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보다 미라클의 자부심…"내가 은퇴해도 두산 야구는 계속된다"
[스포티비뉴스=잠실, 김민경 기자] "내년, 내후년, 내가 은퇴한 뒤에도 두산 베어스라는 구단은 남고, 두산 베어스 야구도 계속된다."
두산 베어스 3루수 허경민(32)에게 3일 잠실 삼성 라이온즈전을 앞두고 KIA 타이거즈와 5강 싸움을 어떻게 전망하는지 묻자 조금은 심오한 답이 돌아왔다. 당장 올해 몇 위를 하는 것보다 두산이 계속해서 좋은 야구를 하는 팀으로 남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고 했다.
허경민은 "결과는 어차피 하늘이 정해주는 것이다. 승패는 어찌 될지 모르니 선수는 그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래서 당장 올해 '몇 위를 하겠다', '가을야구에 가겠다'는 뻔한 말을 하진 못하겠다"고 입을 열었다.
이어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 내년, 내후년, 내가 은퇴한 뒤에도 두산이라는 구단은 남아 있고, 두산의 야구도 계속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두산이 좋은 팀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신경 쓰면서 경기에 나서고 있다"고 덧붙였다.
두산 유니폼을 입은 자부심이 묻어나는 말이다. 허경민은 지난 시즌을 앞두고 두산과 7년 85억원에 FA 계약하며 원클럽맨의 길을 선택했다. FA 시장에서 복수의 구단이 허경민을 영입하기 위해 오퍼를 넣었지만, 결국 허경민은 2009년 19살 까까머리 시절부터 함께한 두산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는 쪽을 선택했다. 지난해 두산이 KBO 구단 최초로 7년 연속 한국시리즈 무대에 올랐을 때는 "한 가지 장담한다. 내가 야구를 계속 하는 한 7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가는 팀은 두산밖에 없을 것"이라며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프로는 성적으로 말한다. 우승과 1등만 기억하는 게 냉정한 프로의 세계다. 두산은 2015년부터 2021년까지 늘 한국시리즈 무대에서 정상을 다퉜기에 명문 구단이라는 수식어를 달 수 있었다.
명문 구단도 해마다 전력은 바뀐다. 두산은 영광스러운 7년을 보내는 동안 내부 FA 유출로 전력이 점점 약화됐던 게 사실이다. 양의지 박건우 이용찬(이상 NC), 오재일 이원석(이상 삼성), 민병헌(롯데→은퇴), 김현수(LG), 최주환(SSG) 등 유출 전력의 면면도 화려하다. 그런데도 늘 우승을 다투는 기적을 썼다.
버티고 버텼지만, 이제는 한계라는 것을 경기를 뛰는 선수들이 가장 잘 느끼고 있다. 베테랑 유격수 김재호는 "아무래도 우리도 선수층이 계속 한 명씩 빠져 나가다 보니까 채울 수 있는 한계점이 조금씩 드러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세대교체 속에 어린 선수들이 잘해주고 있지만,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 게 사실이다.
그래서 허경민을 비롯한 두산 주축 선수들은 어린 선수들이 더 뛰어놀 수 있는 판을 깔아주려 애쓰고 있다. 안방마님 박세혁은 "나도 2019년에 선배들이 이끌어줘서 덩달아 잘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내가 선배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후배들을 이끌어야 한다. (김)재호 형이 최고참인데 이제 형이 앞에서 끌고 가기에는 솔직히 너무 힘들다는 것을 잘 안다. 나랑 (허)경민이, (정)수빈이, (김)재환이 형, (양)석환이가 더 힘을 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한다.
두산은 올 시즌 41승49패2무로 6위에 머물러 있다. 후반기 들어 페이스를 많이 끌어올렸는데도 5위 KIA(48승45패1무)와 5.5경기차가 난다. 남은 52경기에서 쉽게 좁히기는 어려운 거리다.
역사적인 7년을 몸소 체험한 허경민은 말한다. 우선순위를 '5위 추격'이 아닌 '두산다운 야구'에 두자고. 두산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지키기 위한 야구를 한다면 설령 올해는 어려워지더라도 내년, 내후년에는 쉽게 무너지지 않고 또 정상에 도전하는 미라클 두산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1등보다는 미라클의 자부심. 지난 40년 동안 베어스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품고 지켜온 가치다. 허경민의 바람대로 이 가치는 올해도, 내년에도, 또 허경민이 유니폼을 벗은 뒤에도 지켜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