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2016년은 극심한 소용돌이 속에 새로운 시대를 연 해로 기억될 전망이다. 한국 체육도 같은 길을 걸었다. '국정 농단 의혹'이 태통령 탄핵으로 이어지는 정국에서 체육은 태풍의 눈이었다. 그러나 큰 피해 속에서도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야구와 축구 등 각 종목은 변함없는 사랑 속에 소중한 싹을 키웠다. 바둑발 '알파고 신드롬' 속에서 인간과 기계, 스포츠의 정의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나오기도 했다. 스포티비뉴스는 어느 해보다 다사다난했던 한국 스포츠의 2016년을 10개의 키워드로 정리한다.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한국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여름철 올림픽에서 목표인 '10-10'에서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금메달은 9개로 목표치에 1개가 모자랐지만 금메달 우선 기준 종합 순위는 8위로 목표를 이뤘다. 사실상 대한체육회 관리 종목이 아닌 여자 골프에서 박인비가 금메달을 따지 못했으면 종합 순위가 이탈리아와 호주, 네덜란드에 밀려 11위가 될 뻔했다. 

절반의 성공이지만 한국과 완전히 정반대에 있는 곳에서 열린데다 대한체육회 통합과 박태환 출전 문제 등 경기 외적인 일들로 어수선한 가운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경기력 측면에서 보면 확실하게 나타난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전통의 효자 효녀 종목인 양궁(금 4, 동메달 1개)과 태권도(금 2, 동메달 3개), 2000년대 이후 효자 효녀 종목으로 떠오른 사격(금 1, 은메달 1개)과 펜싱(금 1, 동메달 1개)은 제 페이스를 지켰다. 이들 4개 종목에서 나온 메달이 전체(금 9, 은 3, 동메달 9개)의 3분의2를 차지했다. 

그러나 남자 축구와 여자 배구가 8강에서 탈락한 단체 구기 종목, 태권도를 뺀 유도와 레슬링 그리고 복싱 등 격투기 종목은 좋지 않은 성적표를 받았다. 

문제는 단체 구기 종목과 태권도를 뺀 격투기 종목의 부진이 리우 올림픽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전망이 강하다는 것이다. 당장 2018년 자카르타 아시아경기대회와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도 이들 종목의 기상예보는 ‘흐림’이다. 

세부 종목에 단체전이 있는 탁구를 포함해도 단체 구기 종목은 리우 올림픽에서 노메달이다. 단체 구기 종목 가운데 남녀 농구, 남자 배구, 남자 핸드볼, 여자 축구, 남자 필드하키, 남녀 럭비(7인제) 등은 아예 본선 티켓을 따지 못했다. 출전 종목 자체가 적었다. 남자 축구, 여자 배구, 여자 핸드볼, 여자 필드하키 등 달랑 4개 종목에 출전했다. 

이는 선수단 규모에도 영향을 미쳤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는 이들 종목 외에 남자 필드하키, 남자 핸드볼이 출전했다. 한국은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서 여자 배구가 동메달을 획득한 이후, 불참한 1980년 모스크바 대회를 빼고 2012년 런던 대회까지 한 대회도 거르지 않고 단체 구기 종목에서 올림픽 메달을 차곡차곡 쌓았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에서는 여자 농구와 여자 핸드볼 은메달, 1988년 서울 대회에서는 여자 핸드볼 금메달과 남자 핸드볼, 여자 하키 은메달을 차지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에서는 여자 핸드볼이 올림픽 2연속 우승의 쾌거를 이뤘다. 1996년 애틀랜타 대회에서는 여자 핸드볼과 여자 하키가 은메달의 기쁨을 누렸다. 

2000년 시드니 대회에서는 남자 하키가 은메달, 야구가 동메달을 획득했다. 이어 2004년 아테네 대회에서는 여자 핸드볼이 은메달을 차지해 단체 구기 종목 메달의 맥을 이어 갔다.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서는 야구가 전승 신화를 쓰면서 한국 올림픽 단체 구기 종목 사상 3번째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여자 핸드볼은 동메달을 획득해 이 대회까지 금메달 2개와 은메달 3개, 동메달 1개로 단체 구기 종목 효녀로서 명성을 확인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남자 축구가 동메달 결정전에서 숙적 일본을 2-0으로 꺾어 대회 유일한 단체 구기 종목 메달을 더욱 빛나게 했다. 

이런 흐름이 리우 올림픽에서 끊겼다. 

세계적인 공격수 김연경을 앞세운 여자 배구는 조별 리그 첫 경기에서 일본을 3-1로 제치고 기분 좋게 출발했다. 강호 러시아와 브라질에 각각 1-3, 0-3으로 졌으나 아르헨티나와 카메룬을 3-0으로 누르고 애초 목표였던 조별 리그를 통과했다. 그러나 김연경만으로 넘기에는 세계의 벽이 높았다. 8강전에서 네덜란드에 0-3으로 완패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금메달의 주역 랑핑 감독이 이끄는 중국은 조별 리그에서는 2승3패로 고전하면서 조 4위로 가까스로 8강에 합류했다. 그러나 준준결승에서 브라질을 3-2로 잡은데 이어 준결승에서 네덜란드를 3-1, 결승에서 세르비아를 3-1로 물리치고 2004년 아테네 대회 이후 12년 만에 다시 금메달에 입을 맞췄다.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때 뒤늦게 올림픽 무대에 데뷔했으나 리우 올림픽을 계기로 여자 배구 역대 메달에서 금메달 3개와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로 일본(금 2, 은 2, 동메달 2개)을 앞질렀다. 한국으로서는 “김연경 같은 선수가 두 명 더 있었으면…”이라는 푸념 아닌 푸념을 하면서 동아시아 라이벌 두 나라의 올림픽 성적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남자 축구의 메달 실패는 많은 축구 팬들을 상심하게 했다. 한국은 조별 리그에서 피지를 8-0으로 완파한데 이어 강호 독일과 3-3으로 비기고 난적 멕시코를 1-0으로 잡아 애초 기대치보다 좋은 성적인 조 1위로 8강에 올랐다. 그러나 만만하게 보았던 온두라스에 일방적인 공격을 퍼붓고도 역습 한 방에 메달 문턱에서 무너졌다. 올림픽 2연속 메달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여자 핸드볼과 여자 필드하키는 각각 1승 1무 3패와 1무 4패로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이렇다 할 경기도 펼치지 못하고 조별 리그 통과에 실패했기에 나쁜 성적에 대한 무력감이 더했다. 

