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한국 선수단 결단식 장면. 한국 올림픽 사상 첫 단체 구기 종목 메달(동)에 빛나는 여자 배구 선수들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결단식을 중계방송하는 KBS 카메라가 눈길을 끈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1972년 뮌헨 올림픽 3위 결정전에서 만난 북한은 한국보다 먼저 1958년 제 2회 세계여자배구선수권대회(소련)에 출전해 17개국 가운데 8위를 했고 1962년 제 4회 대회(소련)에서는 출전 14개국 가운데 10위를 하는 등 다른 어느 종목에 비해 세계 무대에 일찌감치 진출했다. 이는 여자 배구가 강한 소련 등 동유럽 나라들의 영향이 컸다. 뮌헨 올림픽 직전인 1970년 제 6회 대회(불가리아)에서는 소련과 일본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상당한 수준의 경기력을 보유하고 있던 북한에 0-3(7-15 9-15 9-15)로 완패했다. 북한의 여자 배구 동메달은 2016년 현재 북한이 올림픽 단체 구기 종목에서 획득한 유일한 메달이다. 한국은 북한에 졌지만 1964년 도쿄 대회 6위(6개국 출전),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 5위(8개국 출전)에 이어 다시 한 단계 올라선 4위를 차지하면서 올림픽 메달에 바짝 다가섰다. <4편에서 계속>

1974년은 아시아 스포츠 판도가 크게 출렁인 해다. 9월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열린 제 7회 아시아경기대회는 이후 아시아 스포츠 구도가 어떻게 형성될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대회였다. 이 대회에는 아시아경기연맹[AGF,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전신] 가맹 26개국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를 뺀 25개 나라가 참가해 대회 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출전했다. 직전 대회인 1970년 제 6회 방콕 대회에는 19개 나라가 출전했다. 아시아경기대회에 처음 나선 나라가 중국과 북한, 바레인, 이라크, 쿠웨이트, 라오스, 몽골 등 7개국이나 됐다. 첫 출전한 나라들이지만 사회주의 국가, 서아시아 국가 등으로 아시아 스포츠 판도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이 대회 여자 배구에는 한국과 북한, 일본, 중국, 이란 등 5개국이 출전해 풀리그로 순위를 가렸다. 한국은 일본에 1-3으로 졌으나 북한을 3-0(15-6 15-5 15-9)으로 꺾고 2년 전 올림픽에서 패배를 갚았다. 한국은 북한뿐만 아니라 뒷날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 등에 빛나게 될 중국을 3-0으로 꺾으며 은메달을 차지했다. 뮌헨 올림픽 동메달의 북한은 급격한 세대교체 속에 1승3패로 4위에 그쳤다.

남자는 조별 리그 B조에서 1위를 한 뒤 준결승에서 중국을 3-1로 꺾었으나 일본에 1-3으 로 져 또다시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1976년 한국 스포츠의 최대 관심사는 7월 17일부터 8월 1일까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 21회 여름철 올림픽이었다. 4년 전 제 20회 뮌헨 여름철 대회에서 올림픽 무대에 처음 나선 북한에 뒤진 한국으로서는 북한과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지상 과제를 안고 있었다.

몬트리올 올림픽과 제 12회 인스부르크 겨울철 올림픽에 대비해 1975년과 1976년 상반기에 진행된 대한체육회 국가 대표 선수 강화 훈련 실적에 따르면 참여 선수는 198명, 임원은 27명, 훈련 일수는 426일에 이르렀다. 1976년에는 올림픽에서 입상한 전적이 있거나 입상 전망이 확실해 국위 선양이 기대되는 종목 그리고 지역 예선을 통과한 종목 등 소수 정예로 강훈련을 실시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구성된 대표 선수단은 임원 22명과 선수 50명으로 뮌헨 대회를 약간 웃도는 규모였다. 출전 종목은 레슬링과 유도, 남녀 배구, 복싱, 사격이었다. 사격은 1978년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 세계선수권대회 개최국으로서 위상을 고려해 뮌헨 대회에 이어 또다시 참가하게 됐다. 남자 배구는 애초에는 ‘상위 입상이 어렵다’는 대한체육회의 판단에 따라 제외할 방침이었으나 “지역 예선을 통과한 마당에 본선 출전을 가로막는 것은 지나친 처사가 아니냐”는 대한배구협회의 거센 반발에 밀려 선수단에 넣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사격과 복싱, 남자 배구를 뺀 종목에서 모두 메달 따 대한체육회의 선수단 구성 방침은 비교적 정확했던 것으로 판명 났다.

1970년대 한국 스포츠를 관통한 김택수 회장의 ‘선(先) 체력 후(後) 기술’ 방침은 시대 상황으로 봐 당위성이 있었다. 그러나 다소의 진통도 있었다. 몬트리올 올림픽을 불과 두 달여 앞둔 4월 25일 여자 배구 대표팀의 주 공격수 박인실이 선수촌에서 이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무렵 대한배구협회를 맡은 이낙선 회장은 올림픽 메달을 목표로 후원회를 조직하고 발전 기금을 마련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했다. <6편에 계속> 

저작권자 © SPOTV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