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축구가 15년 전 히딩크를 열망하는 이유를 협회는 되새겨야 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스포티비뉴스=한준 기자]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된 직후, 한국 축구는 2002년 4강 신화 이후 15년 만에 ‘히딩크 현상’을 겪고 있다. 

거스 히딩크(71) 감독이 감독직을 포함해 한국 축구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했다. 대한축구협회는 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며 믿을 수 없다는 자세를 보였으나, 14일 히딩크 감독이 직접 의사를 밝히자 “필요하면 조언을 요청하겠다”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히딩크와 한국 축구의 재결합이 사실상 무산된 것이다.

히딩크 복귀 파동에서 의견이 갈린 대목은, 히딩크 감독이 한국 대표 팀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말한 시점이다. 해당 발언이 언론에 알려진 것은 우즈베키스탄과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 마지막 경기가 끝나고, 9회 연속 본선 진출을 이룬 뒤다. 히딩크 감독이 본선 진출이 확정되자 ‘얌체 같이’ 끼어들었다는 비판론이 있었다. 

히딩크 감독은 14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가진 기자 간담회에서 “지난 6월 중순 이 같은 의사를 대한축구협회 내부 인사에게 전했다”고 했다. 이 시점은 2017년 러시아 컨페더레이션스컵이 개막한 이후로,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경질되고 대표 팀 감독직이 공석이던 때다. 히딩크 감독이 신태용 감독 체제에 끼어든 상황은 아닌 것이다.

당시 히딩크 감독은 한국 대표 팀과 개최국 러시아의 10월 친선 경기 추진에도 가교 구실을 했다. 한국 축구를 돕고자 했던 히딩크 감독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이 해소될 수 있는 대목이다. 

◆ 슈틸리케 경질한 6월, ‘히딩크 제안’에도 협회가 신태용 택한 이유

그렇다면 대한축구협회는 왜 당시 히딩크 감독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우선 히딩크 감독이 제안한 시점에 이용수 기술위원장을 비롯한 기술위원회가 총사퇴했다. 대표팀 감독 인선을 고민하고 결정할 책임자와 조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6월 26일 김호곤 위원장 체제가 출범하고, 7월 4일 개최된 기술위원회에서 히딩크 감독의 제안이 논의되지 않은 것은 의아하다. 김 위원장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겸하고 있다. 히딩크 감독 측의 의사를 직접 전해 들었다.

협회 내부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는 히딩크 감독을 선임할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협회로서는 가장 믿을 만한 카드가 신태용 감독이었다는 의견을 밝혔다. 히딩크 감독이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큰 업적을 냈으나, 한국 축구 현장과 오래 떨어져 있어 대표 팀 사정을 파악하고, 본선행 운명이 걸린 치명적인 두 경기를 치르기에 위험 요소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히딩크 감독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한국 대표 팀 사령탑 재부임에 대한 자체 논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당장 최종 예선 두 경기를 맡기엔 선수 파악 등 일정상 어려운 문제가 있다고 했다. 마침 이용수 당시 기술위원장이 사퇴하면서 최종 예선 남은 두 경기는 국내 감독이 이끈다고 말하기도 했다. 히딩크 감독도 이 생각에 공감했다. 히딩크 감독 측이 협회에 최종 예선 두 경기를 임시 감독으로 치르고 본선 대비는 히딩크 감독과 진행하면 어떻겠냐는 의중을 물은 이유다. 

기술위원회는 슈틸리케호의 수석 코치를 지냈고,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2017년 FIFA(국제축구연맹) U-20 월드컵을 치르며 한국 축구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신 감독이 최적임자라는 판단을 내렸다. 다만, 임시 감독직을 제안하는 것은 신 감독에 대한 신의와 예의에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신 감독 체제에 힘을 실어 줘야, 최종 예선 2경기 준비 과정의 밀도를 높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본선 진출이라는 임무를 완수했다면, 본선까지 이끌 기회를 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보상일 수 있다. 

협회는 애초에 임시 감독으로 정한 것이 아닌 만큼, 현 시점에 히딩크 감독을 어떤 형태로든 부르는 것이 신 감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판단이다. 문제는 최종 예선 두 경기에 여론의 실망감이 크게 남은 것이다. 자신들이 내린 선택과 약속에 책임을 져야 하는 협회는 약속과 불안 사이에 딜레마에 빠진 상태다. 히딩크 감독과 신태용 감독의 공존 및 협업 가능성을 기술위 개최 당시 논의조차 하지 않은 건 아쉬운 대목이다. 

▲ 신태용호가 믿음을 받지 못하는 것은 신태용 감독만의 문제가 아니다. 시스템 전체가 의심 받고 있다. 사진=곽혜미 기자

◆ 과거 실패의 답습, 겨우 2경기 치른 신태용호가 힘 못 받는 이유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여론의 지지다. 협회, 구체적으로 기술위와 대표 팀은 최종 예선 두 경기의 정성적 평가와 대안에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국가 대표 팀은 축구 팬들뿐 아니라 온 국민의 관심을 받는다. 이란, 우즈베키스탄과 무득점 무승부 이후, 타 경기 결과로 확정된 본선 진출에 여론 대다수가 실망감을 나타냈다. 이 와중에 신 감독이 선수들과 헹가래를 친 게 큰 질타를 받았다. 

신 감독 체제를 본선까지 유지하는 것은 협회가 약속을 지키는 일이지만,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일로 비쳐지고 있다. 히딩크 감독의 의사가 뒤늦게 밝혀진 이후 역풍이 거세졌다. 

