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정현준 기자] 21일(이하 한국 시간) 첼시의 우승 세리머니를 끝으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의 모든 일정이 마무리됐지만 그 여운은 아직 남아있다.

이탈리아 출신의 명장 안토니오 콘테 감독이 부임한 첼시는 강력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2년 만의 왕좌 탈환에 성공했다. 그리고 EPL 최초로 한 시즌에 30승을 달성한 팀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반면 19년 연속으로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UCL) 무대를 밟아오던 아스날은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하며 20년 연속 진출에 실패했다.

이번 시즌 EPL은 많은 이슈들을 낳았다. 2007-2008 시즌부터 EPL의 대표적인 생존왕으로 명성을 날린 선덜랜드가 10년 만에 강등됐다. 그동안 ‘북런던 라이벌’ 아스날보다 한 수 아래로 여겨졌던 토트넘은 1일 아스날을 2-0으로 꺾고 22년 만에 아스날보다 높은 순위가 확정지어 ‘성 토터링엄 데이(St Totteringham’s day)’의 굴욕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이번 시즌을 이야기할 때 빼놓아선 안 될 요소가 하나 있다. EPL을 몰아친 ‘스리백’ 열풍이 그 주인공이다.

'안정된 공수' 스리백, 포백의 그림자 지웠다

현대 축구에서 많은 팀들이 주력 전술로 활용하는 포백은 중앙에 두 명을 놓고, 좌우에 풀백들을 배치한다. 공격 전개 시엔 풀백들이 오버래핑으로 높게 올라가 공격에 가담, 후방엔 골키퍼를 제외한 2명의 센터백이 남는다. 공격 인원을 최대로 늘려 상대가 쉽게 전진할 수 없도록 압박하는 전술이다.

포백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사랑을 받아왔으며, 현재도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수비 형태다. 빠른 발과 크로스를 무기로 삼는 전통적인 윙어들이 포진된 4-4-2, ‘티키타카’ 신드롬 속에서 제로톱 개념을 도입한 바르셀로나의 4-2-3-1 등 다양한 전술들이 등장했지만 그 밑바탕엔 포백이 존재했다.

포백에 비해 스리백은 중앙에 한 명 더 추가, 총 세 명의 수비수가 팀의 후방을 지킨다. 상대에게 역습을 맞이해도 수비 라인이 지나치게 높게 형성되어 있지 않는 한 안정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풀백의 부재에 따른 측면의 빈자리는 좌우에 위치한 센터백들이 상대의 공격을 차단한다. 때문에 스리백을 서는 선수들은 어떤 전술보다 단단한 수비력이 필수적이었고, 골키퍼를 제외한 7명의 선수들에게 공격을 맡긴 채 최대한 공격적인 플레이를 자제해왔다.

스리백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 것은 2014년 국제축구연맹(FIFA) 브라질 월드컵부터다.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칠레와 네덜란드는 스리백을 앞세운 역습 전략으로 강호들을 연파해나갔다. 그 결과 칠레는 16강, 네덜란드는 3위에 오르는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강력한 수비력을 지닌 수비수들이 센터백으로 포진한 건 같았다. 하지만 이전까지라면 미드필더들이 기용됐을 측면엔 주로 빠른 발과 많은 활동량을 지닌 풀백들을 올려놔 두 진영을 활발히 오가도록 했다. 중원엔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 혹은 수비 가담이 뛰어난 선수로 수비진의 부담을 덜어줬다.

스리백은 이번 시즌 EPL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해 화려하게 꽃피웠다. 수비력과 발기술이 동시에 갖춘 선수들의 등장으로 센터백으로부터 공격 전개가 가능해졌다. 측면엔 윙백들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스리백은 부족했던 공격력을 보강, 안정적인 밸런스를 갖춘 전술로 다시 태어나게 됐다. 특히 첼시, 토트넘, 아스날은 이번 시즌 EPL의 스리백 열풍을 상징하는 팀들이다.

'스리백 전환' 첼시, 타개책 넘어 우승의 원동력

시즌 초까지만 해도 4-2-3-1, 4-1-4-1 포메이션을 활용했던 첼시의 안토니오 콘테 감독은 개막 후 8경기에서 무려 13실점을 허용했다. 그리고 EPL 7, 8라운드에서 리버풀과 아스날에 1-2, 0-3으로 패하면서 리그 8위까지 떨어졌다. 첼시의 위기의식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콘테 감독은 포백에서 스리백으로 전환, 그 자리에 게리 케이힐, 다비드 루이스, 세사르 아스필리쿠에타를 기용했다. 그리고 좌우 윙백으로 마르코스 알론소, 빅터 모제스를 선택했다.

가장 우려된 부분은 아스필리쿠에타-모제스 조합. 아스필리쿠에타가 맹활약을 펼쳐왔던 것엔 이견이 없으나 프로 무대에서 줄곧 풀백으로 뛰어왔기에 센터백으로서 얼마나 활약해줄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여기에 공격수로 활약하던 모제스도 윙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한 만큼 위험성이 상당히 커보였다.

