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돈 많이 드는 운동은”이라는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 스포츠 팬들이 골프를 꼽을 것이다. 테니스도 대중 스포츠로 자리 잡기 전인 1970년대에는 돈이 많이 드는 운동으로 꼽혔다. 흰 테니스복을 입고 '윌슨' 테니스 라켓 가방을 멘 채 교정을 거니는 여학생은 남학생들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사격도 돈 드는 운동이다?
대한체육회 90년사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1966년 한국 스포츠가 거둔 가장 큰 성과는 그해 12월 9일부터 20일까지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주최국 태국을 간발의 차이로 따돌리고 대회 출전 사상 처음으로 일본에 이어 종합 순위 2위에 오른 것이다. (중략) 센터파이어 권총 단체전과 자유권총 단체전에서 금메달 시상대에 올랐고 추화일은 소구경복사에서 금과녁을 명중했다. 사격에서는 은메달 4개와 동메달 1개를 더했다. 경기용 총를 구하기 어려워 주한 미군에 빌어 쓰고 탄알이 모자라 훈련량이 절대 부족한 가운데 얻은 성과이기에 큰 의미가 있었다.
이런 여건에서도 한국 사격은 이 대회 바로 앞 대회인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남상완이 자유소총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서강욱은 자유권총 은메달, 배병기는 소구경소총3자세 동메달을 각각 차지했다. 사격이 국제 대회에서 메달을 딴 것은 1955년 대한사격협회(1965년 대한사격연맹으로 개칭)가 창설된 이후 처음이었다.
이에 앞서 1956년 멜버른 대회에 올림픽 출전 사상 처음으로 참가해 김윤기(감독 겸 선수)와 추화일이 50m 권총과 300m 소총 3자세에서 각각 30위와 19위를 기록했다. 이어 1960년 로마 올림픽(권총 트랩 3명)과 1964년 도쿄 올림픽(권총 소총 트랩 10명), 멕시코시티 올림픽(권총 2명)에 잇따라 출전했으나 메달권에 들지 못했다.
그리고 1972년 뮌헨 올림픽, 이 대회를 앞두고 대한체육회는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에 이어 다시 한번 6위 이내 입상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는 종목 및 선수 위주로 소수 정예 선수단을 꾸리기로 했다. 이에 따라 1차적으로 확정된 선수단은 여자 배구와 복싱, 역도, 레슬링, 유도 등 5개 종목에 39명(임원 13명 선수 26명)이었다. 이는 1952년 헬싱키 대회보다 4명이나 적은 역대 최소 규모였다.
그러나 7월 프랑스에서 열린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을 세트스코어 3-0, 북한을 3-1로 꺾고 본선 티켓을 손에 넣은 남자 배구(임원 2명 선수 12명)가 합류한 데 이어 서독 현지에서 전지훈련을 하고 있던 육상의 박상수(남자 높이뛰기)와 백옥자(여자 포환던지기) 그리고 수영의 조오련, 역시 현지에서 전지훈련을 하고 있던 사격 대표 팀(임원 1명 선수 5명)이 추가되면서 62명(임원 6명 선수 46명)으로 선수단 규모가 크게 늘었다.
사격은 입상 가능성이 높지 않았지만 대한사격연맹의 강력한 요청으로 선수단에 포함됐다. 그러나 성적은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소구경복사에서 최충석이 60위, 트랩에서 김태석이 33위, 김남구가 41위 그리고 스키트에서 박도근이 44위, 박성태가 56위에 그쳤다. 사격은 다른 종목 관계자들의 눈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그런 가운데 이 대회에서 여름철 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북한이 사격에서 덜커덕 금메달을 획득했다. 50m 소총 복사에서 출전한 리호준은 599점(600점 만점)의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2위인 미국의 빅터 아우어와 3위인 루마니아의 니콜라 로타루가 598점의 올림픽 신기록을 세웠을 정도로 치열한 경쟁 속에 얻은 금메달이었다. 리호준은 기자회견에서 “적의 심장을 쏘는 총을 쏘는 자세로 사격을 했다”고 말했다. 올림픽 정신에 어긋나는 말이기도 했고 한국 사격 관계자들에게는 비수와 같았다.
