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북 경기를 하고 있는 한국과 북한 여자 축구 대표 팀 ⓒ 대한축구협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964년 도쿄 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 체육이 무산된 뒤 남북 체육 관계자들이 다시 얼굴을 맞대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여기서 잠시, 동독과 서독의 단일팀 사례를 살펴본다.

동독과 서독은 1955년 6월 IOC(국제올림픽위원회)의 중재로 단일팀을 구성하는 데 합의한 뒤 1956년 코르티나 담페초(이탈리아) 동계 올림픽, 1956년 멜버른 하계 올림픽, 1960년 로마 하계 올림픽 그리고 1964년 도쿄 하계 올림픽 등에 단일팀으로 참가했다. 단일팀의 국호는 독일, 단기는 흑∙적∙황 3색으로 디자인이 된 독일기에 오륜 마크를 달았으며 국가는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였다. 도쿄 대회 이후 독일은 1988년 서울 올림픽 때처럼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 올림픽에 출전했다. 그리고 1990년 통일 이후 1992년 알베르빌 동계 대회와 바르셀로나 하계 대회부터 단일팀보다 한 발 더 나아간 ‘통일 독일’(United Germany)로 출전했다. 통일 독일의 올림픽 출전은 1936년 베를린 하계 올림픽 이후 56년 만의 일이었다.

1960년대 남북 스포츠 교류를 가로막는 걸림돌 가운데 하나가 북한의 국호 문제였다.

여자 농구는 1967년 8월 26일부터 9월 4일까지 도쿄에서 열린 하계 유니버시아드에서 대회 출전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그런데 도쿄 하계 유니버시아드는 참가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1965년 8월 한국보다 앞서 FISU(국제대학스포츠연맹)에 가입한 북한은 도쿄 대회를 앞두고 자신들의 국호인 DPRK(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를 사용할 수 없으면 대회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주장했고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은 북한을 두둔하고 나섰다. FISU와 대회조직위원회는 국제 스포츠 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단체 약칭 방식으로 절충안을 찾아 한국은 KUSB(대한대학스포츠위원회), 북한은 SSAK(조선학생스포츠협회)로 부르도록 했다.

한국은 1963년 10월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61차 IOC 총회 결정에 따라 한국은 KOREA, 북한은 NORTH KOREA라고 불리지 않는 한 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고 하다가 이듬해인 1968년 인스부르크 동계 유니버시아드에서는 올림픽 방식의 호칭을 채택하기로 한 FISU 총회의 결의를 참가 명분으로 삼아 KUSB라는 호칭으로 출전했다. 그러나 북한과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은 대회 운영 방식에 불만을 품고 대회를 보이콧했다.

북한은 1969년 제68차 바르샤바 IOC 총회에서 정식 국호인 DPRK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결정이 내려지면서 이후 올림픽을 비롯한 주요 국제 대회에 본격적으로 참가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한국과 북한 1972년 뮌헨 하계 올림픽 등에서 치열한 ‘스포츠 전쟁’을 벌였다. 그런 가운데 한편으로는 단일팀 구성과 상호 교류 등 공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한 이 성명은 통일의 원칙으로 첫째,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 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및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고 밝히며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3대 원칙을 천명했다. 공동성명은 이밖에도 상호 중상 비방과 무력 도발의 금지, 다방면에 걸친 교류 실시 등에 합의했다. 다방면에 걸친 교류 실시라면 스포츠 교류도 포함될 것이기에 체육 관계자들의 기대가 컸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일주일 뒤 북 측의 오현주 체육지도위원장은 김택수 대한체육회 회장에게 제20회 뮌헨 올림픽에 남북한이 단일팀을 구성해 참가할 것과 앞으로 각종 국제 대회에 단일팀으로 참가할 것을 제의하는 담화를 평양방송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이때는 뮌헨 올림픽 개막을 한 달 보름여 앞두고 있었기에 단일팀 구성은 시간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김택수 회장은 7월 13일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1.뮌헨 올림픽 남북한 단일팀 구성은 이미 남북한 모두 참가 신청이 끝났을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 실현이 불가능하다.

2.그러므로 이번 뮌헨 올림픽에서는 한민족의 단합된 우월성을 국제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합동 응원단을 구성하여 남북한 팀을 공동으로 응원하자.

그뒤 한국 선수단을 이끌고 뮌헨에 간 김택수 회장은 북한의 오현주 위원장을 방문해 이번 올림픽 단일팀 구성은 시기적으로 불가능했으나 앞으로 있을 각종 국제 대회에 단일팀으로 참가할 것과 서울 또는 평양에서 개최하는 국제 대회에 상호 선수를 초청하는 문제와 전반적인 스포츠 교류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회담 결과 남북 양측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남북 체육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김택수 대한체육회장과 오현주 체육지도위원장은 역사적인 남북공동성명의 원칙에 의하여 남북 체육인은 새 역사 창조의 사명감을 깊게 인식하여 민족 단합의 기수가 될 것을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항에 합의한다.

1.앞으로 대한체육회와 북한체육지도위원회는 남북 체육 교류를 실현하기 위하여 남북 체육 관계 대표가 서울과 평양을 방문하도록 초청한다.

2.이를 위한 모든 연락은 남북조절위원회를 통하여 실시한다.

남북 양측은 7∙4 남북공동성명을 구체화하기 위한 기구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공동 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하기로 했다.

이듬해인 1973년 서울에서 아시아 지역 배구 지도자 강습회가 열리게 되자 대한체육회는 남북 체육 공동 성명 정신에 따라 북 측 배구 지도자를 초청하는 서한을 8월 1일 남북조절위원회를 거쳐 발송했다. 그러나 북 측에서는 "북한배구협회라는 단체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서한을 반송했다. 1956년 프랑스에서 동시에 열린 제2회 세계여자배구선수권대회와 제3회 세계남자배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바 있고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여자 배구가 동메달을 획득할 정도로 배구 발전에 적극적이었던 북한에 배구 관련 단체가 없다는 건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해 8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하계 유니버시아드에 소련이 두 나라 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한국 선수단을 초청하자 북 측은 "남조선이 참가하는 대회에는 출전할 수 없다"며 이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 무렵인 8월 28일 북 측은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명의의 성명에서 남북조절위원회를 비롯한 남북대화를 전면 중단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에서도 대한체육회는 1975년 아시아육상경기선수권대회, 1978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 1979년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등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 대회에 북한 선수단을 초청하는 등 남북 스포츠 교류의 물꼬를 트려는 노력을 했으나 북측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외형적으로 보면 아무런 성과물이 없었지만 남북 스포츠 교류 사상 처음으로 공동성명을 발표했고 IOC 같은 제3자의 개입 없이 남북이 주체적으로 회담을 가졌다는 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회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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