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정 이름을 새긴 유니폼을 입고 있는 강라온 군. 청백전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SK 선수들이 타석에 등장할 때마다 모든 응원가를 불러 인기를 독차지했다. ⓒ서귀포, 이재국 기자
[스포티비뉴스=서귀포, 이재국 기자] “와-이-번-스-홈-런-타-자, 로-맥-홈-런, 날려라~,”

5일 제주도 서귀포시 강창학구장. SK 와이번스가 21년간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날이었다. SK 와이번스 이름의 유니폼을 입고 치르는 마지막 청백전. 역사적 순간을 함께하기 위해 관중석을 찾은 팬들의 열정 역시 뜨거웠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끈 팬이 있었으니, 그라운드 위 언덕에 마련된 간이 관중석에 있는 꼬마 팬이었다. 경기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선수들의 응원가를 목청껏 부르며 힘을 불어넣었다. 쩌렁쩌렁 울리는 아기 팬의 목소리는 다른 30여 명 팬들의 응원을 압도했다.

아빠와 엄마를 따라온 이 팬의 이름은 강라온(6) 군. SK 와이번스 골수팬인 부모의 영향을 받아 '모태 와이번스 팬'으로 성장했다. 놀라운 것은 유치원에 다니는 이 어린 팬이 SK 와이번스 모든 선수들의 응원가를 다 외우고 있다는 점이었다. 전광판의 안내나 장내 아나운서의 선수 호명도 없는데 타석에 등장하는 걸음걸이와 모습만 보고도 곧바로 선수를 알아채고 응원가를 불러댔다.

타이밍 적절하게 “최~정 홈런!”, “정의~윤 홈런!” 같은 추임새도 정확하게 곁들였다.

심지어 최근 개명한 한유섬(개명전 한동민)이 타석에 등장하자 “야야야야~ 한유섬 날려버려라~ 홈런!”이라며 소리를 쳐 야구장에 있던 SK 직원들까지 놀라게 했다. 새롭게 영입한 최주환이 저 멀리 지나가자 두산 시절의 응원가에서 “신세계 최주환”으로 개사해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불렀다. 최주환은 언덕 위 꼬마 팬을 향해 “그거 아냐~”라며 큰소리로 웃었다.

▲ SK 와이번스 고별전이 열린 5일 제주도 서귀포시 강창학구장에는 강라온 군의 가족이 와서 끊임 없이 응원가를 불렀다. ⓒ서귀포, 이재국 기자
아버지 강대원(38) 씨와 어머니 정혜정(32) 씨는 연애를 하던 시절부터 야구장을 드나들며 사랑을 키워 결혼까지 골인했다고 한다. 강 씨는 원래 인천 토박이로 SK 와이번스 야구를 보는 것이 인생의 낙이었다. 그러나 인천에 미세먼지가 많아지면서 아이와 함께 공기 좋은 곳에 살기 위해 2년 전 제주도로 넘어와 이곳에 정착했다.

제주도에 살면서 가장 아쉬운 점은 직접 야구장에 가서 와이번스 야구를 볼 수 없다는 것. 그런데 때마침 SK 와이번스 야구단이 이번에 코로나19로 해외 스프링캠프를 가지 못하고 제주도 강창학구장에서 캠프를 열었다. 야구에 목말랐던 이 가족은 생계를 접어두고 매일 같이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입고 이곳을 방문해 응원을 했다. 그러자 선수들이나 프런트도 이제는 이들의 존재를 알고 "또 오셨다", "대단한 열정"이라며 고마워했다.

그런데 이제 SK 와이번스를 신세계 그룹이 인수하면서 6일부터 ‘SSG 랜더스’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한다.

아빠 강대원 씨는 “SK 와이번스가 매각된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엔 정말 허무했다. 그동안 SK의 모든 것을 지켜봤다. 한국시리즈 때는 새벽 6시, 7시부터 야구장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했고, 청춘을 바쳐 응원을 했던 팀이었다”면서 “그래도 신세계가 선수단을 모두 인수한다고 하니 다행이다. 오늘이 SK 와이번스 마지막 날이라 그동안 사 모았던 유니폼들을 가지고 와서 이렇게 걸어 놨다. 이제는 이 유니폼이 다 장롱 속에 들어가야 한다”며 아쉬워 했다. 그러면서 “이제 구단이 신세계 그룹으로 넘어가지만 팬들을 위해 가끔씩은 와이번스 데이 같은 행사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밝혔다.

라온 군은 야구단 매각에 대해 처음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아빠가 “신세계가 SK 와이번스를 사게 됐다”고 설명하자 라온 군은 “와이번스가 장난감처럼 물건도 아닌데 어떻게 사고 팔 수가 있느냐”며 슬퍼했다는 것. 그러나 이제 야구단도 사고 팔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선수들은 그대로 신세계로 간다”는 아빠의 설명에 평온을 되찾았다.

유니폼에 최정 이름을 새겨 놓고 있어 “최정 선수를 가장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라온 군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SK 선수들은 다 좋아하는데 로맥 선수를 가장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이유를 묻자 “저한테 인사를 가장 잘해줘요”라며 깔깔 웃었다.

▲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강라온 군. 라온 군은 이제 더 이상 이 유니폼을 입고 SK 와이번스 응원가를 부를 수 없게 됐다. ⓒ서귀포, 이재국 기자
아버지 강 씨에 따르면 라온 군은 시즌 때면 집에서 TV를 통해 3시간이 넘는 야구를 보면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있다고 한다. 요즘엔 야구 룰까지 궁금해 하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강 씨는 “이제 신세계 야구단(SSG 랜더스) 어린이 회원에 가입시켜도 될 것 같다”며 웃더니 “예전엔 휴가 때 제주도로 여행을 왔지만, 이제 우리 가족은 인천으로 휴가를 갈 것 같다”고 말했다.

아빠가 인터뷰를 하는 사이에 라온 군은 다시 목청을 높여 “최~정 홈런!”을 신나게 외치고 있었다. SK 와이번스의 마지막을 함께한 날, 더 이상 이 유니폼을 입고 와이번스 응원가를 부를 수 없기에 힘찬 응원가가 오히려 더 슬프게 들렸다.

삼청태현(삼미-청보-태평양-현대), 그리고 슥쓱(SK-SSG). 인천 야구의 지난한 구단 변천사를 지켜봐 온 팬들이라면 이 꼬마 팬의 슬픈 노래에 감정이입이 될 듯하다. 꼭 인천 야구 팬이 아니라도, 과거 MBC 청룡 팬이, 해태 타이거즈 팬이 구단 매각과 인수 과정에서 느꼈던 복잡한 심정도 이와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구단을 사고 파는 것은 기업의 비즈니스지만, 팬들의 정서는 복잡미묘한 그런 것이 있다.

SK 와이번스 마지막 가는 길엔 라온 군의 응원가로 시작해 응원가로 끝났다. 라온 군으로 인해 SK 와이번스 이별식은 외롭지 않았다.

한편, 6일 SSG 랜더스로 첫 출발하는 선수단은 제주도 스프링캠프를 마치고 인천으로 올라온다. 하루 휴식 후 8일 부산으로 내려가 남부 지역에서 진행되는 연습경기를 통해 실전감각을 끌어올릴 예정이다.

스포티비뉴스=서귀포, 이재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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