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글 조영준 기자, 영상 정찬 기자] 부담이 클 수밖에 없는 무거운 지휘봉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잡지 않으면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는 한국 남자 배구를 이끌 수 없다.

김호철(62) 감독이 남자 배구 대표 팀 감독으로 돌아왔다. 그는 2006년과 2009년 남자 대표 팀을 이끌었다. 특히 2006년에는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는 성과를 올렸다.

10년 전 대표 팀과 현재 사정은 다르다. 프로가 출범하면서 태극 마크의 무게는 가벼워졌다. 긴 시즌을 뛴 선수들에게 대표 팀은 '명예직' 혹은 '봉사' 정도로 여겨졌다. 프로 선수에게 자신의 몸은 '값어치'가 됐다. 부상을 우려한 프로 선수들은 대표 팀에서 뛰는 것을 꺼렸다.

이런 풍토가 만들어지면서 한국 배구는 추락의 길을 걸었다. 여자 배구 대표 팀은 김연경(29, 중국 상하이 구단)이란 세계적인 선수를 앞세워 2012년 런던 올림픽과 지난해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했다. 반면 남자 대표 팀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후 올림픽 본선 무대에 서지 못했다.

어느새 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하던 한국 남자 배구는 경쟁력을 잃을 위기에 몰렸다. 김 감독은 1일 서울 중구 장충동 써미트호텔에서 열린 2017년 국제배구연맹(FIVB) 월드리그 2그룹 서울 시리즈 감독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2일부터 시작하는 월드리그 2그룹 서울 시리즈는 한국과 체코, 핀란드, 슬로베니아가 참여한다. 유럽의 강호와 맞붙는 한국의 전력은 떨어진다. 국가 대표 주포인 전광인과 서재덕(이상 한국전력)은 부상으로 대표 팀에 합류하지 못했다. 2016~2017 시즌 MVP 문성민(현대캐피탈)은 무릎 수술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표 팀을 소집했지만 호흡을 맞춰볼 시간도 짧았다. 성적이 나오지 않을 때 수많은 화살을 피할 수 없는 자리가 대표 팀 감독이다. 누구도 쉽게 맡을 수 없었던 감독직을 김 감독은 받아들였다.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과 "배구 인생을 잘 마무리 하고 싶다"는 의지가 독이 든 성배를 들게 했다.

▲ 김호철 감독 ⓒ 스포티비뉴스

만만치 않은 상대와 홈에서 만난 부담감 그러나 극복해야 한다

한국은 2일 첫 경기에서 체코를 만난다. 3일에는 슬로베니아와 경기를 펼치고 서울 시리즈 마지막 경기가 열리는 4일에는 핀란드와 겨룬다.

체코, 핀란드, 슬로베니아는 2그룹에 있지만 유럽 강팀과 비교해도 전력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체코는 높이와 힘을 앞세운 전형적인 유럽 팀이다. 2003년 월드리그에서는 동메달 결정전에 진출했다. 스피드가 장점인 핀란드는 2007년 월드리그에서 7위에 올랐다. 슬로베니아는 2015년 유럽선수권대회에서 결승에 진출한 강팀이다. 8강에서 폴란드를 물리쳤고 4강에서는 이탈리아를 눌렀다. 결승전에서 프랑스에 무릎을 꿇었지만 준우승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세 팀의 공통점은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많이 준다는 점이다. 삼멜부오 투오마스 핀란드 감독은 "지금 세대교체 과정에 있지만 국제 대회에 출전하며 조직력이 탄탄해졌다. 어린 선수들에게 공 하나하나에 집중하라고 조언했다"고 말했다.

슬로베니아의 코박 슬로보단 감독은 과거 이탈리아 리그에서 명성을 떨친 김 감독을 잘 알고 있었다. 슬로보단 감독은 "과거 김호철 감독이 세계적인 세터였다는 걸 알고 있다. 선수 생활을 할 때 김 감독의 경기를 비디오로 많이 봤다"고 말했다. 이어 "김 감독이 은퇴할 때 나는 막 국제 대회에 출전하려고 했다. 선수로 만나지 않은 점이 다행"이라고 밝혔다.

김 감독은 "세 팀 모두 이기기 어려운 팀이다"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어 '그래도 홈에서 대회가 열리기에 출발을 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 팀 모두 이기기 어려운 상대다. 그러나 국내 팬들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맥빠진 경기를 할 수는 없다.

협회는 국제 대회에서 선전하는 대표 팀 선수들을 격려하기 위해 '당근'을 준비했다. 김 감독은 "솔직히 지금 협회 사정은 굉장히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도 팀이 승리하면 협회에서 격려금을 준다고 했다. 선수들을 믿어보겠다"고 말했다.

▲ 김호철 감독(오른쪽)과 임도헌, 이영택 코치 ⓒ 스포티비뉴스

빠른 시일 안에 '성수 만들기'는 어려워…대표 팀을 위한 개선책 시급

소방수로 나선 김 감독이 해결해야할 문제는 많다. 그러나 빠른 시간에 이리저리 번진 불을 빨리 끄는 것은 어렵다.

김 감독은 "프로 리그가 출범하면서 국가 대표에 대한 명예는 많이 변했다. 그렇다고 선수 탓을 할 수는 없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프로 선수는 몸값을 높이기 위해 몸을 아낄 수 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프로 구단과 선수 그리고 한국배구연맹(KOVO)와 협회는 여전히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체질 개선 중인 협회는 여전히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선수들에게 애국심을 강요할 수 없다.

김 감독은 "선수들이 대표 팀에서 뛸 수 있는 동기 부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애국심을 호소하는 시대는 지났다. 태극 마크를 다는 선수가 '의무감'이 아닌 '명분'을 가질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매년 우후죽순으로 대표 팀을 구성해 국제 대회에 출전시키는 관행도 사라져야 한다.

▲ 왼쪽부터 김호철 감독, 투오마스 핀란드 감독, 앙헬 체코 감독, 슬로보단 슬로베니아 감독 ⓒ 스포티비뉴스

김 감독은 과거 이탈리아 팀과 국내 프로 구단, 그리고 대표 팀에서 남다른 성과를 거뒀다. 성배에 든 '독'을 '성수'로 만드는 것은 김 감독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니다. 그는 대표 팀을 위한 장기적인 시스템과 개선책을 강조했다.아직도 대표 팀의 형편은 어렵지만 다행히 지난 시즌 우승 팀 현대캐피탈이 스폰서로 나섰다. 승리 격려금을 주는 것은 물론 선수들이 해외 원정에 나섰을 때 항공편을 비지니스석으로 제공하는 지원이 생겼다.

김 감독은 내년 열리는 자카르타 아시안게임과 2020년 도쿄 올림픽을 대비해 젊은 선수 위주로 대표 팀을 구성했다. 문제는 변화와 대표 팀을 위한 시스템 완성이다. 김 감독은 한국 남자 배구에 경종을 줄 수 있는 조언을 남겼다.

그는 "앞으로 대표 팀을 위한 개선책이 나오지 않으면 한국 남자 배구는 앞으로 아시아에서도 경쟁력을 잃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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