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BA 골든스테이트의 스티브 커 감독이 심판 판정에 불만을 제기하다 엄청난 벌금을 내게 됐다.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미국 프로 농구 NBA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스티브 커 감독이 심판 판정에 공개적으로 불만을 제기해 2만5,000달러 벌금을 내게 됐다고 한다.  

NBA 사무국은 21일(이하 한국 시간) 커 감독에게 벌금 징계를 내렸는데 관련 내용을 보고 입조심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약 3천만 원이니 적지 않은 돈이다. 커 감독은 17일, 127-121로 이긴 토론토전이 끝난 뒤 라디오 인터뷰에서 “트래블링에 지나치게 관대한 것 아니냐.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아챈 걸, 그걸 보기 위해 돈을 받는 사람 3명만 몰랐다"고 말했다고 한다.    

‘돈을 받는 사람’은 심판이다. 커 감독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심판은 할 일이 많다. 수비자 3초 룰도 봐야 하고, 선수들끼리 접촉은 없었는지도 봐야 한다. 그런데 가장 기본적으로 봐야 할 농구의 기본만 빼고 다 보고 있다. 바로 트래블링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종목에서도 심판 판정에 대한 불만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심판에게는 ‘동네북’이라는 말이 붙게 된다. 이 역시 세계적인 현상일 것이다. 

국내 프로 농구 KBL 2006~07 시즌에서는 ‘캐링 더 볼(오버 드리블)’을 엄격하게 보는 문제로 논란이 있었고 역사가 깊은 시빗거리인 ‘공격자•수비자’반칙 판정 문제도 예외 없이 터졌다.  비난의 화살을 맞고 손가락질을 당하지만 아무나 못하는 게 심판이다. 심판 판정 문제로 워낙 말이 많으니까 농구에서는 스타플레이어 출신을, 축구에서는 외국인을 심판으로 투입하기도 했다.     

동네 축구에서도 심판 보기가 경기하는 것보다 어렵다. 규칙을 숙지하고 있어야 하고 모든 동작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선수들과 함께 뛰는 축구, 농구, 핸드볼 등을 포함해 체력은 기본이다. 축구의 ‘쿠퍼 테스트’는 진짜 사나이‘ 체력 테스트를 능가한다.   
 
야구에서 투수의 보크 동작은 말로만 설명해서는 알 수가 없다. 1960~70년대 심판 판정 문제로 말썽이 끊이지 않았고 전국체육대회에서는 폭력 사태까지 있었던 배구도 마찬가지다. 캐치볼이나 더블 콘택트 같은 반칙은 심판이 이 반칙을 ‘손으로’알고 있어야 한다. 농구에서는 커 감독이 지적한 트래블링과 캐링 더 볼이 그럴 것이다.       


▲ 초창기 프로 야구에서는 판정 문제가 끊이지 않았고 심판들은 서러울 때도 많았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없음)

심판은 서러울 때도 있다. 초창기 프로 야구 심판 가운데에는 실업 야구 철도청 출신이 여럿 있었다. 철도청은 1960~70년대 하위권 팀이어서 우수 선수가 거의 없었다. 은퇴 후 지도자가 되기 어려웠고 현업으로 돌았으나 박봉이었다. 

그래서 용돈이라도 벌 요량으로 심판으로 나선 이들이 꽤 있었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프로 야구 출범 후 전임 심판으로 임용됐다. 또 지방에서 활동하던 심판들이 전임 심판진에 합류했다. 이러다 보니 감독은 물론 새카만 후배들까지 심판을 얕잡아 봤다. “네가 뭘 아느냐”는 식이었다. 심지어는 욕설도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다른 종목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타플레이어 출신을 심판으로 세운 까닭이기도 하다. 전문직인 심판 분야에서도 이름값이 있어야 한다는, 웃지 못할 현실이었다. 

물론 심판 스스로 문제도 있기는 하다. 

1984년 9월 30일, 대구시민구장에서 삼성 라이온즈-롯데 자이언츠의 한국시리즈 1차전이 열렸다. 롯데 선발투수 최동원-삼성 선발투수 김시진과 구원 투수 권영호의 투수전이 이어졌다. 최동원은 이만수와 장효조, 박승호, 정현발, 장태수, 오대석, 배대웅 등 누구 하나 가볍게 볼 수 없는 삼성 타선을 9이닝 7안타 6탈삼진 3사사구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한국시리즈 사상 첫 완봉승을 거뒀다.  

김시진은 2회 초 박용성에게 2점 홈런, 4회 초 김용희에게 좌월 2루타를 맞았지만 3이닝 4안타 2탈삼진 3사사구의 그리 나쁜 투구 내용이 아니었다. 이어 던진 권영호는 6이닝 3안타 2탈삼진 무실점이었다. 롯데가 4점을 뽑았지만 사실상 투수전이었다.

관중들은 최동원과 김시진, 권영호의 공 하나하나에 숨을 죽였다. 주심의 스트라이크존은 경기 내내 흔들리지 않았다.  판정에 대한 자신감은 단호한 몸짓으로 나타났다. 프로 출범 첫해에 이어 또다시 한국시리즈에 나선 ‘호화 군단’삼성으로서는 아쉬운 시리즈 첫 패배였다. 그러나 감독과 선수는 물론 구단 관계자와 관중 그 누구도 심판 판정에 대해 뒷말이 없었다. 

그리고 10월 9일 잠실구장. 3승3패로 팽팽한 가운데 맞이한 7차전에 나선 주심은 1차전 주심이었다. 2차전 이후 주심을 돌아가면서 맡았으니까 7차전 주심으로 다시 1차전 주심이 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꼭 그렇게 정해 놓은 건 아니었다. 6명으로 짜인 그해 한국시리즈 심판진에서 1, 7차전 주심은 막내였다. 난다 긴다 하는 선배들이 위에 있었지만 이 심판은 시리즈의 가장 중요한 경기가 된 1차전과 7차전을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뒷날 7차전 주심 선정 문제를 놓고 삼성과 롯데 구단 관계자가 두세 차례 ‘거부권’을 행사한 뒤 “아무개면 OK”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자질과 그 외 여러 문제들이 색안경을 끼고 심판을 바라보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심판은 결코 주연이 될 수 없지만 경기를 이끌어 가는 조연으로 대접 받고 제대로 평가 받아야 한다. 그래야 해당 종목이 발전한다. 이 사실만은 분명하다. 

1982년 3월 27일,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삼성-MBC 청룡의 프로 야구 개막전 주심으로 1990년대 KBO 심판위원장으로 활동한 원로 야구인 김광철 씨의 회고는 심판 위상 문제와 관련해 귀담아들을 만하다. 

“(프로 야구) 초창기 감독들이 심판을 하대하듯 한 까닭은 아마추어 실업 야구 시절부터 이어져 온 일종의 관행 비슷한 것이었다. 미국 심판학교 연수 등 심판들이 꾸준히 실력을 쌓고 스스로 위상을 높여 가다 보니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런 현상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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