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역 시절이나 지도자 입문 후에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던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 ⓒ연합뉴스
▲ 현역 시절이나 지도자 입문 후에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던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 ⓒ연합뉴스


[스포티비뉴스=이성필 기자] "감독님. 왜 하필 대전 시티즌인가요?"

"이 기자.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프로팀 감독이 아무나 됩니까."

2011년 7월, 가난한 시민구단 대전 시티즌에 부임한 고(故) 유상철 감독은 시작부터 몰상식과 마주했었다. 당시 대전 경영진은 유 감독에게 '승강제 도입 후 잔류하지 못하면 계약을 해지한다'는 류의 내용을 계약서에 삽입하기를 요구했다. '당신이 아니라도 지도자는 얼마든지 있다'는 식의 자세였다.

부임 후 한 달여가 지난 뒤 유 감독을 사석에서 만나 서두의 질문을 던졌다. 기자 선배들이 감독이나 코치 등 지도자들에게 "왜 이 팀을 맡았느냐"라는 질문은 어리석고 예의 없는 것이니 하지 말라는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젊은 혈기에, 구단의 부당함이 어이가 없어서, '유상철'이라는 이름값이면 기업구단을 맡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단순한 생각에 던졌지만, 화를 잘 내지 않는 유 감독은 "팀 조건이 어쨌든 지도자가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충분히 해낼 것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지역의 이해관계가 정말 복잡하게 얽혀 있던 대전이었다. 유 감독이 가볍게 맥주 한잔을 하러 가도 소문이 부풀려져 전달되기 다반사였다. 일부 지역 언론은 노골적으로 구단에 훈수를 두며 유 감독을 흔들었다. 승부 조작, 공금 횡령, 폭행 등 각종 사건·사고의 대표 구단인 대전이라는 배경으로 인해 유 감독에 대한 걱정이 컸다.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2000년대 중반 당시 대전을 대표했던 A선수는 야밤에 술이 취해 숙소로 와서 행패를 부리며 "선수들 다 나오라. 내 말 한마디면 너희 감독 날아가"라는 한 인사의 부당한 행동에도 화내지 않고 무릎을 꿇고 설득해 보낸 일도 있었다.

당연히 어느 지도자가 와도 안정된 자기 철학을 펼치기 어려웠고 유 감독은 1년 6개월 뒤 계약만료라는 형식으로 팀을 떠났다. 나름대로 스타일을 선보였지만, 구단은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며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다. 말이 계약만료지 경질에 가까웠다.

당시 대전을 담당했던 필자는 유 감독에게 "감독님. 정말 바보네요"라고 안타까움을 보였지만, 유 감독은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죠"라고 내일을 기약했다. 아마추어인 울산대 감독 시절 울산 현대 경기 출장을 가서 가끔 만났던 유 감독에게 "프로에 언제 돌아올 거에요"라는 물음을 던지면 "축구 인생이 길어요. 언젠가는 오는 거예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울산 경기를 관전하면 '울산 감독을 노리는 것 아니냐'는 오해가 받기 싫어 발걸음 자체가 신중했던 지도자였다. 

▲ 유상철 감독의 영정 사진 역시 환한 웃음이었다. ⓒ사진공동취재단

▲ 일본 J리그 요코하마 F.마리노스 팬들이 내걸었던 유상철 감독 응원 현수막 ⓒ스포티비뉴스DB

권토중래하던 유 감독은 2017년 12월 전남 드래곤즈 사령탑을 맡았지만, 2018년 8월 사임했다. 팀을 지휘할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다. 당시는 전남 담당이 아니었지만, 전화를 건 필자에게 "이번에는 성급했나 봐요. 그쵸. 이 기자 옛날에 나보고 바보라고 했었죠. 딱 맞았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유 감독은 2019년 5월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으로 부임했다. 첫 훈련에서 유 감독은 어김없이 트레이닝복을 입고 선수들과 호흡했다. 인천 담당이라 취재를 온 필자에게 "이번에는 살살 좀 괴롭힙시다"라며 농을 던졌다. 취재진과 지도자는 불가근불가원의 관계라지만, 유 감독은 늘 친근했다. 

