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에는 북한과 쿠바 등 극소수 나라만 불참했고 소련과 동독 등 동유럽 국가들이 모두 출전해 1980년 모스크바 하계 올림픽 이후 8년 만에 진정한 세계인의 스포츠 잔치가 펼쳐졌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988년 서울 올림픽 공동 개최·분산 개최 등 남북 체육 회담 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긴 회담이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중재로 시작됐다.

[제1차 회담] 1985년 10월 8일과 9일 열린 제1차 회담에 IOC 측은 사마란치 위원장을 비롯해 6명, 남 측은 김종하 KOC(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등 8명, 북 측은 김유순 북한 NOC(국가올림픽위원회) 위원장 등 8명의 인원이 각각 참석했다.

남 측은 북한의 참가는 보장되며 북 측이 주장하는 공동 개최는 이 회담의 의제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 북 측이 IOC 헌장과 IOC 총회 결정 그리고 서울의 올림픽 개최권을 존중하면 일부 종목의 예선 경기를 북한 지역에 배정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고 사이클 도로경기 단체전을 북한 지역에서 출발해 서울에 도착하도록 하고, 개·폐회식에 남북한 선수단이 올림픽기를 선두로 해 각자 자기의 기를 들고 입장할 것과 대회 문화 행사에 북 측이 참가할 것을 제의했다.

북 측은 정준기 정무원 총리의 성명 내용을 되풀이하면서 *대회 명칭을 '조선올림픽' 또는 '평양·서울 올림픽으로 할 것, *대회 개·폐회식도 평양과 서울에서 똑같이 할 것, *남북한이 같은 자격으로 공동조직위원회를 구성할 것, *TV 중계권료도 공동으로 분배할 것 등을 요구했다. 국제 스포츠 관계자 누가 봐도 무리한 주장으로 회담은 처음부터 어려움을 겪게 됐다.

IOC는 제1차 회담을 마무리하면서 북한이 주장하는 공동 개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회담을 효율적으로 윤영하기 위해 제2차 회담의 의제를 *대회 개회식에 남북한 선수단이 공동으로 입장하는 문제 *북한 지역에 배정할 종목에 대한 협의 *문화 행사에 북한이 참가하는 문제로 제한해 채택했다고 발표했다.

[제2차 회담]1986년 1월 8일과 9일 열린 제2차 회담에서 남 측은 *개회식에서 남북한 선수단이 같이 대열을 갖춰 입장하고, *핸드볼, 배구, 축구의 예선 경기를 북한 지역에 배정할 용의가 있으며, *문화 행사를 남북한이 공동으로 하자고 제의했다.

북측은 공동 개최에 대한 IOC의 강력하고 일관된 주장을 의식해 공동 개최라는 말을 삼가며 23개 종목 가운데 11개 종목을 북 측에 할애할 것을 요구하면서 뜬금없이 이번 대회에 남북한 단일팀이 출전해야 한다며 단일팀 구성 문제를 이 회담에서 논의하자고 주장했다.

남 측은 올림픽뿐만 아니라 모든 국제 대회에 남북 단일팀으로 참가하자는 게 우리의 기본 원칙인 만큼 이 문제는 남북 당사자 사이에 논의할 수 있지만 이 회담에서 다룰 성격은 아니고 IOC가 채택한 의제와 관련한 토의를 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북 측이 의제 논의를 거부해 회담은 제자리를 맴돌았다.

IOC는 북 측이 제의한 남북 단일팀 구성에 대해 이는 남북한 당사자의 문제이며 이 회담에서는 의제로 채택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회담을 마쳤다.

[제3차 회담]1986년 6월 10일과 11일 열린 제3차 회담에서 북 측은 공동 개최나 다름없는 *6개 종목의 전 경기를 북한 지역에서 실시할 것, *대회 명칭은 서울에서는 '서울올림픽대회', 평양에서는 '평양올림픽대회'로 할 것, *올림픽조직위원회는 서울과 평양에 별도로 설치할 것, *남북한 선수단은 순서에 따라 별도로 입장할 것, *문화 행사도 서울과 평양에서 별도로 실시할 것 등을 제의했다.

