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4년 전조선빙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 종합 우승을 차지한 백구 팀 선수들. ⓒ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조선체육회(오늘날의 대한체육회)는 대동강빙상대회보다 2년 뒤인 1925년 1월 5일 한강에서 제1회 전조선빙상경기대회를 개최했다. 경기 종목은 전진부에 100m와 400m, 800m, 1500m, 5000m, 1만m 그리고 후진부에 300m와 600m, 800m 계주가 있었다. 이날은 날씨가 포근해 얼음이 두껍지 않다고 해서 많은 사람이 얼음 위에 몰리면 자칫 얼음이 깨져서 위험할지 모른다며 경찰이 대회 중지를 명령했다. 그러나 주최 측은 선수 63명만 얼음 위에 세운다는 조건으로 경찰을 설득해 대회를 강행했다. 이 대회 청년단 전진부에서 박유돈(평양)은 800m(1분38초)와 1500m(3분23초), 5000m(13분21초) 등 3개 종목 우승을 휩쓸었다. 800m는 요즘 시행하는 세부 종목이 아니다.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 출전 선수 기준으로 1500m는 1분28초(주형준), 5000m는 6분25초61(이승훈)이다. <1편에서 계속>

1927년 1월 5일 한강에서 열 예정이던 제 2회 전조선빙상경기대회는 기온 상승으로 열지 못했다. 1928년 1월에도 조선체육회는 제 3회 전조선빙상경기대회를 한강에서 개최하지 못했다. 높은 기온 때문에 경기를 치르기에 알맞은 두께의 얼음이 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무렵 빙상경기의 우수 선수가 대동강이나 압록강 부근에서 배출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강에 얼음이 어는 결빙기는 서울 한강이 1개월 가량, 평양 대동강이 3개월 가량, 신의주 압록강은 거의 5개월이나 됐다. 서울에서 빙상경기대회를 개최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래도 1960년대까지 한강에서는 꾸준히 빙상경기대회가 열렸다.

높은 기온 관계로 제 2회 대회부터 제 4회 대회까지 치르지 못했던 전조선빙상경기대회 제 5회 대회가 1929년 1월 23일 한강에서 140여명의 선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최재은(백구구락부)과 박응근(의학전문)이 각 종목에서 1, 2위를 휩쓸다시피 했다. 박응근은 500m에서 57초로 우승했는데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모태범의 500m 금메달 기록은 1차 시기 34초923, 2차 시기 34초906이었다.

조선체육회는 1930년 1월 25일 한강에서 동아일보와 공동 주최로 제 6회 전조선빙상경기선수권대회를 열었다. 종전의 전조선빙상경기대회에 ‘선수권’을 넣어 대회 이름을 바꿨다. 대회의 위상을 높인 것이다. 50여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는 6개 종목의 조선 신기록이 세워졌다. 이 대회의 성적으로 백구구락부의 최희원, 최재은, 조점용, 김용구와 의학전문의 박응근, 휘문고보의 문병기 등 6명의 선수가 조선과 만주의 대항 경기인 선만(鮮滿)경기대회 파견 선수로 뽑혔다. 신설된 여자부의 두 종목 500m와 1500m에서는 이혜석이 2관왕이 됐고 남자 500m의 박응근(의학전문⋅54초1)과 1만m의 최재은(백구구락부⋅22분04초8)이 최단거리와 최장거리 우승자가 됐다. 최재은의 1만m 우승 기록은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이승훈이 세운 금메달 기록 12분58초55와 9분여 차이가 난다.

조선체육회는 1931년 1월 25일 서울 한강에서 제 7회 전조선빙상경기선수권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는 전국 각지에서 60여명의 선수들이 참가했다. 이 대회부터 배진(후진, 뒤로 달리기) 경기는 없애고 남자부 500m와 1500m, 5000m, 1만m 그리고 여자부 500m, 1000m 경기를 치렀다. 박건서(의학전문)는 남자 500m에서 53초로 우승했고 1만m에서는 함명순(연광)이 23분46초로 1위를 차지했다. 여자부 500m에서는 이혜석이 1분29초8의 조선 신기록으로 지난 대회에 이어 우승했다.

조선체육회는 1932년 1월 24일 날씨에 신경을 쓰지 않고 빙상경기대회를 열 수 있는 압록강에서 제 8회 전조선빙상경기선수권대회를 열 예정이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일본이 1931년 9월 18일 철도 폭파 자작극을 벌여 일으킨 만주사변 때문에 만주와 한반도 사이의 압록강에서 대회를 갖는 데 불안감을 느껴 개최를 취소했다.

1934년은 우리 빙상경기 선수들이 눈부신 활약을 보인 해다. 전일본빙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 메이지대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김정연과 이성덕, 최용진이 종합 성적 1, 2, 3위를 휩쓰는 놀라운 활약을 보였다. 메이지신궁경기대회 빙상경기에서는 이성덕이 500m를 47초2, 1000m를 1분43초의 일본 신기록으로 달려 우승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1500m도 제패해 3관왕이 됐다. 같은 대회 5000m에서는 김정연이 우승했다.

일본 빙상경기를 누른 우리 선수들의 활약에 한반도 안의 선수들도 고무된 가운데 1934년 1월 21일 서울 한강에서 제 10회 전조선빙상경기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부터는 여자부에 3000m가 신설됐다. 남자부 500m에서 고봉오(백구)가 51초로 우승했고 1만m에서는 김용식(백구)이 19분26초1로 패권을 안았다. 여자부에서는 김영선(강계)이 1500m를 3분24초2, 고 3000m를 7분7초3으로 각각 정상에 올랐다.

압록강에서 가까운 평안북도 강계 출신의 김영선이 여자부 최강자로 올라 선 것은 북한의 한필화가 1964년 인스부르크(오스트리아) 동계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3000m에서 옛 소련의 발렌티나 스테니나와 공동 은메달을 차지한 것과 연계성이 있다. 한필화는 남녀 통틀어 아시아 선수로는 처음으로 동계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에서 메달을 차지했다. 한필화는 평양을 가로지르는 대동강 하구 진남포 출신이다.

1935년 1월 서울 한강에서 조선체육회가 치를 예정이던 제 11회 전조선빙상경기대회는 온화한 날씨 때문에 열리지 못하는 등 그때도 ‘겨울철 온난화’ 현상이 종종 나타났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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