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맥스 슈어저 ⓒ Gettyimages


[스포티비뉴스=박민규 칼럼니스트]1993년 11월 20일(이하 한국시간), 다저스 프런트는 구단 역사상 최악의 실책으로 남을 한 트레이드를 실행했다. 후일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페드로 마르티네스를 포기한 것. 당시 21세였던 마르티네스는 정규 시즌에 주로 불펜 투수로 나와 10승 평균자책점 2.61 119탈삼진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작은 신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속구를 믿을 수 없었던 다저스는 2년간 0.294의 타율과 0.374의 출루율 그리고 89도루를 기록한 유망한 2루수였던 들라이노 드실즈를 영입하기 위해 마르티네스를 몬트리올로 보내고 말았다.

다저스가 마르티네스를 트레이드했던 이유에는 그의 부상 가능성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기존의 2루수였던 조디 리드가 FA 자격으로 밀워키로 이적했기 때문에 다저스는 새로운 2루수가 필요했다. 또한 1993년 아마추어 드래프트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투수 유망주였던 대런 드라이포트와 이미 계약을 맺었고 그해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강속구 투수로서 두각을 나타낸 20세의 박찬호의 영입 경쟁에서 가장 앞서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티네스를 포기해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만약 다저스가 그 트레이드를 진행하지 않았다면 박찬호와 함께 마운드를 이끄는 마르티네스의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마르티네스를 보낸 것은 다저스로서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1994년, 선발투수로서 첫 풀타임을 치른 마르티네스는 선수 노조의 파업으로 인해 시즌이 단축된 것이 아쉬울 정도의 활약(11승 3.42ERA 3.4 fWAR)을 펼쳤다. 그리고 바비 쿠에야르 코치로부터 배운 서클 체인지업의 비중을 대폭 늘린 1997년, 마르티네스는 17승 평균자책점 1.90 241.1이닝 305탈삼진을 기록하며 애틀랜타의 그렉 매덕스를 제치고 내셔널리그 사이영상을 따냈다. 이는 몬트리올 구단 역사상 첫 번째 사이영상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현재, 몬트리올의 후신인 워싱턴은 마르티네스와 같은 에이스를 다시 한 번 보유하고 있다. 2015년 1월, 워싱턴과 7년 2억 1000만 달러의 계약을 맺은 슈어저는 첫 2년 동안 34승 평균자책점 2.88 12.0 fWAR의 뛰어난 성적을 거둔 바 있다. 그리고 지난해 구단 역사상 두 번째 사이영상을 수상한 슈어저는 올 시즌 1997년 마르티네스에 필적할 만한 활약을 펼치고 있다.

● 1997 마르티네스 vs 2017 슈어저 첫 14경기

마르티네스 : 9승 3패 1.58ERA 108이닝 135탈삼진 28볼넷 6피홈런 피안타율 0.186

슈어저 : 8승 4패 2.26ERA 99.2이닝 134탈삼진 23볼넷 12피홈런 피안타율 0.174

올 시즌 슈어저는 내셔널리그 최고의 투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클레이튼 커쇼가 잠깐 주춤하고 있는 사이(9이닝당 피홈런 1.21개, 2.5 fWAR), 슈어저는 FIP(2.88)와 탈삼진(134) 그리고 fWAR(3.1)에서 모두 내셔널리그 1위를 달리고 있다. 슈어저는 지난달 27일부터 5경기 연속 두 자릿수 탈삼진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본인의 개인 최고 기록이기도 하며 구단 역사상 1997년 마르티네스(6경기)에 이은 2위이기도 하다.

슈어저의 탈삼진 양산 능력이 빛을 발했던 경기는 지난 6일 다저스전이었다. 이 경기에서 다저스 타자들을 상대로 7이닝 동안 단 한 점의 자책점도 내주지 않고 삼진 14개를 잡으며 ‘닥터 K’의 위용을 뽐내기도 했다. 이날 경기는 슈어저의 통산 55번째 두 자릿수 탈삼진 경기였으며 14개 이상의 삼진을 잡고도 자책점을 한 점도 내주지 않은 것은 이번이 네 번째였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무자책점, 14탈삼진 이상 경기를 슈어저보다 더 많이 만들어낸 투수는 놀란 라이언, 랜디 존슨, 로저 클레멘스 그리고 마르티네스(이상 5회) 뿐이다. 한편 슈어저는 또한 지난 12일, 통산 1784이닝만에 2000탈삼진을 달성하기도 했는데 불과 며칠 전 같은 기록을 수립한 커쇼(1838이닝)를 넘어서는 역대 3위(1위 마르티네스 1715.1이닝/2위 존슨 1734이닝)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슈어저의 올 시즌 탈삼진 페이스는 상당히 놀라운 수준이다. 아메리칸리그에 크리스 세일(136탈삼진)이 있다면 내셔널리그에는 슈어저가 있다. 현재까지 134개의 탈삼진을 잡은 슈어저의 탈삼진 비율(K%)은 무려 35.1%로 300탈삼진을 달성했던 2015년의 커쇼(33.8%)보다도 높다. 볼넷 비율(BB%)은 6.0%로 2015년(3.8%)보다는 떨어지지만 제구력 또한 여전하다. 2015년 276탈삼진, 지난해 284탈삼진으로 자신의 최고 기록을 경신해왔던 슈어저는 이 페이스를 그대로라면 2년 만에 다시 한 번 300탈삼진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올해 32세가 된 슈어저가 과거보다 더 좋은 투구를 펼치는 비결은 무엇일까.