단체 구기 종목의 올림픽 참가가 적었던 이번 대회의 아쉬운 성적은 대회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된 결과였다. 그러나 단체 구기 종목에 쏠리는 스포츠 팬들, 나아가 국민적 관심이 크다는 점에서 이번 대회 부진은 뼈아프다. 

남자 농구의 경우, 기존 강호 중국은 물론 이란 레바논 등 서아시아 나라들과 되살아난 1960년대의 강호 필리핀 등의 실력이 한국보다 앞서고 여자 농구는 ‘일본판 박찬숙’인 도카시키 라무(25)를 앞세운 일본이 당분간 강세를 유지할 것으로 보이는데다 중국의 전력이 여전해 다음 올림픽도 본선 진출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다.      

남자 배구도 동아시아 라이벌인 중국과 일본은 물론 이란과 카타르, 축구처럼 아시아연맹에서 활동하고 있는 호주 등 강호들이 많아 남자 농구와 비슷한 상황이다. 여자 배구는 주력인 김연경이 4년 뒤에는 32살이 되고 김연경을 뒷받침할 선수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아 역시 미래가 밝지 않다.  

남자 축구는 언제든 올림픽 본선에 나설 수 있는 선수층을 확보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올해 열린 16세 이하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서 4강 진출에 실패했고 2017년 열리는 FIFA(국제축구연맹) 17세 이하 월드컵에 나서지 못해 일말의 불안감이 있다. 이 연령대 선수들이 2020년 도쿄 올림픽 때 일부 주전으로 뛰게 된다. 내년에 한국에서 열리는 FIFA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한국이 어느 정도 성적을 올리느냐에 따라 3년 뒤 올림픽 본선 진출과 성적을 예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자 축구는 선수층이 얇은데다 북한과 중국, 일본이 꾸준히 경기력을 유지하고 있어 올림픽 본선에 나서는 게 매우 힘든 실정이다. 남녀 핸드볼과 남녀 하키는 체력과 정신력을 융합한 ‘한국형 플레이’의 한계를 보이고 있어 1980~90년대의 영광을 재현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2020년 도쿄 올림픽 단체 구기 종목에서 현실적으로 메달을 기대할 만한 종목으로는 야구를 꼽을 수 있다. 2008년 베이징 대회를 끝으로 올림픽에서 사라진 야구는 12년 만에 올림픽 무대에 복귀하는데 출전국이 6개로 줄어 본선 티켓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다.  

최근 우수 선수들이 메이저리그로 대거 진출하면서 한국 야구의 경쟁력이 크게 강화됐지만 이런 변화가 올림픽 메달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메이저리그가 여전히 IOC(국제올림픽위원회)에 비협조적이기 때문에 메이저리거가 올림픽에 출전하는 일은 실현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당연히 올림픽 야구 종목 기간 메이저리그 정규 시즌 일정이 중단되는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KBO 리그의 수준을 지속적으로 높여야 ‘디펜딩 챔피언’으로서 위상을 지킬 수 있다. 

격투기 종목이 한국 스포츠 발전에 이바지한 내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먼저 복싱을 보자. 1945년 해방 이후 올림픽 첫 메달의 영예를 안은 종목은 복싱과 역도다.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플라이급의 한수안은 역도의 김성집과 함께 신생 대한민국에 첫 올림픽 동메달을 안겼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는 밴텀급의 강준호가 역도의 김성집과 함께 동메달을 차지했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는 밴텀급의 송순천이 한국 올림픽 출전 사상 첫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역도의 김창희가 동메달을 보탰다. 

1960년 로마 대회는 한국 올림픽 출전사에 유일한 노메달 대회다. 복싱은 메달 기대주였던 김기수(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리스트)가 웰터급 16강전에서 홈 링의 니노 벤베누티에게 판정패하는 등 6명의 선수가 모두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김기수는 로마 올림픽 6년 뒤인 1966년 6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매치에서 니노 벤베누티를 판정으로 누르고 한국인 첫 프로 복싱 세계 챔피언이 됐다.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는 밴텀급의 정신조가 은메달,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는 라이트플라이급 지용주가 은메달, 밴텀급 장규철이 동메달을 차지했다. 금메달만 없었지 그 무렵 아마추어 복싱은 최고의 효자 종목이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에서 신준섭(미들급)이 올림픽 복싱 금메달의 물꼬를 텄고 1988년 서울 대회에서 김광선(플라이급)과 박시헌(라이트미들급)이 복싱 금맥을 이었다. 한국 복싱은 역대 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와 은메달 7개, 동메달 10개를 차지했다. 그러나 리우 올림픽에는 달랑 한 체급만 출전했다. 애초 전 체급 출전 실패의 불명예를 안을 뻔했으나 대체 출전의 행운을 얻었다. 메달은커녕 본선 출전에 기뻐해야 할 지경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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