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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현의 보면 볼수錄] 이정은과 US오픈, '메달리스트' 아버지

박대현 기자 pdh@spotvnews.co.kr 2019년 06월 03일 월요일

[스포티비뉴스=박대현 기자] '모든 아버지는 명심해야 한다. 결국 아들이 따르는 건, 당신의 행동이지 말이 아니다(Every father should remember that one day his son will follow his example instead of his advice).'

5년 전 개봉한 영화 '더 저지'는 부자(父子)간 불화를 다룬다. 원칙주의자 판사 아버지(로버트 듀발)와 유능한 변호사 아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사이 질척한 곡해의 벽을 비춘다.

왕래가 없던 둘은 어머니 리사 죽음을 계기로 십 몇 년 만에 다시 만난다. 보는 이도 숨막히는 어색한 공서(共棲). 변화 물꼬는 아버지가 교통사고 살해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트인다. 아들 행크가 무료 변론을 맡으면서 둘 사이 벽이 조금씩 허물어진다. 곡해가 이해로 바뀐다.

아버지 조셉은 눈 감기 직전 아들에게 말한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변호사가 누구냐고 물었지. 나에겐 너다(I choose you)."

능력 있고 주변에 살가웠던 명망 높은 판사 아버지는 칠십 평생 아들을 칭찬한 적이 없었다. 사랑하면서도 따듯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건넬 줄을 몰랐다. 그랬던 아버지가 아들을 인정했다. 처음으로. 일찍이 없던 아버지 '행동'에 죄 없는 피고는 돈이 안 된다며 쳐다보지도 않던 속물 아들도 감화된다. 가치관과 행동거지가 달라진다. 돈오한 것이다.

'효녀 골퍼' 이정은(23)이 3일(한국 시간) 한국 여자 골퍼로는 10번째로 US오픈을 거머쥐었다. 최종합계 6언더파 278타로 유소연과 렉시 톰슨(미국)을 2타 차로 따돌렸다. 

이정은 아버지 이정호 씨는 20년째 휠체어를 탄다. 트럭 운전사로 생계를 책임지던 이 씨는 이정은이 4살 때 교통사고를 당했다. 후유증으로 하반신이 마비됐다. 집안 살림이 궁핍해졌다.

이정은은 철이 일찍 들었다.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 가정 형편에 도움 되고자 초등학교 때 그만뒀던 골프를 다시 시작했다. 레슨 프로를 꿈꿨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가족을 먹여살려야한다는 생각이 그를 붙들었다. 바지런히 연습장을 향했다. 부전여전. 아버지 역시 장애를 안으면서도 외동딸 꿈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했다. 넉넉치 않은 형편에도 아파트 담보 대출을 받는 등 딸을 선수로 키우기 위해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씨는 '행동'으로 보여 줬다. 실의에 빠지지 않았다. 2012년 장애인전국체전 탁구 복식에 나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듬해에도 시상대 맨 위에 올랐다. 2017년엔 단체전 은메달을 따기도 했다. 메달리스트 아버지였다.

이정은은 그런 아버지를 보며 성장했다. 소문난 독종 기질은 아버지 인생 2막에서 연유했을 터. 부족한 형편 탓에 '헌 골프채만 쓴다'며 놀림 받던 딸은 아버지가 보여 주는 행동을 등대로 삼았다. 곁눈질 없이 스윙만 했다.

늦깎이였지만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다. 이정은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베어크리크배 전국대회에서 우승했다. 그 해 국가 대표 상비군에도 이름을 올렸다. 일찌감치 싹을 보였다.

2016년 KLPGA 투어 신인상을 받았다. 데뷔 2년째 기량이 만개했다. KLPGA 투어 4관왕에 올랐다. 상금과 다승, 평균 타수에서 1위를 차지했다. 대상은 수순이었다. 여기에 베스트 플레이어, 인기상까지 싹쓸이했다.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었다.

지난해 11월 LPGA 투어 퀄리파잉 스쿨에 도전했다. 1위로 투어 출전 자격을 얻었다. 파죽지세. 하지만 이정은은 미국 진출을 망설였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 때문이었다. "미국행을 잠시 고민했지만 가족 응원에 결심할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이정은은 가시밭을 헤쳐 나갔다. 역전 우승 기로였던 10~12번홀에서 '대전환'은 노력형 승부사 기질을 오롯이 보여 준다. 후천적 장애를 딛고 체전에서 우승한 아버지처럼 고비마다 엉킨 넝쿨을 손수 잘랐다. 이 씨는 "딸이 끝까지 잘 버텨줘 고맙네요"라고 말했다. 이정은 우승 소감으로도 손색없다.

스포티비뉴스=박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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