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 위즈의 스프링캠프가 열린 19일 기장현대차드림볼파크. 이날 야구장 한켠에서 진행되던 투수들의 불펜 피칭을 유심히 지켜보던 이가 있었다. 바로 선동열(58) 전 야구국가대표팀 감독이었다.
4년 후배인 kt 이강철 감독의 부탁으로 일주일간 투수 인스트럭터를 맡은 선 감독은 이날 처음 kt 선수들의 불펜 투구를 관전했다. 지난해 신인왕 소형준을 비롯해 심재민, 박시영, 김민수, 류희운, 한차현이 전설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공을 던졌다.
2018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의 우승을 이끈 뒤 다시 야인으로 돌아갔던 선 감독은 최근 LG 트윈스의 이천 스프링캠프를 찾아 후배들을 지도했고, 17일부터 기장으로 건너와 kt 선수들을 만났다.선수와 지도자로서 숱한 경험을 쌓은 선 감독은 이날 특유의 날카로운 눈매로 후배들의 투구를 지켜봤다. 빼어난 구위가 나올 때면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자신의 수첩으로 느낀 바를 꼼꼼히 적기도 했다.훈련 후 만난 선 감독은 먼저 “LG와 kt 선수들을 보면서 오히려 내가 많이 배웠다. 요새 투수들은 2월 스프링캠프를 들어가기 전부터 몸을 착실히 만들어 오더라. 곧바로 경기를 뛸 수 있을 정도로 준비가 잘 돼 있었다”고 기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어 “김민수와 소형준의 경우 좋은 밸런스에서 공을 던졌다. 내가 그 나이 때 저렇게 던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힘으로만 던지려고 했는데 요새 선수들은 자신의 루틴과 밸런스대로 공을 뿌려서 보기 좋았다”고 웃었다.
이번 선 감독의 기장 방문이 기대를 모은 이유는 kt 영건들과 만남 때문이다. 최근 kt는 계속해서 뛰어난 투수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아직은 경험이 많지 않은 투수들이 대부분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이강철 감독은 한국야구를 수놓았던 선 감독이 후배들에게 자신의 노하우와 경험담을 전수할 수 있도록 부탁했고, 선 감독은 흔쾌히 응하면서 이번 인스트럭터 초빙이 이뤄졌다.
선 감독은 “1-0으로 이기는 경기도 있었지만, 0-1로 지는 경기도 의외로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남을 탓하기보다는 내 자신을 질타하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다음 경기 때 데미지가 없었다”고 경험담을 말했다. 이어 “차라리 내가 안타를 맞지 않고 삼진을 잡았어야 했다는 생각을 가져야 다음에는 좋은 결과가 뒤따라온다. 남을 한 번 탓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동료들을 먼저 믿어야 한다”면서 올바른 마음가짐을 이야기했다.
뼈아픈 경험담도 꺼냈다. 1996년 일본프로야구(NPB) 주니치 드래건즈로 건너갔을 때의 일화였다. 해태 타이거즈에서 늘 정상의 자리를 지켰던 선 감독은 이때 해외 진출의 꿈을 이뤘다. 그러나 새로운 무대는 그리 녹록지 않았다.
33살의 나이로 주니치 유니폼을 입은 선 감독은 38경기에서 5승 1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5.50으로 부진했다. KBO리그에선 0점대 평균자책점을 4번이나 기록한 불세출의 투수였지만, NPB 진출과 함께 믿기지 않는 성적을 남겼다.
선 감독은 “유니폼을 입기 싫을 정도였다. 마운드로 서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면서 “또, 그때 2군도 아니고 교육리그로까지 내려간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당시 KBO리그 신인들이 일본으로 건너와 함께 뛰게 됐다. 한국에선 최고라던 사람이 신인들을 상대로 던졌다”고 아팠던 순간을 떠올렸다.
선 감독은 이어 “그래도 (실패 이후) 기본으로 돌아가서 다시 공을 던질 수 있었던 이야기를 후배들에게 말해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뼈저린 실패담을 통해 울림 있는 메시지를 건네고픈 전설의 마음이 엿보였다.
이처럼 몸과 마음으로 후배들과 함께하고 있는 선 감독은 당분간 기장에서 지내며 kt 투수들을 지도할 계획이다.
스포티비뉴스=기장, 고봉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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