더불어 어쩌면 그들도 엘리트 체육 시스템의 희생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밖에 모르던 그들에게 운동 밖의 사회는 쉽게 적응하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자아가 형성된 이래로 ‘운동’만을 생각하고, ‘운동’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배워왔다. 그러니 ‘운동’ 이외의 영역에서 잘못을 해도 ‘운동’으로 잘못을 사죄하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그들에게 ‘운동선수’만이 아니라 사회의 일원으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제 판을 바꿀 때가 됐다.

※양중진 객원 칼럼니스트는?

현 춘천지검 강릉지청장, <검사의 스포츠> 저자, 전 대한축구협회 윤리위원



저작권자 © SPOTV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