북한은 이후 올림픽 사격 종목에서 메달 두 개(2004년 아테네 대회 50m 권총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 50m 권총)를 보태는 데 그쳤다.
한국은 1988년 서울 대회 차영철(50m 소총 복사 은메달)을 시작으로 진종오(금 4 은 2)를 앞세워 올림픽 사격에서 금메달 7개와 은메달 8개, 동메달 1개로 북한을 압도하고 있다. 종목별 금메달 순위에서 양궁(23개) 태권도(12개) 유도 레슬링(이상 11개)에 이어 5위인 효자 효녀 종목으로 성장한 것이다.
아시아경기대회에서도 한국과 북한의 사격 종목 경쟁은 별 의미가 없다. 한국 홈 사선이긴 하지만 2014년 인천 대회에서 한국이 금메달 8개와 은메달 11개, 동메달 8개(종목 2위)를 차지한 가운데 북한(종목 6위)은 금메달1개와 은메달 3개 동메달 1개에 그쳤다. 카자흐스탄과 카타르, 쿠웨이트에도 뒤진 순위였다.
사격에서 남북 경쟁 시대를 상징하는 일이 1978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벌어졌다. 이 대회 한국의 사격 종목 유일한 금메달리스트인 박종길(25m 속사권총)이 시상대에 함께 오른 북한의 서길산에게 악수를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한국이 금메달 1개와 은메달 6개 동메달 8개에 그친 반면 북한(금 6 은 5 동 1)은 중국(금 8 은 4 동 7)에 이어 종목 2위를 차지했으니 이렇게 쌀쌀맞게 굴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한동안 ‘소길산’으로 잘못 알려졌던 서길산은 그 무렵 북한 사격 권총 종목의 주전 선수였다. 아시아에서는 박종길과 치열하게 경쟁했고 1976년 몬트리올 대회와 1980년 모스크바 대회,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에 출전했다. 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1980년 모스크바 대회 50m 권총에서 4위에 오르며 세계적인 수준의 경기력을 보였다. 1976년 몬트리올 대회 25m 속사권총에서는 박종길과 공동 15위를 기록했다.
국제 대회에서 자주 만나 낯이 익은 박종길이 내민 손을 거절한 서길산의 속마음은 그 외에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은메달에 그쳐 속이 상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고 한편으로는 당시 남북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 장면이기도 했다.
서길산은 이후 북한 사격 대표 팀 임원이 돼 주요 국제 대회에서 한국 사격 관계자들과 교류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북한이 다음 달 31일 창원에서 막을 올리는 제5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에 출전하기로 했다. .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은 5일 남북 통일 농구 방북단이 묵고 있는 고려호텔을 방문해 조명균 통일부 장관 등 한국 정부 대표단과 환담을 나눴는데 이 자리에서 한 김 부위원장의 발언 내용이 글쓴이의 눈길을 끌었다.
김 부위원장은 "이남(以南, 한국)에서 진행될 공개 탁구 경기에 우리가 나가게 될 것"이라며 "창원에서 열리는 사격 경기 대회에도 나가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사격 선수들이 총으로는 잘 못 쏜다"며 "탁구 경기도 옛날에는 좀 있었는데 퇴보했다. 남 측에서 좋은 경험을 해 기술을 배우는 것이 우리 선수단에 (좋을 것)"라고 덧붙였다.
김 부위원장이 언급한 공개 탁구 경기는 2018년 국제탁구연맹(ITTF) 코리아 오픈(17일~22일 대전), 사격 경기 대회는 제5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다. 북한은 이 두 대회에 모두 참가한다고 6일 밝혔다.
“총으로는 잘 못 쏜다”가 어떤 의미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 말에서 글쓴이는 이 기사 맨 앞에 있는 1960년대 한국 사격 훈련 여건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