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8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축구 결승에서 0-0으로 비겨 공동 우승한 한국과 북한의 주장 김호곤(오른쪽)과 김정만이 나란히 시상대에 서 있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972년 남북동공성명을 기반해 열린 남북 체육 회담은 외형적으로 보면 아무런 성과물이 없었지만 남북 스포츠 교류 사상 처음으로 공동성명을 발표했고 IOC(국제올림픽위원회) 같은 제3자 개입 없이 남북이 주체적으로 회담을 가졌다는 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이후 남북 스포츠는 다시 ‘총성 없는 전쟁’에 들어갔다. 이 무렵 남북 경기에 나서는 선수나 임원들의 자세를 알 수 있는 일화 하나.
 
1976년 한국 스포츠 최대 관심사는 7월 17일부터 8월 1일까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21회 하계 올림픽이었다. 4년 전 제20회 뮌헨 대회에서 올림픽 무대에 처음 나선 북한에 뒤진 한국으로서는 북한과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지상 과제를 안고 있었다. 몬트리올 올림픽과 제12회 인스부르크 동계 올림픽에 대비해 1975년과 1976년 상반기에 진행된 대한체육회 국가 대표 선수 강화 훈련 실적에 따르면 참여 선수는 198명, 임원은 27명, 훈련 일수는 426일에 이르렀다. 1976년 훈련에서는 올림픽에서 입상한 전적이 있거나 입상 전망이 확실해 국위 선양이 기대되는 종목 그리고 지역 예선을 통과한 종목 등 소수 정예로 강훈련을 실시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구성된 대표선수단은 임원 22명과 선수 50명으로 뮌헨 대회를 약간 웃도는 규모였다. 출전 종목은 레슬링, 유도, 남녀 배구, 복싱, 사격이었다. 사격은 1978년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 세계사격선수권대회 개최국으로서 위상을 고려해 뮌헨 대회에 이어 또다시 참가하게 됐다. 남자 배구는 애초에는 ‘상위 입상이 어렵다’는 대한체육회의 판단에 따라 제외할 방침이었으나 “지역 예선을 통과한 마당에 본선 출전을 가로막는 것은 지나친 처사가 아니냐”는 대한배구협회의 거센 반발에 밀려 선수단에 집어넣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사격과 복싱, 남자 배구를 뺀 종목에서 모두 메달 따 대한체육회의 선수단 구성 방침은 비교적 정확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몬트리올 대회에 나서는 선수단 결단식은 7월 3일 시민회관 별관(2017년 현재 서울시 의회)에서 열렸다. 결단식에서 김택수 회장이 “뮌헨 대회 때는 회장을 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책임감이 덜했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어떻게든지 좋은 성적을 내야 할 텐데걱정이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또다시 남북 경쟁에 나서는 선수단의 심경은 각별했다.

결과적으로 레슬링의 양정모가 금메달을 차지하는 등 금메달 1개와 은메달 1개, 동메달 5개로 금메달과 은메달을 1개씩 획득한 북한에 앞섰다.

▲ 남북한은 1960년대에 이어 1970년대에도 단일팀 구성 등을 위한 체육 회담을 이어 갔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대한체육회
 
1970년대 후반에는 특정 종목의 대회 출전과 관련해 남북 체육 회담이 열리기도 했다.

1979년 국내 체육계 큰 과제 가운데 하나는 4월 25일부터 5월 6일까지 평양에서 열릴 제35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문제였다. 대회를 눈앞에 둔 2월 20일 북 측 김유순 체육지도위원장과 김득준 탁구협회 회장은 평양방송으로 이 대회에 남북한이 단일팀을 만들어 참가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2월 27일 쌍방 탁구협회 대표들이 판문점에서 만날 것을 제의해 왔다.

남북 양측은 2월 27일부터 3월 12일까지 4차례 회의를 가졌으나 북 측이 단일팀 구성보다는 한국의 출전을 저지하려는 저의를 드러내 회담은 성과 없이 끝났다. 북 측은 제2차 회담에서 단일팀 구성에 대한 알맹이 없는 제안을 내놓은 뒤 단일팀 구성에 실패할 경우 한국 선수단의 대회 출전을 보장하라는 남 측의 요구를 묵살한 채 제4차 회담에서 “제2차 회담에서 제시한 합의서에 서명을 하지 않는 한 대한탁구협회의 대회 참가 기득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엉뚱한 주장을 펴 회담을 결렬시키고 그 책임을 남 측에 전가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결국 한국 선수단의 대회 출전에 대한 북측의 확답은 이뤄지지 않았고 이후 대한탁구협회는 국제탁구연맹 중재로 평양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이 문제와 관련해 1970년대에 벌어진 아시아 탁구계의 흐름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아시아 탁구계는 국제 무대에서 발언권으로 보나 경기력으로 보나 실질적으로는 세계 탁구계나 다름없었다.
 
한국은 1950년 아시아탁구연맹(ATTF)에 가입했다. 1950, 60년대 아시아 탁구계는 기술적으로는 일본과 대만이 앞서 있었고 인도와 말레이시아가 행정을 맡고 있었다. 1949년 새로운 국가 체제를 수립한 뒤 내부 정리를 마친 중국은 스포츠부터 국제 무대에 나서기 시작했고 탁구는 단연 선두 주자였다. 순식간에 세계적인 탁구 강국이 된 중국은 1972년 일본과 슬며시 손잡고 북한까지 끌어들여 아시아탁구연합(ATTU)을 만들었다.
 
두 개의 단체가 경쟁하는 가운데 거의 모든 ATTF 회원국이 중국이 주도하는 ATTU로 넘어가고 한국과 대만만 남게 됐다. 그리고 1973년 ATTF는 국제탁구연맹(ITTF)으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게 됐다. 한국은 중국, 대만과 얽힌 특수 관계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대만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아시아 무대에서 외톨이가 된 한국은 1980년과 1982년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서울 오픈을 여는가 하면 스웨덴 오픈 등 유럽 무대로 날아가 실력을 인정받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1984년 파키스탄에서 열린 ATTU 총회에서 회원국이 됐다. 총회에서 북한은 기권하기 위해 퇴장했다. ATTU는 새 회원국을 받아들일 때 회원국이 모두 찬성해야 하는 규정이 있었다. 이 무렵 북한은 중국을 등에 업고 강세 종목인 탁구에서 어떻게 해서든 한국을 따돌리려 하고 있었다.
 
평양 세계탁구선수권대회 관련 남북회담에 이어 12월 27일에는 북 측 김유순 체육지도위원장이 박종규 대한체육회 회장 앞으로 서신을 보내 이듬해 7월 열릴 예정인 제22회 모스크바 하계 올림픽에 남북 단일팀 참가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회담을 판문점에서 갖자고 제의해 왔다. 대한체육회는 모스크바 올림픽에 참가하는 단일팀 구성 문제는 시기적으로 촉박하니 앞으로 있을 모든 국제 대회에 단일팀으로 참가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먼저 서울과 평양에서 개최되는 국제 대회에 상호 초청하고 이를 위한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남북 교환 경기의 실시를 제의했다. 이후 남 측은 1980년 서울에서 열린 국제역도연맹 지도자 강습회와 아시아역도선수권대회 등에 북한을 초청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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