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림픽스타디온을 출발해 본격적인 레이스에 들어간 손기정(왼쪽), 1위로 레이스를 마쳤으나 손기정의 얼굴이 어둡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1935년부터 베를린 올림픽이 열리는 1936년에 걸쳐 한반도와 일본 모두 올림픽 출전 준비로 부산했다. 베를린 올림픽에 농구 선수로 나갔던 이성구는 “당시 국내 체육계 일부에서는 일본 대표 선수로 올림픽에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일본 선수를 무찌르고 일본 대표 자리를 빼앗는 것을 많은 우리 겨레가 바라고 있었다. 게다가 세계 무대에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밝히기 위해서는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올림픽에 나갔다”고 말했다.

제국주의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있어 조선체육회가 올림픽 출전 대표 선수를 선발할 수는 없었다. 조선체육회의 회원 단체로 창립된 조선축구협회, 조선아마추어권투(복싱)연맹 등의 경기 단체는 우리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 길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인 조직인 조선체육협회를 비롯한 일본 경기 단체의 산하 단체 노릇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는 한반도를 일본의 일개 지방으로 다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올림픽 대표 선수 선발전도 조선 대표로서 일본 대표 선수 선발전에 참가하는 형식 밖에 달리 올림픽에 나갈 길이 없었다.

일제의 우리 체육 기관 통제 아래서도 조선체육회를 중심으로 우리 경기 단체의 활동은 꺾이지 않는 민족정신을 바탕 삼아 꾸준히 펼쳐졌고 베를린 올림픽 일본 대표 선수 선발전에서 우리 선수들은 맹활약했다.

일본인들은 마라톤과 축구, 농구 등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조선인들을 일본 대표로 뽑는 데 무척 인색했다. 단체 경기의 경우 우승 팀을 중심으로 다른 팀의 우수 선수를 보강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런 방식은 철저히 무시됐다.

올림픽 대표 최종 선발전의 우승팀인 연희전문(오늘날의 연세대) 농구팀에서 이성구와 장이진, 염은현 등 3명이 뽑힌 것은 그나마 일본체육협회 전무이사이자 일본농구협회 상무이사인 이상백이 강력히 밀었기 때문이다. 이상백은 베를린 올림픽 일본 대표 선수단 총무, 올림픽 농구 국제 심판으로 참가한 인물로 일본 체육계에 영향력이 컸다. 이상백은 해방 이후 이기붕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이 된다. 정례적으로 열리고 있는 이상백배한일대학농구대회에 붙어 있는 이름의 주인공이다.    

축구의 경우 최강팀인 경성축구단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체에서 김용식 한 사람 만이 뽑혔을 뿐이다. 김용식은 스웨덴을 3-2로 이긴 1회전과 0-8로 진 이탈리아와 8강전 두 경기에 모두 주전으로 활약했다. 조선인 선수를 달랑 한 명만 선발했지만 실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라톤에서도 일본육상경기연맹은 한국인 선수 2명을 올림픽에 내보내고 싶지 않아 남승용을 빼려고 했다. 그러나 조선 지역의 육상경기 종목을 대표해 일본육상경기연맹 회의에 참석한 정상희가 “최종 선발전 우승자인 남승용을 뺄 수는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일본 육상계의 거물인 오다 미키오(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세단뛰기 금메달리스트)가 정상희의 주장을 지지해  남승용은 일단 베를린에 가게 됐다. 그러나 일본육상경기연맹은 손기정과 남승용 외에 일본인 선수 시와쿠 다마오 등 2명의 선수를 베를린에 함께 보내 현지에서 최종 선발전을 치러 한 명을 뺀다는 무리한 결정을 했다. 결국은 ‘조선인 2+일본인 1’엔트리로 확정됐지만. 

조선인 선수들에게는 해결해야 될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김은배와 권태하를 견제했던 츠다 세이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코치가 됐기 때문이다. 손기정과 남승용의 강력한 반발로 결국 츠다는 코치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936년 8월 9일(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영조가 우승한 날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은 2시간29분19초2의 올림픽 최고 기록으로 우승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올림픽 마라톤에서 2시간30분의 벽’을 돌파한 선수는 손기정이 처음이다. 영국의 어네스트 하퍼가 2시간31분23초로 2위였는데 기진맥진해서 들어와 쓰러진 그를 경기 임원이 재빨리 담요로 싸서 들것에 실어 보냈다.

남승용은 하퍼보다 19초 뒤진 2시간31분42초로 3위가 됐으나 3명의 메달리스트 가운데 가장 피로의 기색이 적었다. 후반에 강한 저력의 마라토너 남승용이 조금만 더 빠른 시점에서 스퍼트를 걸었다면 결과가 바뀔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이 남아 있기도 하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과 남승용이 각각 1위와 3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반도는 발칵 뒤집혔다. 

서울 중심부인 광화문에 자리 잡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매일신보 등 각 신문사 앞에 마련된 속보판에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1932년 ‘상록수’가 동아일보 현상 소설에 당선돼 상금으로 당진에 상록학원을 설립해서 농촌 계몽 운동에 나선 작가 심훈은 손기정이 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시를 지어 기쁨을 나타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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