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1970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한 한국 남자 배구 대표팀(왼쪽)이 일본과 경기에서 분전하고 있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1970년 방콕에서 두 번째로 열린 제 6회 아시아경기대회는 여자 배구가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된 의미 있는 대회였다. 남녀 모두 또다시 일본의 벽을 넘지 못하며 풀리그로 진행된 경기에서 각각 6승1패를 기록하며 은메달에 만족했다. 남자는 일본에 0-3(6-15 4-15 5-15)으로 완패했으나 김영자와 조혜정, 이순복, 윤영내 등 노장과 신예가 조화를 이룬 여자는 일본에 1-3(4-15 12-15 15-13 9-15)으로 따라붙으며 성장 가능성을 보였다. <3편에서 계속>

1972년 뮌헨 대회와 1974년 테헤란 대회에 각각 북한이 여름철 올림픽과 여름철 아시아경기대회에 처음을 출전하게 되는 것을 계기로 1970년대 한국 스포츠의 지상 목표 가운데 하나는 북한과 경쟁에서는 이기는 것이었다.

한국과 북한은 1964년 인스부르크 동계 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김귀진과 김혜숙(이상 한국)이 한필화(3000m 은메달), 김송순, 박월자(이상 북한)와 겨루는 등 몇몇 종목에서는 맞붙었지만 대규모로 만난 건 1972년 뮌헨 올림픽이 처음이었다.

뮌헨 올림픽을 앞두고 대한체육회는 멕시코시티 대회에 이어 다시 한번 6위 이내 입상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는 종목과 선수 위주로 소수 정예 선수단을 꾸리기로 했다. 이에 따라 1차적으로 확정된 선수단은 여자 배구와 복싱, 역도, 레슬링, 유도 등 5개 종목에 39명(임원 13명, 선수 26명)이었다. 이는 1952년 헬싱키 대회 때보다 4명이나 적은 역대 최소 규모였다. 그러나 7월 프랑스에서 벌어진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자유중국(대만)을 3-0, 북한을 3-1로 꺾고 본선 티켓을 손에 넣은 남자 배구가 합류한 데 이어 서독 현지에서 전지훈련을 하고 있던 육상의 박상수(남자 높이뛰기)와 백옥자(여자 포환던지기) 그리고 수영의 조오련과 사격 대표팀이 추가되면서 62명(임원 6명, 선수 46명)으로 선수단 규모가 늘었다.

지역 예선에서 북한을 잡고 기세를 올린 남자 배구는 조별 리그 A조에서 폴란드를 3-1로 이겼으나 소련에 0-3으로 지는 등 2승 3패를 기록하며 순위 결정전으로 밀린 뒤 7위 결정전에서 브라질을 3-0으로 꺾었다. 배구가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64년 도쿄 대회에서 9전 전패로 꼴찌를 한 데에서 한 발 나아간 성적이었다.

여자 배구는 조별 리그 A조에서 소련에 1-3으로 졌으나 헝가리와 서독을 각각 3-0으로 완파하고 조 2위가 돼 준결승에서 일본과 만났으나 0-3(3-15 5-15 9-15)으로 완패했다. 3위 결정전에서 만난 북한은 한국보다 먼저 1958년 제 2회 세계여자배구선수권대회(소련)에 출전해 출전 17개국 가운데 8위를 했고 1962년 제 4회 대회(소련)에서는 출전 14개국 가운데 10위를 하는 등 다른 어느 종목에 비해 세계 무대에 일찌감치 진출했다. 이는 여자 배구가 강한 소련 등 동유럽 나라들의 영향이 컸다. 뮌헨 올림픽 직전인 1970년 제 6회 대회(불가리아)에서는 소련과 일본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상당한 수준의 경기력을 보유하고 있던 북한에 0-3(7-15 9-15 9-15)로 완패했다. 북한의 여자 배구 동메달은 2016년 현재 북한이 올림픽 단체 구기 종목에서 획득한 유일한 메달이다. 한국은 북한에 졌지만 1964년 도쿄 대회 6위(6개국 출전),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 5위(8개국 출전)에 이어 다시 한 단계 올라선 4위를 차지하면서 올림픽 메달에 바짝 다가섰다. <5편에 계속>

[사진] 1970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한 한국 남자 배구 대표팀(왼쪽)이 일본과 경기에서 분전하고 있다. ⓒ대한체육회

신명철 편집국장 smc@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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