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BA 최고의 플레이오프 승부사로 불렸던 LA 레이커스 시절의 데릭 피셔 ⓒ Gettyimages

[스포티비뉴스=박대현 기자] 위대한 조력자였다. 안정적인 경기 운용과 끈질긴 수비,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높은 농구 지능, 동료의 등을 두들기는 큰형님 리더십까지 겉으론 잘 드러나지 않지만 농구에 꼭 필요한 요소를 두루 갖춘 포인트가드였다. 그러나 이 선수를 기억하게 만드는 건 다른 데 있다. 이 185cm의 단신 가드는 플레이오프라는 큰 경기에서 반드시 필요한 '그것'을 자신의 왼손으로 능숙하게 해냈다. 그는 농구 팬들의 머리속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결정적인 위닝 샷을 여러 차례 책임졌다. 시소 상황에서 에이스보다 더 많은 믿음을 얻었던 이 선수는 바로 '우승 청부사' 데릭 피셔(42)다.

피셔는 2004년 5월 14일(이하 한국 시간) 미국 텍사스주 샌안토니오 SBC센터(현 AT&T센터)에서 열린 미국 프로 농구(NBA) 플레이오프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서부 콘퍼런스 세미 파이널 5차전에서 8득점 2리바운드 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74-73 승리에 이바지했다. 기록만 보면 다소 평범하다. 그러나 그 내용과 상황, 분위기를 들여다보면 180도 생각이 달라진다. 지금도 팬들 입에 오르내리는 '0.4초의 기적'을 NBA 역사에 뚜렷이 남겼기 때문이다.

레이커스는 당시 게리 페이튼-코비 브라이언트-드빈 조지-칼 말론-샤킬 오닐을 스타팅 5로 내세웠다. 페이튼과 말론이 전성기에서 내려오는 시점에 합류하긴 했지만 이름값만 보면 역대 어느 팀에 견줘도 밀리지 않는 '호화 라인업'이었다. 이들은 토니 파커-브루스 보웬-히도 터컬루-팀 던컨-라쇼 네스트로비치를 앞세운 샌안토니오와 48분 내내 치열한 접전을 펼쳤다. 

전반적으로 득점이 많이 나오지 않은 '저득점 경기'였다. 코비는 당대 최고의 1대1 수비수 보웬, 로버트 오리의 압박 수비에 막혀 야투 성공률이 40.7%에 그쳤다. 말론과 페이튼은 12점을 합작하는 데 머물렀다. '공룡 센터' 오닐은 11점으로 묶였다. 레이커스는 샌안토니오의 민활한 로테이션 수비에 고전했다. 또 당시 데뷔 7년째로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던컨의 림 보호 능력에 애를 먹으며 경기 종료 0.4초 전까지 후반 득실점 마진에서 -8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레이커스는 던컨에게 21득점 21리바운드 4슛블록을 뺏겼다. 오닐-말론-스타니슬라브 메드베덴코로 이뤄진 '골드 앤드 퍼플' 빅맨진은 등 번호 21번이 새겨진 하얀 유니폼의 선수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로 포스트와 하이 포스트를 오가며 물오른 기량을 뽐내는 던컨의 파괴력을 전혀 억제하지 못했다. 72-71로 앞선 경기 종료 0.4초 전에도 그랬다. 던컨에게 뼈아픈 중거리 점프 슛을 허용해 역전을 허락했다. 1만8천여 샌안토니오 팬들은 일제히 열화와 같은 함성을 질렀다. 승리를 확신하는 분위기가 SBC센터에 가득 메워졌다. 남은 시간은 불과 0.4초.

필 잭슨 레이커스 감독은 곧바로 작전 타임을 불렀다. 그러나 별 뾰족한 수는 없어 보였다. 이 선수가 아직 코트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 2010년 NBA 파이널 우승을 이룬 LA 레이커스 선수단을 축하하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 Gettyimages

피셔는 샌안토니오 코트 왼편에서 인바운드 패스를 받았다. 공을 쥐자마자 몸을 왼쪽으로 돌려 슛을 던졌다. 슈팅 밸런스는 무너져 있었고 공을 놓을 때 릴리스도 불안정했다. 여러모로 림 안에 공이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피셔의 손을 떠난 공은 깨끗하게 그물망을 흔들었다. NBA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빅 샷'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샌안토니오 선수들은 망연자실했다. 보웬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할 말을 잃었다. SBC센터가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 비디오 판독 결과 피셔가 공을 던질 때 종료 부저는 울리기 '직전'이었다. 이때부터 농구인과 팬들은 한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한 프로 농구 선수가 공을 잡고 슛을 던져서 림을 통과하게 할 수 있는 가장 짧은 시간은 바로 0.4초"라고.

레이커스는 통산 16번의 NBA 파이널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서부 지구를 넘어 리그를 대표하는 명문 구단 가운데 하나다. 이들은 동부의 보스턴 셀틱스와 더불어 NBA 연감 속에서 가장 눈부신 역사를 자랑한다. 레이커스의 스타플레이어는 곧 NBA의 스타였고 당대 최고의 현역 농구 선수였다.

피셔는 이러한 구단에서 당당히 자신의 흔적을 남긴 포인트가드다. 크고 선명한 발자욱을 찍은 승부사다. 그는 우승 반지 5개를 손가락에 끼고 은퇴했다. 5회 우승은 카림 압둘-자바, 매직 존슨, 코비, 마이클 쿠퍼가 경험한 우승 횟수와 같다. 각 포지션에서 NBA 최고의 레전드로 평가 받는 레이커스 선배·동료와 같은 수의 반지를 수확하고 현역에서 물러났다. 피셔는 259번의 봄 무대 출전으로 플레이오프 통산 최다 출전 기록을 갖고 있다. 또 봄 농구에서만 161승을 거둬 이 부문 역대 1위에 이름을 올렸다. 플레이오프에 가장 많이 나서 가장 많은 승리를 챙긴 선수가 바로 피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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