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 95kg급 우승자인 하형주가 브라질의 더글라스 비에이라에게 굳히기 공격을 하고 있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976년 7월 28일 유도 80kg급 박영철이 동메달을 차지하며 메달 레이스의 출발을 알리더니 30일에는 유도 63kg급 장은경이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장은경은 조지 케르 주심의 판정 번복으로 쿠바의 헥토르 로드리게스에게 금메달을 넘겨줬다. 유도는 대회 마지막 날 조재기가 동메달을 보탰다. 조재기는 93kg급에서 메달권에 들지 못하자 삭발하고 무제한급에 다시 나서 기어이 입상하는 투혼을 보였다. 1964년 도쿄 대회 동메달리스트 김의태 등 재일 동포들에게 의존했던 유도는 몬트리올 올림픽을 계기로 국내에서 훈련을 받고 성장한 선수들이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 등에서 성적을 올리기 시작했다. <4편에서 계속>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한국 유도에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 대회에서 유도 종목에서는 개인 자격으로 출전한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스위스 선수들이 5개 체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했고 개최국인 소련 선수 2명과 동독 선수 1명이 금메달리스트로 이름을 올렸다.

1981년 9월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에서 열린 제12회 세계유도선수권대회에서 박종학이 71kg급에서 세계선수권대회 출전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이 대회 이후 71kg급(이후 체급 조정을 거쳐 73kg급)은 한국 유도의 황금 체급으로 발전한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한국 유도가 세계적인 강호로 성장하는 기폭제 구실을 하게 된다. 유도는 이 대회에서 효자 종목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8명의 선수가 출전해 금메달 2개와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로 한국이 종합 순위 10위를 차지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처음으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64년 도쿄 대회에서는 4개 체급이 진행됐으나 이 대회에서는 8개 체급이 펼쳐진 가운데 종주국을 자처하는 일본이 금메달 4개를 획득해 여전히 강세를 보였다. 그러나 소련 등 동유럽 나라들이 출전하지 않은 데다 한국이 2개, 서독과 오스트리아가 1개씩 금메달을 잠식해 일본의 독주 시대가 머지않아 끝날 수 있다는 조짐을 보였다.

95kg급에 출전한 하형주는 호쾌한 기술로 금메달을 차지하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스포츠 팬들의 눈길을 크게 끌지 못하고 있던 유도를 관심 종목으로 끌어올렸다. 1회전에서 도미니카공화국의 존 애덤스를 밭다리후리기 한판, 2회전에서 캐나다의 조 멜리를 모두걸기 유효로 가볍게 물리친 하형주는 8강전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일본의 미하라 마사토를 씨름 기술을 응용한 들어메치기 절반 두 번 합쳐 한판으로 내리꽂고 4강에 올랐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93kg급(95kg급 조정 이전 체급) 은메달리스트 군터 노이로이터(서독)와 벌인 준결승은 사실상 결승이었다. 하형주는 허리튀기로 공격하다 되치기로 효과를 빼앗긴 뒤 경기 종료 35초를 남길 때까지 이렇다 할 기술을 걸지 못해 결승 문턱에서 주저앉는 듯했다. 그러나 이 순간 하형주의 발목받치기 유효가 성공했다. 3~5위 결정전으로 밀릴 뻔했던 하형주는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결승에 올랐다.

두 명의 금메달 후보를 꺾은 하형주에게 결승 상대인 브라질의 더글라스 비에이라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경기 내내 웅크리고 도망만 다니던 비에이라는 판정으로 경기가 끝난 뒤 한판으로 지지 않은 것에 만족했는지 기뻐했다.

하형주는 올림픽 금메달 이후 1985년 도쿄 유니버시아드대회,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잇따라 우승하는 등 1980년대 한국 유도 중(重)량급의 간판 선수로 활약했다. <6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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