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타임 르포] '맘대로 즐겨주신' 여성 팬들 반갑습니다, 축구를 즐기는 또 다른 방법들

2019-03-29     유현태 기자
▲ 인사하는 태극전사, 화답하는 팬들. ⓒ연합뉴스
[스포티비뉴스=유현태 기자] 축구는 남자들의 스포츠라는 인식이 있다. 남녀가 유별하다는 식의 구시대적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자라온 환경이 그랬다. 학창 시절 점심 시간에 몰려나가 공을 차는 것은 늘 남자들이었다. 심지어 남학생들 사이에선 축구를 잘하는 사람이 대우를 받고 살았다. 최소한 나의 학창 시절에 축구를 함께 즐기던 '여자 친구'는 없었다.

그렇게 생긴 인식은 경기장을 직접 관람하면서 굳어졌다. 언제나 축구장엔 남자들이 북적였다. 처음 축구 경기장을 찾았던 기억은 1999년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렸던 한국과 이집트의 코리아컵 경기였다. 처음 접해보는 붉은 악마의 단체 응원에선 굵직한 '형님'들 목소리가 들렸다. 이후로도 수없이 찾은 경기장에선 남자들의 목소리가 우세했다.

6만 4388명이 모인 한국-콜롬비아전에선 여성 팬들이 경기장 분위기를 주도했다. 킥오프 2,3시간 전부터 여성 팬들로 경기장이 북적였다. MD샵에 들르기 위해서, '인증 샷'도 찍을 겸 일찍 경기장에 온다. 이제 축구장을 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문화가 되버린 것 같다. 경기장에 입장하는 여성 팬들에게 일찍 온 이유를 묻자 "MD상품을 구매하려고 일찍 왔다"고 한다.

단순히 수적 증가보다도 질적으로도 진화한 느낌. 대표팀 관련 '굿즈'들을 손에 들고 있다. 유니폼을 입고 있거나 대형 수건을 두르고 있거나 최소한 야광봉이나 머플러를 목에 걸고 있다. 지난해 우루과이전부터 변화의 조짐이 느껴졌다. 여성 팬들이 경기장을 즐기기 시작하니 당연히 '커플'도 늘어날 터. 축구장 분위기가 예전보다 활기가 넘친다면 비약일까.

예전엔 찾아보기 어려웠던 고음의 환호성이 터진다. 콜롬비아전에선 최고 112데시벨의 함성이 나왔다.

신선한 충격이다. 축구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다. 분명 이전까지 알고 있던 '축구 즐기기'와 다르다. 축구를 잘 아는 사람이 축구장을 잘 즐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그것이 아니었다.

최근 인터넷에선 '축알못(축구를 알지 못하는 사람)', '축잘알(축구를 잘 아는 사람)' 등 용어가 심심치 않게 쓰인다. 축구 경기 자체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척도다. '축잘알'이 되고 싶다면 선수 개개인을 잘 알고, 각 팀마다 지닌 특성을 잘 알아야 한다. 여기에 포메이션, 라인컨트롤, 빌드업, 공수 전환 속도와 전개 방식 등 전술적인 면도 포함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슨 단어인지 감도 오지 않을 것이다.

축구를 잘 아는 여자 팬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 축구 팬에 비해선 절대적 수가 부족했다. 생활 체육 수준부터 축구를 즐기는 수는 압도적으로 남자가 많다. 군대에 다녀왔다면 선임의 등쌀에 못 이겨 축구를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들은 손쉽게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이른바 '축잘알'은 남자들에게 압도적으로 자주 붙는 수식어였다.

하지만 축구장을 즐기는데 축구를 바삭하게 잘 알 필요는 없다. "어렸을 때 오고 오랜만에 경기장에 다시 온다"던 한 여성 축구 팬의 얼굴엔 설렘과 기대감이 가득하다. 비단 성별로 나눌 문제도 아니다. 나름대로 축구장을 이미 충분히 즐기고 있는데, 굳이 축구를 전술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 좋아하는 선수 굿즈도 사고, 골이 터질 것 같은 느낌에 가슴을 두근거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맛있는 음식과 경기장을 즐기는 것도 좋다. 그렇게 자꾸 경기장을 찾다보면 축구 자체도 눈에 익고 경기를 읽는 눈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축잘알'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최근 한국 축구 대표팀의 A매치 6연속 매진을 기록했다. 살아나는 분위기의 중심엔 확실히 여성 팬들이 있다. 서울월드컵경기장 내 MD샵을 운영하는 풋볼팬타지움 관계자는 "월드컵 전까진 가족 단위 고객들이 많았다. 아시안게임 이후엔 고객의 70% 이상이 여성 팬이다. 함께 경기장을 찾는 연인들의 숫자도 상당하다"고 말한다. 단순히 A매치뿐 아니라 K리그 현장에서도 변화를 느낄 수 있다. 특히 새로 개장해 화제를 몰고 온 DGB대구은행파크에서 여성 팬들의 목소리가 대단했다.

'한낱 공놀이'일 수 있는 축구가 이렇게 큰 산업이 된 것은 즐기는 팬들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미리 정해놓은 방식대로 경기장을 즐길 필요는 없다. 여성 팬들의 증가와 함께 새로운 '축구 즐기는 법'이 탄생해 반가울 뿐이다.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그렇게 축구를 즐기면 충분할 것 같다. 예전과 달리 경기장을 함께 채워주는 여성 팬들이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