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 아시안컵에 출전한 축구 대표 팀.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대결(對決)은 양자(兩者)가 맞서서 우열이나 승패를 가린다는 뜻이고 경기(競技)는 일정한 규칙 아래 기량과 기술을 겨룬다는 뜻이다. 의미에 큰 차이는 없지만 글쓴이는 1990년 이후 남북 스포츠 관련 기사에서 ‘남북 대결’이 아닌, ‘남북 경기’로 쓰고 있다.

글쓴이가 대결이 아닌, 경기를 쓰게 된 계기는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된 뒤 곧바로 남북으로 갈린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남북한 스포츠 교류가 이뤄진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였다.

잠시 시간 여행을 떠나 본다. 1970년 6월 통신위성과 송수신을 할 수 있는 금산지구국이 가동하면서 한반도 남쪽에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국제전화 대기 시간이 크게 줄어드는 등 여러 분야에서 변화가 일어난 가운데 스포츠에서도 이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졌다.

글쓴이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기록영화를 1967년 부산 태화극장에서 봤다. 펠레가 조별 리그 불가리아와 경기에서 수비수들에게 마구 걷어채는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개회식은 화면 상태가 썩 좋지 않은 NHK TV로 봤다. 그 무렵 부산에서는 일본 TV 전파가 잡혔고 동해 남부 지역에서는 일본 라디오가 제법 잘 들려 대중가요 작곡가들이 포항 등지에서 두어 달씩 머물다 서울로 올라간 뒤 신곡(트로트)을 발표하곤 했다는 풍문이 떠돌기도 했다.

그런데 금산지구국이 생기면서 스포츠 중계에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동남아시아에서 열리는 메르데카배(말레이시아), 킹스컵(태국) 등 축구 경기와 유제두-와지마 고이치의 프로 복싱 WBA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매치, '4전 5기' 신화로 유명한 홍수환-헥토르 카라스키야의 WBA 슈퍼밴텀급 타이틀매치 등을 안방극장에서 볼 수 있게 됐다. 흑백 화면이긴 했지만.

1970년 멕시코 월드컵 개막전(멕시코-소련)과 결승전(브라질-이탈리아)은 국내에 처음으로 생중계된 월드컵 경기다. 이철원 캐스터와 주영광(작고) 해설자가 나선 MBC 중계진은 이 외 모든 경기를 녹화 중계해 한국 스포츠 중계방송사에 특별한 기록을 남겼다.

그런데 그 무렵 올림픽 등 주요 경기에서 북한 선수단이 입장할 때면 엉뚱한 화면이 나가곤 했다. '인공기'가 안방에 전달되는 걸 막기 위한 것이었다. 경기 중계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1980년대에 접어들어 컬러 TV 방송이 시작되면서 ‘인공기’ 문제는 더욱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관계 당국에서 우려할 일이 아니었다. 북한이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과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잇따라 불참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1980년대가 지나가고 1990년 아시아경기대회가 그해 9~10월 베이징에서 열렸다. 북한은 이른바 혈맹인 중국에서 처음 열리는 대규모 국제 대회에 선수단은 물론 평양에서 출발한 국제 열차에 상당한 규모의 응원단을 실어 보냈다.

대회를 앞두고 한국체육기자연맹은 모임을 갖고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를 계기로 ‘남북 대결’이라는 표현은 가능한 한 자제하고 ‘남북 경기’로 쓰자는 데 뜻을 같이했다. 남북의 긴장을 누그러뜨리는 일에 스포츠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도록 하자는 마음에서였다. 구속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결의문처럼 기록을 남겨 놓지도 않았지만.

이후 글쓴이는 1991년 청소년 축구와 탁구 단일팀 구성 과정 등 남북 스포츠 교류 현장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등 국제 대회에서 남북 선수의 경기가 있을 때 ‘남북 대결’을 쓰지 않았고 오늘도 그렇게 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남북 관계는 꽝꽝 얼어붙었다. 남북 양측에서 정치적인 소용돌이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 남북을 이어 줄 끈 가운데 하나가 스포츠다. 강릉에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남북 공동 응원이 펼쳐지고 평양에서는 애국가가 연주되고 태극기 게양됐다. 이렇게 하면 되는데 왜 문을 걸어 닫고 있었을까.

남북 스포츠 교류가 활발히 이뤄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는 사례를 소개한다. 1991년 2월 남북 양측은 판문점에서 그해 4~5월 일본 지바에서 열리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일팀 구성을 위한 실무 회담을 가졌다. 회담이 열린 지 30분이 채 되지 않아 서울 삼청동에 있는 남북대화사무국으로 ‘코리아’ 선수단 명단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자 단체전=현정화, 홍차옥(이상 남 측) 리분희, 유순복(이상 북 측), 혼합복식=리근상(북)-홍순화(남) 조, 유남규(남)-현정화(남) 조, 김성희(북)-리분희(북) 조 등이 줄줄이 팩시밀리 용지에 찍혔다. 개인전은 남북 혼성이 기본이었지만 혼합복식 유-현 조(1989년 도르트문트 세계선수권대회 1위)와 김-리 조(북한의 간판 혼합복식조이자 뒤에 부부)는 메달 가능성을 따져 예외로 했다.

남북 탁구인이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선수단을 구성하는 일에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그리고 스포츠 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코리아’는 여자 단체전 결승에서 중국을 게임 스코어 3-2로 꺾고 우승했다. 중국은 이 대회 이후 2010년 모스크바 대회에서 ‘또 다른 중국 팀’인 싱가포르에 단 한번 정상을 내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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