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이 무렵 보성전문(오늘날의 고려대학교)과 연희전문(오늘날의 연세대학교)의 농구 라이벌 대결은 축구의 연·보전과 함께 장안의 화제였다. 최근 들어 농구 연고전은 의미가 많이 퇴색했으나 두 학교가 우리나라 농구 발전, 특히 일제 강점기와 1950, 60년대에 미친 영향은 상당했다. 두 학교는 라이벌전을 바탕으로 농구의 경기력을 끌어올렸고 그 결과는 연희전문이 1936년 1월 열린 전일본종합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희전문은 은퇴한 지 2년여가 지난 이성구(진명여고보 교사)를 불러들여 ‘전연전’이란 이름으로 이 대회에 나서 준결승에서 일본 최강 도쿄제대를 46-38로 꺾었고 결승에서는 교토제대를 42-22로 크게 이겼다. <3편에서 계속> 

1936년은 제 11회 하계 올림픽이 열리는 해로 전일본종합선수권대회는 베를린에 갈 일본 대표 선수를 뽑는 대회였다. 일본 농구 관계자들은 도쿄제대의 우승을 낙관하고 우승팀 선수를 중심으로 나머지 팀에서 몇몇 우수 선수를 보강해 대표 팀을 구성한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덜컥 연희전문이 압도적인 기량으로 우승한 것이다. 마라톤의 손기정과 남승룡, 축구의 김용식이 그랬듯이 농구에서도 조선인이긴 하지만 연희전문 우승의 주역인 이성구와 장이진, 염은현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일본은 베를린 올림픽 농구 1회전에서 중화민국(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다른 국체)을 35-19, 2회전에서 폴란드를 43-31로 꺾고 기세 좋게 3회전에 올랐으나 멕시코에 22-28로 져 8강 문턱에서 탈락했다. 이 대회에서 필리핀은 우루과이를 33-23으로 누르고 5위를 차지했다.  

베를린 올림픽 이후 1938년 1월 열린 전일본종합선수권대회 결승에서는 보성전문이 연희전문을 43-41로 누르고 우승했다. 일본 농구 관계자들에게는 속이 쓰린 일이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보성전문은 그해 9월 일본 국내 사정으로 일정을 앞당겨 치른 1939년 대회 결승에서 교토제대를 연장 접전 끝에 64-50으로 누르고 2연속 우승한데 이어 1940년 1월 대회에서 문리대에 58-37 대승을 거두고 전일본종합선수권대회 3연속 우승의 위업을 이뤘다. 

이때 멤버가 신광호 최해룡 조득준(조승연 전 삼성 썬더스 고문 아버지) 이호선 오수철 오중열 안창건 최성철 이준영 우낙균 등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고 일본이 1940년 제 12회 하계 올림픽을 예정대로 도쿄에서 열었으면 이들 가운데 몇몇은 올림피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발족한 조선농구협회(대한농구협회 전신)는 1946년 3월 제 1회 전국종합선수권대회를 개최하는 등 다른 어느 종목보다 활발하게 움직였다.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그때 체육인들의 가장 큰 소망은 1948년 열릴 예정인 제 14회 런던 하계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이었다.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한 움직임은 1946년 5월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 전신) 안에 올림픽대책위원회를 설치하면서 본격화됐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때까지 조선을 앞에 달았던 기관이나 단체들은 거의 모두 ‘대한’이나 ‘한국’으로 간판을 바꾸어 달게 되는데 체육 단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름이 바뀐 대한체육회는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농구와 육상, 축구, 복싱, 역도, 레슬링, 사이클 등 7개 종목 67명의 올림픽 선수단을 일단 구성했다. 

이 선수단을 구성하기까지 각 경기 단체는 자기네 종목에서 한 명이라도 더 보내려고 다른 종목을 헐뜯고 같은 종목 안에서도 서로 비방하는 등 잡음이 많았다. 런던 올림픽은 한국 시간 7월 30일 개막하게 돼 있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다. 1948년 1월 30일부터 2월 5일까지 스위스의 생모리츠에서 열린 제 5회 동계 올림픽에 한국 선수단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전했지만 이 또한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대한민국 대표 선수단이 아니고 한반도 남쪽을 대표하는 선수단이었다.   

따라서 한국 선수단은 8월 15일까지 재정을 비롯한 한반도 남쪽의 통치권을 쥐고 있던 미군정청이 비용을 마련해 줘야 런던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때 미군정청은 선수단의 인원이 많으니 10명을 줄이라고 대한체육회에 통고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렵사리 선수단을 구성한 체육회가 10명을 줄인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때 일부 체육인들로부터 친일파로 배척 받아 체육계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던 농구인 이상백이 “모두 다 보낼 수 있을 텐데”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한체육회 간부들이 그를 찾아가 협조를 부탁했다. 3편에 나온 이상백은 일제 강점기 일본농구협회 상무이사, 일본체육협회 전무이사를 지내고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일본 선수단 임원,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일본 선수단 총무를 맡았기 때문에 일부 체육인은 그를 친일파로 몰아세워 올림픽 선수단 구성에 참여하지 못하게 견제했다. 그러나 다급해진 대한체육회로서는 이상백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계속> 

[사진]1940년 전일본농구선수권대회에서 3연속 우승한 보성전문 선수들. ⓒ한국 농구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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