슈어저는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그리고 체인지업과 커브를 모두 메이저리그 최고 수준으로 던지는 투수다. 하지만 슈어저가 최고 수준으로 꼽히는 지금의 커브를 구사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2008년 메이저리그 데뷔 후 2012년까지 단 한 개의 커브도 던지지 않았던 슈어저는 2013년 스프링캠프에서 저스틴 벌랜더에게 커브를 던지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일격필살’과도 같았던 벌랜더의 커브를 전수받은 그해 슈어저는 자신의 첫 사이영상을 수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어저는 여전히 커브를 던지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 1일, 샌프란시스코를 상대하는 경기에 앞서 슈어저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여전히 커브를 던지는데 애를 먹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커브는 정말 던지기 어려운 구종입니다. 제 릴리스 포인트가 낮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슬라이더를 주로 구사하는 저는 커브도 잘 던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슈어저의 수직 릴리스 포인트는 5.29피트(1.61미터)인 반면 메이저리그 대부분의 투수들은 5.89피트(1.79미터) 지점에서 공을 던진다. 대체로 릴리스 포인트 지점이 낮은 사이드암-언더핸드 투수들은 주로 슬라이더를 구사한다. 과거 슬라이더로 유명했던 존슨과 ‘제 2의 랜디 존슨’이라 불리는 세일 역시 릴리스 포인트 지점이 낮은 투수들이다. 이들과는 달리 최고 수준의 커브(통산 피안타율 0.199)를 던지는 슈어저는 분명 또 다른 의미로 대단한 투수라고 할 수 있다. 본인은 던지는데 애를 먹고 있다고 하지만 말이다.

슈어저의 주요 변화구는 여전히 슬라이더다. 그리고 현재 그의 슬라이더는 한 층 더 진화한 모습이다. 올 시즌 슈어저는 슬라이더의 구사율은 28.4%로 종전 최고 기록인 지난해의 22.8%보다도 5.2%p가 높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팬그래프’의 칼럼니스트 에노 사리스에 따르면 올 시즌 슈어저는 좌타자를 상대할 때와 우타자를 상대할 때 각기 다른 슬라이더를 던진다고 한다. 우타자를 상대로 던지는 슬라이더는 일반적인 움직임과 같지만 좌타자를 상대로는 마치 커터와 같은 슬라이더를 던지고 있다.

▲ 좌타자와 우타자를 상대할 때 슈어저는 각기 다른 슬라이더를 던진다 ⓒ baseball savant


슈어저의 이러한 전략은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고 있다. 우타자 상대 슬라이더 피안타율은 75타수 이상 소화한 투수 가운데 단연 1위(0.065/77타수 5피안타)이며 삼진 또한 45개로 크리스 아처(47), 세일(46)에 이어 메이저리그 전체 3위에 올라있다. 고무적인 것은 좌타자 상대 성적이다. 본래 슈어저의 슬라이더는 우타자를 상대로는 뛰어났지만 좌타자를 상대로는 조금 껄끄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슈어저는 2015년에는 좌타자를 상대로는 슬라이더를 최대한 아꼈으며 지난해에는 좌타자 상대 구사율을 높였지만 성적(0.283/46타수 13피안타)이 좋진 않았다.

하지만 올 시즌, 좌타자를 상대로 던지는 커터와 같은 슬라이더는 0.061(33타수 2피안타)의 피안타율과 21탈삼진이라는 최선의 결과물로 나타나고 있다. 덕분에 슈어저는 좌타자 상대 피OPS를 0.696(지난해 0.757)으로 낮출 수 있었다. 또한 슈어저의 슬라이더는 많은 삼진을 잡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올 시즌 슈어저의 슬라이더는 무려 58.1%에 달하는 탈삼진 비율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2014년 다르빗슈 유(52.5%)와 올 시즌 세일(48.9%)보다도 더 높다.

여기에 슈어저는 한 가지 작업을 더 진행했다. 공을 던지는 릴리스 포인트를 집중하는 것. 낮은 스리쿼터 딜리버리를 가지고 있는 슈어저는 우타자를 상대로 훌륭한 디셉션을 만들어낸다. 이와 더불어 슈어저는 지난해부터 타자들의 혼란을 가중시키기 위해 공을 놓는 지점을 최대한 집중시키고 있다. 올 시즌 슈어저가 던지는 패스트볼(5.26피트)과 슬라이더(5.25피트)의 평균 수직 릴리스 포인트 차이는 0.01피트로 거의 비슷하며 체인지업(5.29피트) 또한 패스트볼과 0.03피트 차이에 불과하다.

일정한 릴리스 포인트에 적응하게 되자 스트라이크가 존의 낮은 코스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슈어저가 2013년 사이영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도 스트라이크 존 낮은 코스를 공략하는 비율(15.9%→17.6%)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올 시즌 슈어저는 지난 2년(30.2%, 34.6%)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스트라이크 존 낮은 코스를 공략(38.9%)하고 있다.

▲ 슈어저의 패스트볼, 슬라이더 릴리스 포인트 ⓒ baseball savant


▲ 2016년, 2017년 스트라이크 히트맵 ⓒ baseball savant


워싱턴 이적 후 첫 두 시즌을 훌륭하게 보낸 슈어저는 해가 지날수록 더욱 위력적인 투구를 선보이고 있다. 연평균 연봉은 3000만 달러지만 계약 내용상 1억 500만 달러는 추후 지급받게 된다. 일명 ‘디퍼드 머니(deferred money)’이다. 올해 실질적인 연봉은 2214만 달러인 슈어저는 자신의 몸값에 걸맞는 성적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과연 슈어저는 성공률이 낮은 투수 장기 계약의 모법 사례가 될 수 있을까.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1997년 후 마르티네스를 트레이드했던 과거와는 달리 워싱턴은 지금의 슈어저를 4년 더 보유할 수 있다는 점이다.

※ 참조 : baseball-reference, fangraphs, baseball savant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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