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 입촌식 장면. 한국 선수단에는 한수안 등 3명의 복싱 선수가 있었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조선빙상경기연맹(11월 24일 회장 이일), 대한테니스협회(11월 26일 회장 나추진), 조선유도연맹(11월 28일 회장 이범석), 조선자전거경기연맹(11월 30일 회장 민원식)이 창립되고 조선축구협회(12월 3일 회장 하경덕)와 조선농구협회(12월 19일 회장 이성구)는 재건됐으니 복싱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새로운 시대에 맞게 새 단장을 한 셈이다. 당시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지만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 거의 모든 단체는 ‘조선’을 앞에 붙이고 있었다. <3편에서 계속>

일제 강점기인 1932년 제10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황을수(라이트급)가 출전한 빛나는 역사를 갖고 있는 복싱은 1948년 제12회 런던 올림픽(7월 29일~8월 14일)에 한수안(플라이급), 서병란(페더급), 강인석(라이트급) 등 3명의 선수가 1945년 해방 이후 처음으로 태극 마크를 달고 국제 무대에 데뷔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채 수립되기 전에 우리나라 선수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은 복싱인을 비롯한 선배 체육인들의 발빠른 움직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46년, 조선체육회는 2년 앞으로 다가온 런던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올림픽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올림픽에 나가고 싶은 나라는 NOC(국가올림픽위원회)를 구성하고 올림픽 종목 경기 단체가 5개 이상 국제경기연맹에 가맹하고 있어야 IOC의 승인을 받아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다.

조선체육회는 부회장인 유억겸을 올림픽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앉히고 전경무와 이상백에게 부위원장을 맡겼다. 올림픽대책위원회는 국내 경기 단체가 구성돼 있는 복싱과 육상, 축구, 역도, 농구, 사이클 등 6개 경기 단체의 정관을 영문으로 번역해 국내 아마추어 규정과 함께 각각의 국제 경기 단체에 제출해 가입하도록 이끌었다.

1947년 6월 15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 참석해 대한올림픽위원회(KOC)의 올림픽 참가 자격을 승인 받으려고 전경무 올림픽대책위 부위원장이 5월 29일 미 군용기 편으로 떠났으나 항공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올림픽대책위는 전경무 부위원장을 대신할 인물로 미국에 있는 이원순을 지목하고 그에게 급히 전문을 보내 IOC 총회에 참석하도록 부탁했다.

당시 이원순은 미국에 30년 이상 살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나 미국 시민권을 얻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여권을 받을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이원순은 스스로 사제 여권을 만들어 스톡홀름으로 날아가 6월 20일자로 KOC가 IOC의 회원국으로 정식 승인 받는 데 성공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복싱은 런던 올림픽에 3명의 대표 선수를 보낼 수 있었다.

해외 여행이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웠던 시절 체육인들은 평생의 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올림픽 참가 선수단 구성을 놓고 선수단에 들어가기 위해 종목별 관계자들이 혈안이 돼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미 군정청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7개 종목 67명(임원 17명 선수 50명)의 선수단을 구성했다.

1948년 6월 21일 YMCA 회관에 모인 선수단은 서울역까지 걸어서 간 뒤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배편으로 일본 후쿠오카에 간 뒤 그곳에서 기차 편으로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배편으로 홍콩으로 간 뒤 홍콩에서 두 그룹으로 나뉘어 항공기를 이용해 암스테르담을 거쳐 목적지인 런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체중 조절이 승패의 관건인 복싱 선수들로서는 최악의 여정이었다. 그러나 한수안 등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1회전을 부전으로 통과한 라이트급 강인석은 16강이 겨루는 2회전에서 노르웨이의 브리비에게 판정으로 져 탈락했으나 플라이급 한수안은 오스트리아의 가우스터러, 페더급 서병란은 이집트의 하무다를 각각 판정으로 누르고 2회전에 올랐다. 16강이 겨룬 2회전에서 한수안은 프랑스의 코친을 판정으로, 서병란은 호주의 버크를 2라운드 KO로 누르고 8강에 합류했다. 메달이 눈앞에 다가왔다.

준준결승에서 한수안은 네덜란드의 코만을 2라운드 KO로 눌렀지만 서병란은 폴란드의 안트키비츠에게 판정으로 져 탈락했다. 홀로 남은 한수안은 준결승에서 이탈리아의 밴디넬리와 맞붙게 됐다. 한수안은 안트키비치와 경기에서 양쪽 고막을 다친데다 오후 5시로 예정된 경기 시작 시간을 오후 8시로 잘못 알고 잠을 자다 경기 시작 직전 경기장에 도착했다. 게다가 한수안은 고막을 다친 후유증으로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결과는 판정패.

당시에는 복싱도 동메달 결정전이 있었다. 심기일전한 한수안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즈로치를 판정으로 물리치고 감격의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시아 나라 선수로는 유일한 복싱 메달리스트였다. <5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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