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탁구협회는 1945년 9월 28일 조선탁구협회로 발족했다. 1945년 7월 27일 조선송구(핸드볼)협회, 9월 1일 조선체조협회, 9월 24일 조선육상경기연맹 창립에 이은 것으로 탁구는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뒤 펼쳐진 체육 단체 창립의 선두 그룹이었다. ⓒ대한탁구협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1930년대 한반도에는 여러 탁구 단체가 주관하는 여러 대회가 있었다. 전조선학생탁구연맹의 전조선학생탁구대회, 조선탁구협회의 전조선남자탁구선수권대회와 전조선여자탁구선수권대회, 조선여자체육장려협회의 전조선여자탁구대회 등이다. 이로 미뤄 볼 때 탁구는 축구와 야구, 농구 등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은 인기를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1편에서 계속>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체육계도 활기를 띠면서 종목별 경기 단체 창립이 줄을 잇는다. 해방 직전인 1945년 7월 27일 조선송구(핸드볼)협회가 발족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체조협회(9월 1일), 조선육상경기연맹(9월 24일)에 이어 9월 28일 조선탁구협회(회장 조동식)가 조직됐다. 탁구는 체육 단체 창립의 선두 그룹이었다. 

해방 이후 첫 전국체육대회인 1945년 제26회 대회에도 탁구는 열렸고 남자 일반부 단식에서 최근환이 이경호를 2-0으로 누르고 우승했다. 남자 일반부 복식에서는 최근환-문석황 조가 이명수-김수경 조를 2-1로 꺾고 정상에 올랐다. 1946년 ‘조선올림픽대회’라는 특별한 이름이 붙은 제27회 대회에서는 남중부와 남대부, 여중부, 여대부, 여일반부 등으로 나뉘어 경기를 치를 정도로 인기가 급상승했다.
        
이어 1947년 조선탁구협회는 대한탁구협회로 이름을 바꿨고 1950년 아시아탁구연맹과 국제탁구연맹에 가입했다. 한국전쟁의 와중인 1952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국제 대회 사상 처음으로 출전했고 뒤이어 1956년 도쿄에서 열린 제 23회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 축구가 1954년 스위스에서 열린 월드컵(세계선수권대회)에 처음 나서고, 여자 농구가 1964년 페루에서 개최된 세계선수권대회에 처녀 출전한 사실에 견줘 보면 탁구의 국제 무대 진출은 매우 빠른 편이었다.   

구기 종목 가운데 가장 먼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위 안에 입상한 종목으로 적지 않은 스포츠 팬들이 여자 농구를 떠올린다. 1967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열린 제5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박신자를 앞세운 한국은 동독 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의 강호들을 물리치고 소련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했다. 개선한 한국 선수단은 김포국제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하는 등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많은 스포츠 올드 팬들이 기억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때보다 8년 전인 1959년 독일 도르트문트에서 열린 제25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조경자와 최경자, 황율자, 이종희는 여자 단체전에서 당시 세계 최강의 경기력을 자랑하던 일본에 이어 준우승했다. 이 대회에 처음 출전한 중국은 3위를 차지했다. 일본은 이 대회 남녀 7개 세부 종목 가운데 6개 종목을 휩쓸었고 중국은 남자 단식에서 룽구오투안이 우승했다.  

이 대회에 앞서 한국은 1958년 제 3회 도쿄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처음으로 채택된 탁구 종목에 출전해 여자 단체전에서 2위, 여자 단식에서 조경자가 동메달, 여자 복식에서 위쌍숙-최경자 조가 동메달을 차지했다. 남자 단체전에서는 한국이 7개 출전국 가운데 필리핀과 공동 꼴찌를 했다. 월남(남베트남)이 일본을 따돌리고 1위를 차지한 게 눈길을 끈다. 남베트남은 1959년 세계선수권대회 남자 단체전에서 중국과 공동 동메달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어 1962년 제 4회 자카르타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남자 단체전과 이정희-황율자 조의 여자 복식에서 은메달, 여자 단체전에서 동메달을 차지했다. 남자 단체전은 국제 대회 출전 사상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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