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 개회식으로 추정되는 사진. 시구자는 월남(月南) 이상재 선생. ⓒ대한체육회

한국 아마추어 스포츠의 본산인 대한체육회는 지난해 국민생활체육회와 발전적으로 통합해 명실공히 한국 스포츠를 총괄하는 기구로 기능하고 있다. 대한체육회가 주관하는 최대 이벤트가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다. 2019년 제100회 대회를 앞두고 오는 10월 20일부터 26일까지는 충주시를 중심으로 충청북도 11개 시·군이 힘을 모아 개최하는 제98회 전국체전이 열린다. 전국체전 역사는 곧 한국 스포츠 역사다. 100년 가까이 한국 스포츠 발전에 이바지한 전국체전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편집자 주>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조선체육회는 창립 첫해인 1920년 가을 첫 행사로 전조선야구대회를 열었다. 여러 종목 가운데 야구 대회를 가장 먼저 열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체육인들 가운데 조선체육회 창립 주도 인물들이 주로 야구인들이었던 데다 1915년 일본 오사카 아사히신문 주최 전일본중등학교야구대회에서 사용했던 야구 경기 규칙과 대회 운영 요강 그리고 기록부 등을 갖고 있어서 이 자료들을 참고삼아 야구 대회를 무난히 치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정부가 국고 보조로 대한체육회를 지원하기 이전 체육회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갓 창립된 조선체육회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체육회를 창립할 때 지출한 회식비, 인쇄물 제작비 등 갚아야 될 외상값도 많았고 또 야구 대회를 준비하자니 돈이 필요했다. 장두현 회장을 비롯해 고원훈, 이승우 등 체육회 간부들이 100여 원씩 내놓고 사회 유지와 큰 회사, 상점으로부터 기부를 받았다.

야구 대회를 열 만한 곳은 당시 서울에 용산철도국 야구장이 가장 좋았다. 그리고 그럭저럭 쓸 수 있는 곳으로는 배재고보 운동장과 경성중학 운동장이 있었다. 3·1운동 이전에 야구장으로 자주 쓰였던 훈련원 광장은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이용이 불가능했다.

배재고보의 호의로 조선체육회 주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는 1920년 11월 4일부터 사흘 동안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열렸다. 대회 명칭이 전조선야구대회였으나 첫 대회에는 서울 시내에 있는 팀들만 참가했다. 중학단에는 휘문고보, 경신학교, 중앙고보, 배재고보, 보성고보 등 5개 팀이 참가했고 청년단에는 경신구락부, 천도교청년회, 배재구락부, 삼한구락부, 서울YMCA 등 5개 팀이 출전했다.

중학단은 배재고보가 결승에서 경신학교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청년단은 결승에서 배재구락부가 경신구락부를 이기고 패권을 차지했다. 첫 전조선야구대회에서 중학단과 실업단을 모두 제패한 배재는 야구의 강호로 떠올랐다.

입장료를 받느냐 마느냐를 놓고는 의견이 엇갈렸다. 대부분의 이사들과 학교 관계자들은 입장료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으나 “체육회의 유지 운영을 기부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는 김병대 회계 감독과 이중국 총무의 강력한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입장료는 어른 10전, 어린이 5전이었다. 막상 대회를 열고 보니 입장료를 내고 들어오는 관중들이 예상보다 많아 대회 수입이 200원 정도에 이르렀다.

1909년 첫 번째 도쿄 유학생 야구단 고국 방문 경기 이래 여러 차례 유학생 팀과 경기를 치러 본 데다 서울에 사는 일본인 팀과 경기 등으로 경기 운영 경험도 많았기 때문에 별 탈 없이 첫 대회는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수입금으로 회식비를 비롯해 외상값을 치르고 몇 십 원이 남았다.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는 광복 후 대한체육회가 조선체육회의 창립 정신을 기리고 전통을 이어받는다는 뜻에서 비록 단일 종목 대회지만 전국체전의 기원으로 삼았다. 2년 뒤 제100회 대회가 열리는 전국체전의 출발점이다. <계속>

관련기사

저작권자 © SPOTV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