남 측은 제2차 회담에서 제의한 3개 종목의 예선 경기 외에 탁구와 배구의 모든 경기를 북한에 배정하고 개회식 입장은 남북 선수단이 3열씩 대열을 갖춰 6열로 들어오는 매우 구체적인 수정안을 제시했다. 남 측이 추가로 배정하겠다고 제의한 종목 가운데 탁구는 북한이 1979년 평양에서 제35회 세계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IOC는 남북 양측의 제안을 검토한 뒤 *탁구와 양궁 2개 종목의 경기를 북한 NOC에 위임하고, *북한은 모든 올림픽 가족의 자유 왕래를 보장할 것, *사이클 도로경기 단체전을 남북한을 연결해 실시할 것, *축구 예선 1개 조의 경기를 북한 지역에서 개최할 것, *문화 행사를 남북한 지역에서 별도로 실시할 것 등의 중재안을 제시한 뒤 남북 양측은 6월 30일까지 의무적으로 회신할 것을 요구하고 어느 한쪽이라도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IOC 주재 회담은 결렬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IOC 중재안에 대해 남 측은 6월 30일 동의한다는 회신을 보냈으나 북 측은 탁구와 양궁의 북한 지역 개최는 받아들이되 제4차 회담에서 종목 추가 문제를 계속 토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IOC는 두 차례나 중재안에 동의하는지 여부에 대한 명확한 회신을 요구했으나 북 측은 긍정적인 회신을 거부했다.

이듬해인 1987년 2월 12일 북 측 대표단, 4월 22일 남 측 대표단이 IOC에 소환되고 이어서 IOC가 대표단을 평양과 서울에 파견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제4차 회담이 7월 14일과 15일 열렸다. 남 측은 회담에서 IOC의 중재안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이에 대해 토의하자고 했다. 그러나 북 측은 남북한 인구 비례에 의해 8개 종목의 경기를 북한 지역에서 열 것을 제안하는 한편 또다시 공동 개최를 주장하면서 대회 명칭과 조직위원회 구성, 개·폐회식에서 남북한의 동등한 자격을 요구했다.

회담이 제자리걸음을 하자 IOC는 남 측과 사전 협의 없이 북 측에 대폭 양보하는 내용의 수정 중재안을 제시하고 서울 올림픽 초청장 발송일인 9월 17일 이전까지 남북한의 회신을 요구했다. IOC의 수정 중재안은 남녀 양궁, 남녀 탁구, 여자 배구의 전체 경기와 축구 예선 1개 조, 사이클 남자 도로경기 개인전의 북한 지역 실시였다. 남 측은 북한을 서울 올림픽에 참여하게 한다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IOC의 수정 중재안이 최종 중재안이라는 점을 전제로 8월 17일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북 측은 남 측의 기대와 *탁구, 양궁, 여자 배구의 북한 지역 개최는 받아들이되, *축구는 예선 1개 조가 아닌 전 경기를 실시하고, *사이클은 다른 종목으로 교체하고, *이들 종목 외에 1개 종목을 추가로 배정할 것을 요구했다.

IOC는 북 측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9월 17일 이전에 별도의 회담을 갖자고 제의했으나 북 측은 이를 외면하고 초청장 발송 연기와 IOC의 회담 주재 중지를 요구했다. 또 남 측에는 남북 NOC간 회담에서 이견을 조정한 뒤 IOC의 중재를 받자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남 측은 IOC의 중재안을 수락할 것을 권유하면서 제5차 회담에서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남북한 직접 협의가 가능하다는 견해를 밝히고 제5차 회담에 나설 것을 촉구했으나 끝내 제5차 회담은 열리지 못했다.

북 측은 10월 23일 "남한의 현 정권이 존재하는 한 서울 올림픽의 전도는 암담하며 선거로 민주 세력이 집권하면 그들과 새로이 공동 개최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는 다분히 정치적인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남한의 대통령 선거 후의 사태 진전은 올림픽의 단독 개최 기도가 더욱 노골화 되고 있어 올림픽의 남북한 공동 개최가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현재로서는 서울 올림픽 참가를 신청하지 않을 것"이라고 1988년 1월 11일 IOC에 통보했다. 다음 날인 12일에는 김유순 북한 NOC 위원장이 성명에서 이를 재확인했다.

이후 1988년 6월에는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김일성 주석 면담을 위해 평양 방문을 시도하고 7월 임시국회에서는 북한의 참가를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이를 판문점을 거쳐 북 측에 전달했으나 끝내 북한의 서울 올림픽 참가는 이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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