하지만 ‘윙백’ 모제스는 저돌적인 오버래핑과 폭발적인 활동량으로 첼시에 활력소가 됐다. 수비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고, 모제스가 흔들리더라도 아스필리쿠에타가 그의 뒤를 든든히 받쳤다. 왼쪽 윙백으로 나선 알론소는 모제스 같은 빠른 스피드를 보유한 건 아니지만 안정된 수비와 왼발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크로스로 자신을 영입한 콘테 감독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센터백들은 상당히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루이스가 적극적으로 올라와 빌드업을 주도하면서 첼시 공격의 시발점이 됐다. 때로는 중거리 슛을 시도하면서 경기 흐름을 바꿨다. 루이스의 전진으로 생겨난 빈자리는 케이힐이 훌륭히 커버했고, 세트피스에서 강력한 면모를 보여줬다. 아스필리쿠에타 역시 오른쪽과 중앙을 오가는 넓은 수비 범위로 첼시 스리백의 한 축을 이뤘다. 덕분에 첼시는 헐 시티와 경기를 시작으로 13연승을 달렸고, 그 후로 경쟁자들의 추격을 용납하지 않으며 EPL 우승 트로피를 차지했다.

수비보다 공격에서 빛난 토트넘식 스리백

첼시의 스리백이 완벽한 밸런스를 이루고 있다면, 토트넘의 스리백은 초공격적인 성향을 지녔다. 센터백으론 공격 성향이 짙은 얀 베르통언을 주축으로 토비 알더베이럴트, 에릭 다이어를 중용했다. 첼시의 루이스와 비교해 베르통언의 위치는 높지 않았다. 다만 위력적인 왼발을 적극 활용해 토트넘의 공격을 지원했다.

원래 센터백으로 뛰던 다이어는 토트넘 이적 후 여러 차례 실수로 비판을 받다가 수비형 미드필더로 옮겨 빛을 본 선수다. 토트넘이 스리백을 쓰게 되면서 다시 센터백으로 돌아온 다이어는 전과 달리 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면서(패스 성공률 86.7%) 토트넘의 빌드업에 기여했다. 베르통언, 다이어에 비해 알더베이럴트는 수비에 집중하면서 토트넘 수비진의 마지막 보루가 됐다.

토트넘은 대니 로즈, 카일 워커 EPL 최고의 풀백들에게 윙백의 임무를 맡겼고, 측면의 공격과 수비를 모두 맡겼다. 폭발적인 주력과 강철 체력을 과시하는 둘의 활약은 환상적이었다. 물론 날이 갈수록 체력적인 부담이 커진 탓에 로즈와 워커는 부상에 시달렸으나, 벤 데이비스, 키어런 트리피어가 그들의 자리를 잘 채우면서 토트넘에 추진력을 더했다.

공격적인 스리백 전술이 상대 팀에 부담을 안기자 전방에 위치한 해리 케인, 크리스티안 에릭센, 델레 알리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났고, 화끈한 공격력으로 연승 행진을 달렸다. 그 사이에 득점포가 폭발한 손흥민까지 가세했고, 매 경기 맹활약을 펼치면서 팀의 상승세에 일조했다.

이후 토트넘은 케인, 에릭센, 알리, 손흥민 사각 편대의 막강한 힘으로 연승을 질주해 첼시의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까지 그들을 거세게 추격했다.

UCL 진출의 집념, 벵거가 고집을 꺾다

1996년 부임 후 올해로 21년째 아스날을 지휘 중인 아르센 벵거 감독은 포백과 짧은 패스를 활용한 아름다운 축구를 추구한다. 롱볼, 역습을 배제하고 높은 볼 점유율로 주도권을 틀어쥐고 승리를 노리는 스타일로 정평이 난 감독이다.

그러나 이번 시즌 벵거 감독은 그의 아스날 감독 생활에 있어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팀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축구 철학을 고집해 많은 팬들에게 실망을 안겼다. 올해 3월 웨스트 브로미치와 경기에선 벵거 감독의 퇴진을 요구하는 현수막(No contract, Wenger out)이 달린 경비행기가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상공에서 포착됐다.

지난달 팀이 6위까지 떨어지자 벵거 감독은 18일 미들즈브러와 EPL 33라운드에서 처음으로 스리백을 꺼냈다. 비록 토트넘에 패하면서 자존심을 구겼지만 리그 최종전까지 스리백으로 9경기에서 8승 1패의 고승률을 달렸다. 벵거 감독이 스리백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UCL 진출에 대한 열망이었다.

주로 로랑 코시엘니, 롭 홀딩, 시코드란 무스타피, 나초 몬레알이 번갈아 스리백을 맡았다. 사실 아스날의 스리백은 전통적인 스리백의 양상을 보였는데, 홀딩은 직접 드리블로 상대의 페널티 박스까지 진입하는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치기도 했다.

측면엔 엑토르 베예린, 알렉스 옥슬레이드 체임벌린 같이 공격력이 좋은 선수들로 알렉시스 산체스, 메수트 외질에 집중된 압박을 풀었다. 측면의 지원 속에 마음껏 활약할 수 있게 된 산체스와 외질은 아스날의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UCL) 진출 가능성을 리그 최종전까지 살리는데 큰 힘을 발휘했다.

[영상 1] Goal's '1위의 품격' - 첼시 vs 맨시티 골모음 ⓒ스포티비뉴스 영상팀

[영상 2] Goal's 케인과 루카쿠의 맞대결 - 토트넘 vs 에버튼 골 모음 ⓒ스포티비뉴스 영상팀

[영상 3] Goal's 무리뉴를 울린 자카의 한 방! - 아스날 vs 맨유 골모음 ⓒ스포티비뉴스 영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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