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상식 때까지만 해도 손기정의 유니폼 상의에는 일장기가 있었다. 그러나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에서는 일장기가 사라졌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손기정은 사인 요청을 받으면 한글로 자기 이름을 적어 주고 나라 이름은 영문으로 KOREA라고 썼다. 맞춤법이 오늘날과는 달라 그때 손기정은 ‘손긔졍’이었다. 때로는 KOREA 옆에 한반도를 그려 넣기도 했다. 손기정은 한글로 사인을 한 일에 대해 생전에 이렇게 이야기했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참가했던 김은배 선배가 현지에서 사인 요청을 받으면 한글로 써 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그대로 따랐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글로 사인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이 사인을 하기로 돼 있는 독일의 국빈 방명록에도 ‘손긔졍’이라고 한글로 뚜렷이 적혀 있다.

베를린 현지의 일본 선수단에서 손기정의 한글 사인이 문제가 됐다. “어째서 한자를 놓아 두고 한글로 사인을 했느냐”고 본부 임원이 따지자 손기정은 “한문으로 이름을 적어 주는 것보다 한글의 글자 획수가 훨씬 적어서 한글로 썼소”라고 대답해 일본인들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일본 선수단은 이 문제를 더 확대하지 않고 덮어 버리기로 했다.

손기정이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일장기를 가슴에 단 것은 경기 출전 때 단 한 차례 뿐이었다. 일본 마라톤팀이 베를린에 도착한 것은 올림픽이 열리기 두 달 전이지만 마라톤 경기가 열리는 날까지 코치가 아무리 권해도 손기정은 일장기가 달린 유니폼을 입지 않았다. 일장기가 달린 유니폼을 입지 않는 까닭을 일본 임원이 물으면 손기정은 “중요한 유니폼이니 대회가 시작될 때까지 더럽히지 않도록 간직하겠다”고 둘러댔다. 훈련이 없는 일요일에 선수단은 베를린 현지의 일본인들로부터 자주 초청을 받았지만 그때도 손기정은 일장기가 달리지 않은 양복 차림으로 참석했다. 

1936년 8월 25일, 손기정이 우승한 8월 9일부터 16일이 지난 날 동아일보 석간에 실린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가 지워져 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발견한 곳은 서울 용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 20사단 사령부였다. 그때가 오후 4시쯤이었는데 제 20사단 사령부는 재빨리 동아일보에 출두를 명령하고 신문의 발송과 배달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오후 3시쯤이면 인쇄가 끝나 동아일보는 이미 대부분 발송과 배달이 끝난 상태였다.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는 일장기가 사라진 동아일보를 보자 책상을 치며 격노했고 일본 경찰이 동아일보에 밀물처럼 들이닥쳤다. 사건 직후 동대문경찰서와 종로경찰서의 유치장은 동아일보 사원들로 가득 찼다. 이들 연행자 가운데 일장기 말살(抹殺) 사건의 주요 용의자로 꼽힌 인물은 사진 수정을 가장 먼저 생각해 내고 제안한 체육 주임 기자 이길용(후배 체육 기자들은 그를 기려 해마다 우수 기자에게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수여하고 있다), 사회부장 현진건('운수 좋은 날’ 등으로 유명한 소설가), 잡지부장 최승만, 사진과장 신낙균, 사진 제판 기술자 서영호 다섯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돼 석방됐지만 이들 다섯 명은 40일 동안 풀리지 않은 채 고문에 시달렸다. 고문의 주된 목적은 일장기 말살이 동아일보 창설자 김성수(조선체육회 창립 발기인)와 사장 송진우(조선체육회 이사)의 직접 지시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는 걸 자백 받으려는  것이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동아일보를 아예 없애 버릴 속셈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문을 심하게 해도 사실이 아닌 자백을 받아 낼 수는 없었다.

동아일보는 8월 29일자로 무기한 간행 정지 처분을 받았고 이길용 등 다섯 명은 언론계로부터 영구 추방당하는 것을 조건으로 풀려났다. 이길용은 종로경찰서에 유치돼 있던 9월 25일자 사내 처분으로 사직당했다. 풀려난 뒤에도 일본 경찰의 감시는 심해 사사건건 이길용의 언동을 트집 잡아 여러 차례 구속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이길용의 곧은 민족정신을 존경하는 마을 유지들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쌀가마와 장작을 보내 이길용의 살림을 돕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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