협회와 기술위가 최종 예선 두 경기에 히딩크 감독보다 신 감독 체제가 유리하다고 판단했더라도, 이미 6월에 히딩크 감독의 제안이 있었다면 본선 진출에 성공할 경우 활용 방안에 대한 논의로 운신의 폭을 넓힐 수도 있었다.

현재 언급되고 있는 기술 고문을 포함해 총감독, 공동 감독 등 다양한 방식으로 히딩크 감독이 갖춘 노하우와 능력을 활용할 여지를 만들수 있다. 이런 계획을 갖췄다면 최종 예선 마지막 일정은 물론, 본선 준비 과정의 밀도를 높일 수 있었다. 신 감독의 합의나 양해를 구하는 과정도 더 매끄러울 수 있었다. 

2010년 남프리카아공화국 월드컵 16강, 20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 이후, 국가 대표 팀과 연령별 대표 팀은 꾸준히 부진한 성적으로 위기론에 시달렸다. 경기력과 성적도 하락세를 겪었고, 대표 팀에 대한 팬들의 기대도 떨어졌다. 수많은 감독이 교체됐는데, 이 과정에서 기술위가 제대로 대표 팀을 지원하고 있느냐는 문제도 도마 위에 올랐다. 

히딩크 논란은 기술위 공백기에 촉발됐다. 새로 출범한 기술위는 현역 K리그 감독 등이 다수 포함된 형태로 구성돼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신태용호 출범 과정에서 코칭스태프 구성도 차두리, 김남일 등 지도자 경력 초입에 있는 ‘형님 리더십’이 뼈대를 이뤄 전문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즉, 신태용호가 겪는 불신은 신태용 감독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다. 

협회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실패,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예선 기간 실패를 답습하고 있다. 본선을 1년 여 앞두고 사령탑을 교체했다. 연령별 대표 팀을 거치며 성장하던 젊은 지도자에게 큰 짐을 떠맡겼다. 슈틸리케 선임 당시에는 피지컬 코치 카를로스 아르무아만 동행했다. 보통 외국인 지도자를 영입하면 수석 코치, 체력 코치, 전력분석관 등이 팀으로 움직인다. 

▲ 대한축구협회 ⓒ연합뉴스

슈틸리케 전 감독에겐 그런 팀이 없었다. 예선을 치르는 내내 코칭스태프 보강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홍명보 전 감독의 코칭스태프였던 박건하, 김봉수 코치가 잔류하다 떠났고 신태용 감독이 코치로 일하다 연령별 대표 팀 감독을 맡으며 떠났다.

경력이 풍부한 외국인 수석 코치와 스포츠 과학자를 보강하겠다는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코칭 라이선스 취득 이전의 차두리가 전력분석관 직함을 달고 실제론 코치 임무를 하다가 그만뒀다. 차두리는 2015년 3월까지 국가 대표 선수였다. 이제 막 시작한 초보 지도자다.

경험이 많은 정해성 수석 코치가 부임했다가 슈틸리케 감독이 경질되자 두 경기만에 함께 자리를 잃었다. 성균관대를 이끌던 설기현 감독도 코치로 왔다가 잠시 일하고 떠났다. 신태용호 출범과 운영 과정도 과거의 행태와 다르지 않다. 경험도 부족하고, 체계적인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여론은 이런 현상에 대해 불신하고 있다. 이 와중에 협회가 돕고 싶다는 의견을 전한 히딩크 감독에 대해 불편하다는 반응을 보이자 여론과 싸움판이 벌어졌다. 

협회는 ‘히딩크 현상’과 싸워야 하는 게 아니라, 협회와 대표 팀을 향한 불신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히딩크 현상은 현 대표 팀에 대한 기대감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협회와 기술위는 언론에 공개되며 ‘여론전’이 된 히딩크 현상에 불쾌감을 나타내기보다 스스로 왜 협회와 대표 팀에 대한 기대와 인식이 이렇게 됐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의사 결정 과정은 더 치밀해야 한다.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기술위원장 한 사람, 감독 한 사람이 실패에 대해 책임을 지는 구조가 아니라, 시스템이 힘을 발휘하는 운영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협회는 14일 공식 발표문에서 히딩크 감독의 직접 인터뷰에도 감독직은 물론, 상시직을 제안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밝혔다. 가뜩이나 신뢰 받지 못하던 대표 팀은, 이제 러시아 월드컵 본선까지 히딩크를 외면한 것에 대한 책임과도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됐다. 김 위원장은 히딩크 감독의 제안을 들어 보지 못했다는 자세를 고수하다가 돌연 6월에 연락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여론의 비난이 더 거세졌다.

히딩크 감독은 2018년 러시아 월드컵 해설 위원 계약에 대해 말했지만, 협회의 제안에 따라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했다. 협회도 ‘기술위원회 및 신태용 감독과 협의해 히딩크 감독에게 조언을 구할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요청하겠다’는 단서는 달아 뒀다. 아직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

결정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10월 유럽 원정 A매치 소집 일정이 시작되면 어떤 것도 돌이킬 수 없다. 협회가 앞으로 신태용호를 어떻게 지원할지, 그 지원책 안에 히딩크 감독이 있을지 기로에 있다. 협회는 딜레마에 빠져 있고, 한국 축구는 풀기 어려운 거대한 숙제에 직면했다. 

글=한준 (스포티비뉴스 축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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