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회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우승한 성우축구단이 우승기를 앞에 놓고 기념 촬영을 했다. ⓒ 대한체육회

한국 아마추어 스포츠의 본산인 대한체육회는 지난해 국민생활체육회와 발전적으로 통합해 명실공히 한국 스포츠를 총괄하는 기구로 기능하고 있다. 

대한체육회가 주관하는 최대 이벤트가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다. 2019년 제100회 대회를 앞두고 오는 10월 20일부터 26일까지는 충주시를 중심으로 충청북도 11개 시·군이 힘을 모아 개최하는 제98회 전국체전이 열린다. 전국체전 역사는 곧 한국 스포츠 역사다. 100년 가까이 한국 스포츠 발전에 이바지한 전국체전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편집자 주>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그런대로 성공적으로 치른 조선체육회는 다음 사업으로 축구를 선택했다. 축구는 이미 전국 여러 곳에 학교 팀, 사회인 팀이 결성돼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만 통일된 규칙으로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크고 작은 말썽이 따르게 마련이었다.

1921년 2월 11일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가 막을 올렸다. 그때도 축구의 인기는 대단했다.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는 ‘전조선’을 내걸었어도 서울 시내 팀들만 참가했으나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에는 평양과 정주, 청주, 동래 등으로부터 많은 지방 팀들이 참가했다. 중학단에는 오산학교, 보성고보, 배재고보, 경신학교, 휘문고보, 청년학관, 중앙고보 등 7개 팀이 출전했다. 청년단에는 숭실구락부, 평양무오단, 전평양축구, 동래구락부, 청주청년회, 천도교청년회, 한성은행, 연희구락부, 배재구락부, 반도구락부, 불교청년회 등 11개 팀이나 참가했다.

입장료는 야구 대회의 2배인 성인 20전, 어린이 10전이었으나 야구 대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두루마기를 걸치고 모자를 쓴 당시의 멋쟁이 청년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이 대회에서도 축구 종주국인 영국에서 나온 영문 규칙서가 아닌 일본 아사히신문사 발행 운동 연감에 실려 있던 축구 규칙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을 사용했다.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후원했던 매일신보가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도 후원했다. 그러나 대회는 첫날부터 엉망이었다. 공식 대회를 제대로 치러 본 경험이 없어 심판도 권위가 없고 선수들은 제멋대로 경기 규칙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려 하기 때문에 분규가 끊이지 않았다. 대진표도 미리 짜두지 않고 경기마다 제비를 뽑아 진행했으니 운영 미숙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만하다. 대회를 앞두고 참가 선수들에게 경기 규칙서를 나눠 줬고 서울에서 강습회까지 가졌으나 특히 오프사이드 반칙에 대한 말썽이 잦았다.

무질서에 시달리면서 대회 첫날을 보낸 임원들은 인천에서 서병희를 불러 대회 2일째 심판을 맡겼다. 서병희는 조선체육회 창립 발기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영국 런던 킹스칼리지에 다닐 때 축구를 했다. 뒷날 명 심판으로 이름을 떨치게 될 서병희는 귀국 후 영국 회사인 라이싱선 석유회사 서울 지점장을 맡아 영국인과 같은 대우인 당시로서는 엄청난 700원의 월급을 받는 엘리트 샐러리맨이었다. 인천에 집을 둔 서병희는 서울로 통근하고 있었다. 서병희 심판은 위풍당당하고 권위가 있어 선수들도 자연히 복종하게 돼 경기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러나 청년단 준결승인 서울 배재구락부와 평양 숭실구락부 경기 후반전에 오프사이드 반칙을 놓고 경기가 중단된 가운데 서울과 평양으로 나뉘어 욕설과 주먹질이 오가는 난동이 벌어졌다. 수적으로 열세인 평양 쪽 응원단이 쫓겨나고 평양 사투리로 고래고래 소리 질렀던 숭실대학생 김형종은 가시철망을 결사적으로 넘어 미국인 선교사 집에 숨어 몰매 맞는 것을 피했다.

이 대회에서 나타난 서울과 평양의 대항 의식은 1929년 시작된 서울과 평양 축구 대항전인 경평전에서 두 도시의 시민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뜨거운 경쟁 의식의 시발점이었다.

경기를 속행할 수 없게 되자 청년단은 물론 첫날 말썽이 일어난 중학단도 우승 팀을 가리지 못하고 말았다.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는 말썽으로 경기 일정을 마치지 못했으나 이틀 동안 들어온 입장 수입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대회가 중단되면 입장료를 돌려달라는 조직적인 관중들의 요구가 없어 그대로 조선체육회 수입이 돼 이때부터 조선체육회는 자체 기금을 쌓아 나가게 됐다.

같은 해인 1921년 5월 19일부터 이틀 동안 평양YMCA 주최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가 평양 숭실운동장에서 열렸다. 대회 명칭은 조선체육회와 같았으나 주최자가 다르기 때문에 당시는 어느 단체가 주최하는 대회인가로 구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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