그런 유 감독이 '공식적'으로 황달 증세를 보였다가 췌장암 4기라는 진단을 받을 당시에는 믿기 어려웠다. 주변을 먼저 취재하고 유 감독에게 전화를 거니 태연하게 "그냥 황달 증세가 있데요. 괜찮아요"라며 가볍게 넘겼다. 인천 관계자는 "유 감독이 정말 내색하지 않았다. 그 스스로도 몰랐을 것이다. 구단 구성원 모두 몰랐다가 소식을 들었고 이래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퍼졌다. 그것이 잔류로 이어졌는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유 감독은 힘겹게 투병했다. 지난해 3월 말 모친상에서 유 감독은 "저 괜찮으니까 나중에 정리되면 식사 꼭 하자"며 위로하는 필자를 향해 선한 미소를 지었다. 필자보다 훨씬 유 감독과 가까웠던 타사 기자는 "유 감독 스스로도 어느 순간 나아지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하는데 이게 가장 무섭다고 하더라"고 간접적으로 소식을 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 감독은 충실하게 항암 치료를 이어가면서 외부, 특히 언론과의 접촉은 최대한 자제했다. 항암 과정에서는 방해가 큰 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조금씩 회복되면 외부 행사에도 나오고 지인들과 가끔 골프를 치며 본인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유 감독의 한 지인은 "골프를 칠 때 유 감독의 모습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라운딩 후에 맛있는 것도 먹고 했었던 기억이 난다. 왜 이렇게 빨리 세상과 작별했는지 모르겠다"라며 애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투병 이후 필자와는 지난해 11월 중순, 올해 1월 초 두 번 전화 연락이 됐다. 유 감독은 "지금 코로나 때문에 어디를 다닐 수 없네요. 제 과거 이야기를 (팬들이) 기억을 할까요. 컨디션이 좋아지고 하면 전화를 드릴게요. 몰골을 (카메라에) 담아도 될까 모르겠어요. 어쨌든 지금이 중요한 시기니까 (이해를) 구해요"라며 되려 국가대표 시절을 추억하는 주제의 인터뷰를 요청하는 필자를 걱정하며 양해를 구했다. 그렇게 통화는 마지막이 됐고 모바일 메신저는 3월 확인이 마지막이었다. '1'이라는 숫자가 그대로 남은 5월 초 메시지를 확인하지 못하며.

▲ 2002 한일월드컵 4강 주역들은 8일 서울 아산병원에 마련된 유상철(뒷 줄 맨 왼쪽) 감독의 빈소를 끝까지 지켰다. 9일 발인에도 함께했다. ⓒ연합뉴스

 
빈소가 마련된 서울 아산병원에서 만났던 정경호(41) 성남FC 코치는 "상철이형은 정말 맡은 팀과 운때가 맞지 않았던 것 같다. 한국 축구에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 형인데 이렇게 일찍 가다니 안타까울 뿐이다"라고 애도했다. A대표팀, 올림픽대표팀과 울산 현대에서 방장-방졸 사이였던 정 코치의 말대로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유 감독은 어머니 곁으로 떠났다. 그는 생전에 필자와 나눈 몇 번의 인터뷰 중 이런 말을 남겼다.

"한국 축구 환경에서 국가대표 감독이 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국내 지도자가 조금이라도 못하면 외국인 데려오라고 하니까요. 그래도 프로 감독이 되니 언젠가는 국가대표 감독도 할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어려운 구단을 맡아도 나중에 국가대표 감독을 해서 '손흥민을 한 번 지도해봐야지', '(이)강인이를 공격형 미드필더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활용해볼까'라는 꿈을 꾸게 되더라고요. 꼭 이뤄지리라 믿어 볼게요." 

유 감독이 남긴 유산이 무엇이고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 한국 축구에 큰 숙제가 떨어졌다.

부디 천국에서는 아프지 않고 사랑했던 축구와 행복하소서. 


스포티비뉴스=이성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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